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6일 토요일

덕릉 역사문화트레킹

황사와 미세먼지 ‘매우 나쁨’이라는 예보가 있었지만 길을 나섰다. 오늘 트레킹은 4호선 당고개역에서 시작한다. 1번출구에서 직진하다가 왼편의 상계로37길·35길로 올라가면 태고종 천영사와 광덕사, 조계종 학림사로 갈 수 있지만 덕릉로 쪽으로 길을 잡았다.


상계3·4동 주민센터를 지나 덕릉로139길의 대진빌라 골목으로 올라갔다. 오래된 노후주택이 밀집한 지역이다. 슬레트 지붕 위로 길냥이가 어슬렁거린다. 담장과 외벽 곳곳에 금이 가고 빈집도 많아 보였다. 곳곳에 발파작업을 한다는 특정시간이 적힌 플래카드가 붙어 있는데, 아마도 진접으로 연결되는 4호선 연장구간 공사 때문인 듯하다.


작은 규모의 석가사는 그럴듯한 전각이 대웅전과 지장전만 보인다. 인근이 ‘동막골’로 불리는 동네일까. 주변에 한국불교, 세계불교 타이틀을 단 크고 작은 절집이 많다.


고물자전거가 쌓여있는 한영환경자원 앞으로 나왔다. 2016년에 개통된 덕릉터널을 통과하면 바로 별내동으로 진입한다. 버스가 다니는 왼편 고개길로 올라갔다.


구불구불 S자의 길을 올라가면 덕릉고개 정상에 10-5번, 85번 마을버스가 운행하는 덕능교장 버스정류소(23001)가 있다. 정류장 뒤편이 56사단 동원훈련장이다. 고개마루에서 철조망이 쳐진 긴 담벼락을 따라 10분쯤 내려가면 덕흥대원군묘(德興大院君墓) 푯말이 보인다.


묘비에 ‘덕흥대원군지묘, 하동부대부인정씨지묘’라 새겨져 있다. 이초(李岧)는 11대 중종과 창빈안씨 소생으로 9세에 덕흥군에 책봉되고 하동정씨와 혼인하여 3남 1녀를 두었으나 30세에 병을 얻어 졸하였다(1530~1559). 12대 인종과 13대 명종이 이복형들이다. 명종 사후 이초의 3남 하성군 이연(李昖)이 즉위하게 되니 이가 바로 14대 선조이다. 재신들의 반대로 생부인 이초를 왕으로 추존코자 한 선조의 시도는 실패하였지만, 1569년(선조2)에 최초의 대원군으로 추존되었다. 제헌왕후의 회릉이 회묘로, 공빈김씨의 성릉이 성묘로 격하된 것처럼 덕릉이란 이름도 덕묘가 맞는 표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왕릉에만 세울 수 있는 무인석이 서 있는 것으로 보아 묘역만이라도 능(陵)으로 조성하고 싶었던 선조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하단에는 2m 크기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신도비 아래쪽에 하원군이정묘역이 있다. 이정(李鋥)은 덕흥대원군의 장남이다. 묘비에 ‘현록대부하원군지묘, 남양군부인홍씨지묘’라 새겨져 있다. 이곳은 수락산 권역이고 묘역 아래 덕릉로 길 건너편은 불암산이다.




묘역에서 내려와 왼편의 흥국사로 향하는 덕릉로1071번길로 돌아 올라가면 덕흥대원군묘역의 재실인 덕릉재실(德陵齋室)이 나온다. 수락산방(水落山房)이나 덕흥사(德興祠)로도 불리는 곳으로 선조의 조모, 부모, 백형 내외의 불천지위(不遷之位) 6위를 모시는 묘당이다. 참고로 선조의 조모인 창빈안씨묘역은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경내에 있다.


재실 앞에 덕흥대원군의 글씨를 각자하여 세운 시비가 있다. 재실 뒤편 산비탈에 일단의 무덤군이 있어 사진을 박아보았다.


덕릉재실에서 길 건너편의 덕릉마을 산신각에 올라갔다. 1880년대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지금도 전통을 계승하여 매해 음력 1월과 10월에 산신제를 지낸다고 한다. 내부에 산신도가 그려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1칸 짜리 작은 산신각은 1998년에 정비한 것인데, 어이없게도 산신각 한글현판 글씨가 매직으로 대충 쓰여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산신각을 내려와 덕릉의 원찰인 흥국사를 보려고 조금 더 올라갔다. 그러나 쌈밥정식으로 알려진 목향원 등 음식점에 차 끌고 오는 인파로 북적대어 포기하고 내려왔다. 아주 일주문 기둥 초입에까지 차들을 세워놨더군… 교통체증을 가중시키는 이들 식당에는 상당한 정도의 교통유발부담금을 반드시 물려야 마땅하다.
하늘은 맑고 파래 보이는데 마스크를 쓰지 않아서인지 중국발 황사와 미세먼지로 눈 따끔 코 맹맹에 목 칼칼이다. 안경과 휴대폰 액정에도 흙먼지가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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