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차 역사문화트레킹으로 남양주 화도읍을 다녀왔다. 경춘선 마석역 1번출구에서 마석윗삼거리를 지나 1㎞쯤 걸으면 모란공원이다. 입구 왼쪽의 모란미술관을 지나면 바로 오른편에 민족민주열사묘역이 있다.
김근태(1947~2011)는 서울상대 재학 때부터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대표적인 재야 인사였다. 박정희·전두환 파쇼정권에 저항하며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하였다. 이 때문에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기술자로 불리는 이근안에 의해 온갖 고문을 당하게 된다. 종국엔 고문 후유증과 파킨슨병으로 고생하다가 64세로 타계했다. 참여정부 시절 “계급장 떼고 논쟁하자”고 대통령에게 맞장 뜨던 뜨거운 열정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1970년 11월 13일 22살의 전태일(1948~1970)이 분신하자 3공정권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모란공원으로 장지를 결정했다. 이후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의 유해가 하나 둘 모란공원으로 모이면서 그 상징성은 더욱 짙어지게 된다. 2011년 9월에는 전태일의 어머니인 이소선(1929~2011) 여사가 아들 묘소 뒤쪽으로 모셔져 영면하고 있다.
‘늦봄’ 문익환(1918~1994) 목사님은 평생을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헌신해 온 분으로 내가 존경하는 정말 몇 안되는 목사님 중 한 분이다. 그의 시집 「두 하늘 한 하늘」을 간직하고 있다. 2011년 부인 박용길 장로가 별세하며 각막을 기증했다.
1987년 1월 14일 5공정권은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박종철(1965~1987)을 고문치사(拷問致死)하고 이를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며 조작 은폐하여 6월항쟁을 불러온다.
민주열사묘역 왼쪽 권역, 조계종 달뫼산 아미타사 일주문 맞은편에는 영혜옹주의 남편이자 철종의 부마도위인 박영효(1861~1939)의 묘소가 있다. 경술년의 병탄 이후 박영효는 후작 작위를 받고 조선귀족회 회장, 중추원 의장을 역임하며 반민족 친일행보를 이어갔다. 1882년 9월 수신사 일행으로 도일하는 메이지마루(明治丸)호 선상에서 박영효가 이응준의 태극기에서 4괘를 바꾼 태극기를 디자인했다고 한다. 박영효의 손녀인 박찬주는 의친왕 이강의 차남으로 알려진 이우와 결혼했다.
모란공원을 나와 마석역 방향의 경춘로를 걸어 마석그랜드힐 아파트길로 들어섰다. 204동 오른편 인공바위 밑 나무데크 계단을 올라간 후 산책로를 거쳐 벤치 앞에서 철망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고 하산길을 잡으니 흥선대원군묘 곡장 위쪽으로 나올 수 있었다. 여기서 산나물을 다듬고 있는 여성 한 분(이 여사)을 마주쳤다. 본인을 흥선대원군의 5대 손녀라고 소개했다. 1시간 넘게 머물면서 대한제국 황실에 대한 이런저런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게 되었는데, 하나 같이 흥미로운 이야기들이다.
이곳은 흥선대원군의 3번째 음택이다. 그는 광무 2년(1898.2.22)에 운현궁의 별서이자 수장(壽葬, 생전에 만들어 놓은 무덤)을 겸했던 고양군 공덕리(현 염리동 동도중학교) 아소당(我笑堂)에서 운명한 뒤 뒤뜰에 묻혔다. 대한제국 시기였기에 대원군도 대원왕으로 추봉되었다. 10년 뒤인 1908년 조정의 논의 끝에 왕에 걸맞는 예우를 위해 파주군 운천면 대덕리(현 문산읍 운천리)로 천봉(遷奉)되면서 흥원(興園)으로 격상되었다. 운천은 6·25전쟁 후 휴전선과 인접한 군사작전지역이었기에 미군 제2보병사단의 요청에 따라 1966년 6월 16일 이곳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의 운현궁 가족묘지로 재천봉되었다.
흥원은 흥선헌의대원왕 이하응과 배위 순목대원비(純穆大院妃) 민씨의 합장원(합장묘) 형식이다. 묘역 입구에 국태공원소(國太公園所)라고 음각된 석조 묘표가 있다. 왕의 묘는 산릉(山陵), 왕세자·왕세자빈이나 왕의 친척들의 무덤은 원소(園所), 일반 묘는 산소(山所)라 부른다.
