2016년 11월 16일 수요일

유성룡 집터, 이순신 생가터

충무로역 3번출구 한국의집 입구는 ‘박팽년 집 터’이다. 박팽년(朴彭年, 1417~1456)은 단종 1년(1453) 계유정난(癸酉靖難) 이후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참화를 당한 의절의 대명사격 인물이다. 학창 시절 국어시간에 배웠던 취금헌의 “가마귀 눈비 마자”를 읊조려 본다.
대한극장을 지나 퇴계로4가 방면으로 걷다 보면 SK주유소 앞 화단에 ‘남부 낙선방 먹절골은 임진왜란 때의 영의정 서애 유성룡 선생이 살던 곳’이라 쓰여 있는 표석이 있다. 조선 후기에 이희준(李羲準)이 편찬한 계서야담(溪西野譚)에는 류성룡(柳成龍, 1542~1607)과 그 치숙(痴叔)의 임진왜란과 바둑에 얽힌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조선 초기부터 한양에는 중국 사신을 위한 태평관(太平館, 시청역 인근), 여진인을 위한 북평관(北平館, 종로6가 동대문 근처) 등의 객사(客舍)가 있었는데, 동평관(東平館)은 일본인이 머물던 곳으로 남산 기슭 인현동 2가에 있었다. 덕수중학교 초입 왼편의 인현어린이공원에 가면 ‘동평관 터’ 표석을 볼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은 1545년 4월 28일 서울 건천동에서 출생하여 유년기를 보냈는데, 아래 애정다방(인현동1가 31-2 신도빌딩) 인근이 이순신의 생가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준비하던 당시 검정 오류로 명보아트홀 앞쪽에 이순신 장군의 생가터 표지석이 설치되고 말았다. 할머니 한 분이 때묻은 표지석을 닦고 있다.


관광객은 물론이고, 후세대들을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올바른 역사관 정립을 위해서 전국의 잘못된 모든 표지석의 내용과 위치가 바로 잡아져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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