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과 소련 간의 이데올로기 냉전체제에서 군비경쟁이 가속화되었다. 그렇다면 왜 소련이 인공위성을 더 먼저 발사할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2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소련의 인공위성 발사 프로젝트의 책임을 맡았던 꾸랼료프는 자신이 인류역사상 첫 번째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랐을 뿐만 아니라 인공위성 발사경쟁에서 미국을 이기기를 강력히 희망했다. 따라서 그는 소련 정부에 무제한적인 경제적 지원을 요청했고, 소련 정부가 받아들였다.
둘째, 동독에서 소련으로 넘어간 독일 과학자들이 인공위성 발사 연구에 참여하여 과학기술적인 측면에서 많은 공헌을 하였다.
약 12년 뒤 1969년 7월 16일 미국은 유인선인 아폴로 11호를 인류 최초로 달에 보내게 되었다. 그렇다면 인공위성 발사에서 소련에 비해 그렇게 뒤쳐졌던 미국이 어떻게 12년 만에 인간을 먼저 달에 보낼 수 있었을까?
그 답은 플로리다 주에 위치한 케네디 스페이스센터에 있다. 케네디 대통령은 인간을 달에 보내기 위해 미국 정부의 무제한적인 재정지원을 약속했고, 그 후 매년 GNP의 약 5% 정도를 인공위성 발사 연구에 투자하였다. 바로 이처럼 엄청난 재정지원을 해준 케네디의 이름을 붙여 케네디 스페이스센터라고 부른다.
소련과 미국의 사례에서 공히 드러나듯이 인공위성 발사와 학교교육은 어떠한 특별한 관련도 맺고 있지 않다. 인공위성 발사 성공에 결정적이었던 것은 이 연구에 필요한 엄청난 재정지원의 문제였다. 그러나 미국의 보수적인 정치인들은 미국이 인공위성 발사경쟁에서 소련에게 밀린 것은 잘못된 학교교육, 즉 진보주의 교육 때문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렇다면 미국이 학교교육을 개혁하자마자 곧바로 효과가 나타나서 소련보다 먼저 인간을 달에 보낼 수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가? 이는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학문 중심 교육과정이 적용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중반이며, 그조차도 대부분의 학교에서 실패하여 새로운 교육과정이 제대로 적용된 곳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의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치활동의 실패로 문제가 발생하고 희생양이 필요할 때면 항상 학교교육을 지목하는 경향이 있다.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교육이 더 이상 정치적인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