대한흥선헌의대원왕(大韓興宣獻懿大院王) 신도비의 비신은 깨어지고 떨어진 곳이 많이 보였다. 원침(園寢)을 수호하는 석양은 있는데, 석호는 보이지 않는다. 혼이 좌정하는 혼유석은 귀면이 새겨진 4개의 고석이 받치고 있다. 좌우 망주석에 가늘게 조각한 호랑이 문양의 세호(細虎)가 오르내리고 있다. 원(園)이기 때문에 무인석은 없다. 원침 오른편의 하얀 계단은 신계(神階)일까. 전체적으로 석물들의 파손 흔적이 많아 보인다.
뒷줄 왼쪽부터 흥선대원군의 적장자이자 고종의 친형 흥친왕(興親王 이재면 1846~1912), 정조의 이복동생이자 흥선대원군의 조부 은신군(恩信君 이진 1755~1771), 은신군 종숙이자 흥선대원군의 증조부뻘 낙천군(洛川君 이온 1720~1737), 앞줄 왼쪽부터 이우 차남 이종(李淙 1940~1966), 이우 장남 이청(李淸 1936~ ), 이준의 아들 이우(李鍝 1911~1945), 이준 동생 이문용(李汶鎔 1882~1901), 흥친왕의 아들이자 흥선대원군의 적장손 이준(이준용 李埈鎔 1870~1917) 순이다. 이청과 이문용의 생몰연대는 새겨져 있지 않고, 이청·이우·이준은 각각 이청공·이우공·이준공으로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여사님 주장에 따르면 부동산업자들이 묘역을 훼손하고 납골당으로 만들어버렸다고 하는데, 사실관계를 입증할 필요가 있겠지. 이들의 묘표·묘갈·신도비 등의 묘비들은 현재 서울역사박물관 광장에 옮겨져 있다. 우측으로 기울어진 장명등을 지탱하기 위해 오른쪽 문인석 발치까지 지지목을 대어 놓은 모습이 안쓰럽다.
이 여사님이 알려준 대로 흥친왕묘 위쪽으로 조금 올라갔더니 한 켠이 무너진 곡장을 두른 무덤이 하나 나왔다. 그가 ‘꼭대기 할아버지’로 부른다는 이재선(李載先)의 묘소였다. 오마이갓! 실전된 것으로 알고 있던 완은군(完恩君)의 묘소를 발견하게 될 줄이야!
흥선대원군의 서장자이자 흥친왕과 고종의 이복형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계동 큰서방님’의 숨겨진 얘기를 흥미진진하게 들을 수 있었음은 크나큰 행운이었다.
탐방을 마치고 이준용묘 옆 오솔길을 따라 마을로 접어들었는데 재실(齋室)로 볼만한 집을 찾지 못했다. 폭포로17번길을 걸어나와 마석역으로 회귀했다.
석가탄신일인데도 공휴일 시간표가 아니라 평일 시간표대로 경춘선이 운행되어 헷갈렸다. 경춘선 객차에는 최소한의 매너나 공중도덕마저 개무시하는 쫄복 입은 자전거족이 그득했다. 객차 바닥에 쭈구려 앉는 것은 물론이고 ‘휠체어 이용고객 배려공간’이기에 “자전거를 거치할 수 없습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는 곳까지 지멋대로 자전거들을 기대어 놓았다. 지들 건강과 취미와 오락과 여흥을 위해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몰지각·몰상식·몰염치·몰싸가지·민폐 부류들을 정말이지 극혐한다.
김근태(1947~2011)는 서울상대 재학 때부터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대표적인 재야 인사였다. 박정희·전두환 파쇼정권에 저항하며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하였다. 이 때문에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기술자로 불리는 이근안에 의해 온갖 고문을 당하게 된다. 종국엔 고문 후유증과 파킨슨병으로 고생하다가 64세로 타계했다. 참여정부 시절 “계급장 떼고 논쟁하자”고 대통령에게 맞장 뜨던 뜨거운 열정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1970년 11월 13일 22살의 전태일(1948~1970)이 분신하자 3공정권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모란공원으로 장지를 결정했다. 이후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의 유해가 하나 둘 모란공원으로 모이면서 그 상징성은 더욱 짙어지게 된다. 2011년 9월에는 전태일의 어머니인 이소선(1929~2011) 여사가 아들 묘소 뒤쪽으로 모셔져 영면하고 있다.
