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15일 토요일

조선의 정치와 정약용의 『목민심서』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는 다산 경세학(정치사회학)을 대표하는 주저들이다.
오래된 나라를 새롭게 하기 위해(신아구방: 新我舊邦) 다산이 내놓은 『경세유표』는 특정한 역사적 상황을 넘어 장구한 시간 동안 존속 가능한 ‘신국가건설’ 기획안을 담은 것이다. 『경세유표』는 표면상 복고적인 색채를 띠고 있지만, 특정한 사대부의 발호 그리고 군왕의 정치전횡을 막기 위해 철저하고 치밀하게 고안된 정치체제, 공적인 관료제시스템을 갖추고 있으며, 현실병폐를 바로잡기 위한 다산 나름의 주요한 사회개혁 프로그램을 반영해놓은 것이다.

이처럼 『경세유표』가 미래의 이상적인 국가시스템을 전반적으로 밝힌 것이라면, 『목민심서』와 『흠흠신서』는 당시 조선의 법제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시급한 민생 사안들을 해결하기 위한 일종의 대증요법으로서 마련된 것이다.
조선의 대표 판례집이라고 할 만한 『흠흠신서』는 『목민심서』 중 형전(刑典)의 형사판결 조항을 보다 상세히 풀이한 것이다.

『목민심서』 역시 19세기 정치경제적 상황의 변화 속에서 수동적 피지배층에 머물지 않았던 조선후기 민(民)의 변화된 의식과 사회적 지위를 반영하고 있다. 다산은 소민(小民)인 백성이야말로 군주와 조정대신보다 무서운 상제(上帝)의 명령, 즉 천명(天命)을 들려주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했다.
『목민심서』는 외견상으로 보면 지방행정 지침서, 실무요령서 정도로 보인다. 목민(牧民)의 다른 표현은 결국 치민(治民)이다. 유학사회에서 정치는 항상 지배 엘리트와 피지배 계층의 관계로 구분되었기 때문에 목민(牧民)이란 표현이야말로 당시의 정치행위, 통치행위를 잘 보여주는 말이다. 목(牧)이라고 하면 임금을 비롯한 모든 통치자를 가리키지만, 지방수령을 특히 목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목민관 혹은 목령(牧令)이라고 부를 때 ‘근민(近民)’이라고 해서 백성을 직접 상대하는 각 지 수령을 가장 중요한 위정자로서 간주했기 때문이다. 다산은 일국의 국왕과 수령이 비록 통치규모는 다를지라도 지위와 권한이 비슷하다고 보았다. 군현제 하에서 지방수령은 봉건제의 지방영주와도 유사하다고 본 것이다.

조선인이 직접 목민서류를 저술하고 발간·유포한 것은 17~19세기 사이였고 조선후기에 목민서에 대한 정치수요가 급증했다. 다산이 밝혔듯이 삼대 기본강령과 육전(六典; 이호예병형공) 체제 그리고 비상시 진황과 구휼을 위한 대비책까지 마련해 일사분란하게 지방행정 및 통치를 위한 지침을 구비해 놓았기 때문에 『목민심서』만큼 체제나 내용면에서 완성도가 높은 작품은 없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율기(律己)·봉공(奉公)·애민(愛民)을 기(紀)로 삼고, 이전·호전·예전·병전·형전·공전을 육전(六典)으로 삼고, 진황(振荒) 1목(目)으로 마무리하였다. 부임에서 해관에 이르기까지 12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편에 6조를 배치했기 때문에 전체 72조로 편성되어 있다. 그런데 특히 책의 이름을 ‘심서(心書)’라고 이름 붙인 것은 ‘목민’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으나 유배자로서 신분 때문에 목민할 수 없기에 오직 ‘마음’으로 쓴 책이라는 뜻에서 심서를 붙였다는 것이다. 『경세유표』가 이상적 정치시스템을 목표로 한 것이기 때문에 현실에서 곧바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이라고 판단, 당장의 시급한 민생사안을 해결하기 위한 방도로 작성했다고 밝혔듯이 『목민심서』는 현실 병폐를 해결하기 위한 대증요법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특히 민의 사법재판과 관련된 부분은 전문성과 정밀성을 요하는 문제라서 『목민심서』 형전(刑典)에서 주장했듯이 별도로 『흠흠신서』를 마련해 상세히 설명했다.

율기, 봉공, 애민의 3가지 기본강령은 수령 자신의 도덕적 주체 확립과 관련된 것으로 위정자의 개인수양에 초점을 맞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호예병형공’으로 나누어진 6전은 수령의 구체적 제반업무들을 열거한 것이며, 흉년을 당했을 때 비상시를 위해 진황 편을 따로 편성했다. 12편이 각자 정연하게 구성되어 있지만 내용의 비중이나 분량으로 볼 때 6전 부분이 가장 방대하며 길다. 따라서 『목민심서』에서 다산이 『경세유표』의 중앙관제시스템의 삼정승 및 의정부 산하 육조(六曺)의 체제를 강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방의 행정운영시스템으로 6전 체제를 강조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전통적으로 내려온 수령 ‘칠사론(七事論)’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수령은 농업 장려, 호구수 증가, 학교증설, 군대정비, 부역의 공평성 확보, 옥사의 공정 처리, 흉악 범죄 예방· 통제 등 전통적으로 강조된 7가지 항목 외에도 다양한 직무를 감당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수령칠사론을 대체하기 위한 다산의 6전 36조 편성은 주로 전세(田稅)와 공부(貢賦) 등 민생 및 국가재정 문제를 중심으로 편성되었고, 유배기 다산의 구체적 경험을 바탕으로 구성된 것이다.


다산은 예전(禮典) 변등(辨等) 조목에 나타난 바와 같이 등급과 위계의 구분이 없을 수 없다고 보았다. 물론 다산도 기본적으로는 모든 사람에게 노력의 가능성과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보았다. 다산은 서얼 문제의 해소, 중인의 사회적 지위 향상, 지방 부유층 중 공로자에 대한 관직 수여 등을 강조했는데, 이 또한 다산이 조선후기 새로 성장하던 서얼, 중인, 부민층을 중심으로 다양한 계층의 인재를 관료기구로 흡수, 자신이 구상한 관료제의 사회적 저변을 확대하려고 한 의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다산은 철저하게 양천제(良賤制)와 노비제, 즉 양인과 천민의 차별적 신분질서를 인정했고, 양인들 사이에서도 오래된 가문의 사대부들을 특별 대우했다.

『목민심서』와『흠흠신서』의 이념을 볼 때 백성을 가장 두려워하고 존귀하게 여겨야 할 대상으로 상정한 것은 분명하지만 젊은 시절 작성한 「원목」이나 「탕론」 정도로 민의 정치적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백성의 정치참여를 위한 제도적·방법론적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않았다. 특히 대표적 정법서에는 소수 위정자에 의한 계도적·계몽적 정치행위를 가장 중시하게 다루고 있다.
- 백민정 성균관대 교수, “우리시대는 어떤 목민관을 원하는가” 제5강 요약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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