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원구 한글비석로에 위치한 조선 중기의 문신 충숙공 이상길의 묘역.
차를 타고 무심히 지나치기만 하다가 오늘에야 한걸음 들러봄.
촬영한 안내문 사진의 글씨가 작아 보이지 않으므로 안내문의 내용을 아래에 옮겨 적는다.
이곳은 병자호란 때 강도사직을 수호하다 순절한 충신 이공 휘 상길(1556~1637)과 선고인 찬성공 휘 희선(1530~1592) 그리고 백씨 평사공 휘 상철(1552~1594)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공의 호는 동천(東川)이요 시호는 충숙(忠肅)이고 관은 벽진(碧珍)이니 시조는 고려삼중대광개국 원훈 벽진장군 휘 총언인데, 공이 22세손이며 청백리로 청사에 빛나는 평정공 휘 약동의 5대손이다.
공은 명종 11년(1556) 병진 12월 3일 자시에 한양 주자방에서 태어나고 선조 18년(1585) 을유 9월에 식년 문과 갑과에 제2등으로 백씨인 평사공 휘 상철과 함께 급제하였다.
공의 관직은 자헌대부 공조판서에 이르렀고, 대광보국ㆍ숭록대부ㆍ의정부 좌의정 겸 영 경연감춘추관사에 증직되었다.
공이 인조 15년(1637) 정축 1월 26일 사생취의하여 묘사를 수호하다가 순절하니 향수 82세에 영예의 생을 마쳤다.
2월에 선원촌에 권장하였다가 그해 4월에 이곳으로 반장되었으며 부조의 명을 받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예손들이 봉향하고 있다.
공의 신도비명은 성균관제주 문정공 우암 송시열이 찬하였으며 성균관제주 동춘 송준길이 쓰고 예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 문곡 김수항이 전하였다.
이 신도비는 1988년 4월 20일자로 서울특별시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되고 영정은 공이 80세 때에 화가 김명국이 두폭을 그려 한폭은 남원덕과에 보물 제792호로 지정되고 또 한폭은 서울특별시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어 각각 충영각에 봉안되어 있다.
사당인 동천재(東川齋)의 모습.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동천재 뒤편으로는 이상길의 영정을 모신 충영각(忠影閣)이 있다.
묘역 앞 신도비와 앞쪽 우측의 하마비 뒤편으로 선산이 조성되어 있다. 현종 2년(1661)에 화강석으로 제작된 3.16m의 신도비는 사각의 받침돌 위에 비신을 세우고, 팔각 지붕돌을 얹은 조선 중기의 양식이다.
신도비(神道碑)는 임금이나 종2품 이상 벼슬아치의 무덤 앞이나 근처 길목에 세워 죽은 사람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고, 하마비(下馬碑)는 종묘나 궐문 또는 문묘 앞에 세워 놓은 비석으로, 하마비가 서 있으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뜻이다.
이상길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명을 받아 80세의 노령에도 종묘와 사직의 위패를 모시고 강화도로 들어갔다. 그러나 남한산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다가 이듬해 1월 청나라 군대가 강화도로 몰려오자 아들에게 뒷일을 부탁한 뒤 목을 매어 순절하였다. 강화도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동천집」이 있다.
차를 타고 무심히 지나치기만 하다가 오늘에야 한걸음 들러봄.
촬영한 안내문 사진의 글씨가 작아 보이지 않으므로 안내문의 내용을 아래에 옮겨 적는다.
이곳은 병자호란 때 강도사직을 수호하다 순절한 충신 이공 휘 상길(1556~1637)과 선고인 찬성공 휘 희선(1530~1592) 그리고 백씨 평사공 휘 상철(1552~1594)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공의 호는 동천(東川)이요 시호는 충숙(忠肅)이고 관은 벽진(碧珍)이니 시조는 고려삼중대광개국 원훈 벽진장군 휘 총언인데, 공이 22세손이며 청백리로 청사에 빛나는 평정공 휘 약동의 5대손이다.
공은 명종 11년(1556) 병진 12월 3일 자시에 한양 주자방에서 태어나고 선조 18년(1585) 을유 9월에 식년 문과 갑과에 제2등으로 백씨인 평사공 휘 상철과 함께 급제하였다.
공의 관직은 자헌대부 공조판서에 이르렀고, 대광보국ㆍ숭록대부ㆍ의정부 좌의정 겸 영 경연감춘추관사에 증직되었다.
공이 인조 15년(1637) 정축 1월 26일 사생취의하여 묘사를 수호하다가 순절하니 향수 82세에 영예의 생을 마쳤다.
2월에 선원촌에 권장하였다가 그해 4월에 이곳으로 반장되었으며 부조의 명을 받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예손들이 봉향하고 있다.
공의 신도비명은 성균관제주 문정공 우암 송시열이 찬하였으며 성균관제주 동춘 송준길이 쓰고 예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 문곡 김수항이 전하였다.
이 신도비는 1988년 4월 20일자로 서울특별시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되고 영정은 공이 80세 때에 화가 김명국이 두폭을 그려 한폭은 남원덕과에 보물 제792호로 지정되고 또 한폭은 서울특별시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어 각각 충영각에 봉안되어 있다.
사당인 동천재(東川齋)의 모습.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동천재 뒤편으로는 이상길의 영정을 모신 충영각(忠影閣)이 있다.
묘역 앞 신도비와 앞쪽 우측의 하마비 뒤편으로 선산이 조성되어 있다. 현종 2년(1661)에 화강석으로 제작된 3.16m의 신도비는 사각의 받침돌 위에 비신을 세우고, 팔각 지붕돌을 얹은 조선 중기의 양식이다.
신도비(神道碑)는 임금이나 종2품 이상 벼슬아치의 무덤 앞이나 근처 길목에 세워 죽은 사람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고, 하마비(下馬碑)는 종묘나 궐문 또는 문묘 앞에 세워 놓은 비석으로, 하마비가 서 있으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뜻이다.
이상길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명을 받아 80세의 노령에도 종묘와 사직의 위패를 모시고 강화도로 들어갔다. 그러나 남한산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다가 이듬해 1월 청나라 군대가 강화도로 몰려오자 아들에게 뒷일을 부탁한 뒤 목을 매어 순절하였다. 강화도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동천집」이 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