‘늦봄’ 문익환(1918~1994) 목사님은 평생을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헌신해 온 분으로 내가 존경하는 정말 몇 안되는 목사님 중 한 분이다. 그의 시집 「두 하늘 한 하늘」을 간직하고 있다. 2011년 부인 박용길 장로가 별세하며 각막을 기증했다.
1987년 1월 14일 5공정권은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박종철(1965~1987)을 고문치사(拷問致死)하고 이를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며 조작 은폐하여 6월항쟁을 불러온다.
민주열사묘역 왼쪽 권역, 조계종 달뫼산 아미타사 일주문 맞은편에는 영혜옹주의 남편이자 철종의 부마도위인 박영효(1861~1939)의 묘소가 있다. 경술년의 병탄 이후 박영효는 후작 작위를 받고 조선귀족회 회장, 중추원 의장을 역임하며 반민족 친일행보를 이어갔다. 1882년 9월 수신사 일행으로 도일하는 메이지마루(明治丸)호 선상에서 박영효가 이응준의 태극기에서 4괘를 바꾼 태극기를 디자인했다고 한다. 박영효의 손녀인 박찬주는 의친왕 이강의 차남으로 알려진 이우와 결혼했다.
모란공원을 나와 마석역 방향의 경춘로를 걸어 마석그랜드힐 아파트길로 들어섰다. 204동 오른편 인공바위 밑 나무데크 계단을 올라간 후 산책로를 거쳐 벤치 앞에서 철망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고 하산길을 잡으니 흥선대원군묘 곡장 위쪽으로 나올 수 있었다. 여기서 산나물을 다듬고 있는 여성 한 분(이 여사)을 마주쳤다. 본인을 흥선대원군의 5대 손녀라고 소개했다. 1시간 넘게 머물면서 대한제국 황실에 대한 이런저런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게 되었는데, 하나 같이 흥미로운 이야기들이다.
이곳은 흥선대원군의 3번째 음택이다. 그는 광무 2년(1898.2.22)에 운현궁의 별서이자 수장(壽葬, 생전에 만들어 놓은 무덤)을 겸했던 고양군 공덕리(현 염리동 동도중학교) 아소당(我笑堂)에서 운명한 뒤 뒤뜰에 묻혔다. 대한제국 시기였기에 대원군도 대원왕으로 추봉되었다. 10년 뒤인 1908년 조정의 논의 끝에 왕에 걸맞는 예우를 위해 파주군 운천면 대덕리(현 문산읍 운천리)로 천봉(遷奉)되면서 흥원(興園)으로 격상되었다. 운천은 6·25전쟁 후 휴전선과 인접한 군사작전지역이었기에 미군 제2보병사단의 요청에 따라 1966년 6월 16일 이곳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의 운현궁 가족묘지로 재천봉되었다.
흥원은 흥선헌의대원왕 이하응과 배위 순목대원비(純穆大院妃) 민씨의 합장원(합장묘) 형식이다. 묘역 입구에 국태공원소(國太公園所)라고 음각된 석조 묘표가 있다. 왕의 묘는 산릉(山陵), 왕세자·왕세자빈이나 왕의 친척들의 무덤은 원소(園所), 일반 묘는 산소(山所)라 부른다.
대한흥선헌의대원왕(大韓興宣獻懿大院王) 신도비의 비신은 깨어지고 떨어진 곳이 많이 보였다. 원침(園寢)을 수호하는 석양은 있는데, 석호는 보이지 않는다. 혼이 좌정하는 혼유석은 귀면이 새겨진 4개의 고석이 받치고 있다. 좌우 망주석에 가늘게 조각한 호랑이 문양의 세호(細虎)가 오르내리고 있다. 원(園)이기 때문에 무인석은 없다. 원침 오른편의 하얀 계단은 신계(神階)일까. 전체적으로 석물들의 파손 흔적이 많아 보인다.
