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디지털역량강화 교육을 나가는 운니동 팔도강산국악예술단에는 재미있는 국악기와 국악소품이 많다. 오늘은 목화솜 달린 보부상 패랭이가 눈에 들어왔다.
예전엔 생선·소금·나무그릇·질그릇·무쇠 등 부피가 크고 값싼 일용품을 지게에 지고 다니면서 판매하는 상인을 부상(負商) 또는 등짐장수라 하고, 비단·명주·모시·면화·가죽 등 부피가 작고 값나가는 품목을 보자기에 싸서 들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판매하는 상인을 보상(褓商) 또는 봇짐장수라 했던바… 보부상(褓負商) 혹은 부보상(負褓商)은 봇짐장수(보상)와 등짐장수(부상)를 통틀어 이르는 명칭이다.
그런데 보부상이 등장하는 역사물을 보면 패랭이 양쪽에 목화솜뭉치 2개가 달린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기원썰을 살펴보면…
고려말 도순찰사 이성계가 전라도 황산(荒山)에서 아기발도(阿只拔都)가 지휘하는 왜구와 교전 중 왼쪽 다리에 화살을 맞았는데, 종군하던 백달원의 수하 중 면화상이 지참한 면화로 응급처치를 했다. 나중에 새 왕조를 연 이성계는 이를 기념하여 패랭이 왼쪽에 목화송이를 달도록 했다.
또한, 병자호란을 당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 중 상처를 입어 출혈이 생겼을 때 보부상 중 솜장수가 가지고 있던 솜으로 지혈을 했다고 한다. 호란 이후 인조가 태조 대의 일을 상기하여 패랭이 우편에 목화송이 하나를 더 달도록 하여 좌우에 목화송이가 부착된 패랭이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1866년(고종3) 흥선대원군이 8도의 부상단과 보상단을 통합 관장하는 보부청(褓負廳)을 설치하고, 1883년(고종20)엔 개항 이후 외국상인의 침투와 상업의 자유화에 밀려 위협을 받게 된 보부상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국아문(軍國衙門)의 관할 아래 혜상공국(惠商工局)을 설치한다.
하지만 보부상단은 국가의 비호를 받다보니 자연스레 어용화 하기도 했다. 1894년(고종31) 동학농민운동 때 관군과 일본군의 길잡이가 되어 동학군을 진압하는데 일조하고, 1898년(광무2) 황국협회로 이속된 이후엔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를 습격하여 독립협회와 함께 해산되었다.
내가 관심을 보이자 팔도강산국악예술단 원장님이 위드 코로나로 가게 되는 11월 야외공연 때 패랭이 쓰고 함께해보자 권유하시는데, 여건이 된다면 한번 시도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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