흥원 오른편 지척에는 지도상에 흥친왕묘로 표시된 곳이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봉분이 없고 곡장 안쪽으로 운현궁 일가 8인의 이름과 생몰연대가 새겨진 비석만 놓여 있다.
興親王 恩信君 洛川君
李淙 李淸公 李鍝公 李汶鎔 李埈公
뒷줄 왼쪽부터 흥선대원군의 적장자이자 고종의 친형 흥친왕(興親王 이재면 1846~1912), 정조의 이복동생이자 흥선대원군의 조부 은신군(恩信君 이진 1755~1771), 은신군 종숙이자 흥선대원군의 증조부뻘 낙천군(洛川君 이온 1720~1737), 앞줄 왼쪽부터 이우 차남 이종(李淙 1940~1966), 이우 장남 이청(李淸 1936~ ), 이준의 아들 이우(李鍝 1911~1945), 이준 동생 이문용(李汶鎔 1882~1901), 흥친왕의 아들이자 흥선대원군의 적장손 이준(이준용 李埈鎔 1870~1917) 순이다. 이청과 이문용의 생몰연대는 새겨져 있지 않고, 이청·이우·이준은 각각 이청공·이우공·이준공으로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여사님 주장에 따르면 부동산업자들이 묘역을 훼손하고 납골당으로 만들어버렸다고 하는데, 사실관계를 입증할 필요가 있겠지. 이들의 묘표·묘갈·신도비 등의 묘비들은 현재 서울역사박물관 광장에 옮겨져 있다. 우측으로 기울어진 장명등을 지탱하기 위해 오른쪽 문인석 발치까지 지지목을 대어 놓은 모습이 안쓰럽다.
이 여사님이 알려준 대로 흥친왕묘 위쪽으로 조금 올라갔더니 한 켠이 무너진 곡장을 두른 무덤이 하나 나왔다. 그가 ‘꼭대기 할아버지’로 부른다는 이재선(李載先)의 묘소였다. 오마이갓! 실전된 것으로 알고 있던 완은군(完恩君)의 묘소를 발견하게 될 줄이야!
흥선대원군의 서장자이자 흥친왕과 고종의 이복형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계동 큰서방님’의 숨겨진 얘기를 흥미진진하게 들을 수 있었음은 크나큰 행운이었다.
세 묘역의 문인상을 사진으로 비교해 본다. 순서대로 흥선대원군묘(이하응), 흥친왕묘(이재면), 완은군묘(이재선)의 문인석이다. 역시나 표정이나 관복에 차이가 있다.
다시 길을 거슬러 빽빽한 수풀을 헤치면서 내려왔다. 지도에 ‘영선군 이준용묘와 신도비’로 나와있는 곳은 봉분도 신도비도 없이 잡초만 우거져 방치돼 있었다. 흥친왕 이재면의 아들이자, 흥선대원군 적장손의 무덤 모습이다. 조지훈 시인이 몰락한 왕조의 유물로 읊은 봉황수(鳳凰愁) 시구가 떠오르는 구슬픈 풍경이다.
탐방을 마치고 이준용묘 옆 오솔길을 따라 마을로 접어들었는데 재실(齋室)로 볼만한 집을 찾지 못했다. 폭포로17번길을 걸어나와 마석역으로 회귀했다.
석가탄신일인데도 공휴일 시간표가 아니라 평일 시간표대로 경춘선이 운행되어 헷갈렸다. 경춘선 객차에는 최소한의 매너나 공중도덕마저 개무시하는 쫄복 입은 자전거족이 그득했다. 객차 바닥에 쭈구려 앉는 것은 물론이고 ‘휠체어 이용고객 배려공간’이기에 “자전거를 거치할 수 없습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는 곳까지 지멋대로 자전거들을 기대어 놓았다. 지들 건강과 취미와 오락과 여흥을 위해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몰지각·몰상식·몰염치·몰싸가지·민폐 부류들을 정말이지 극혐한다.
근처 살면서 자주 산책하는 산책로인데도 지나치고 모르던 사실을 글을 읽고 배우고 갑니다.. 곡장이 무너진 무덤을 지나치며 이건 누구의 묘일까 궁금했었는데 새삼 역사를 돌아보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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