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2일 일요일

남한산성 씨순길

2014년 11월 1일(토) 오전 10시, 8호선 산성역 2번 출구 집결. 20m 이동하여 9-1번(또는 52번) 버스를 타고 산성 안 종점에서 하차. 총 25명의 참가자 중 몇분은 하나 옆 정거장인 ‘남한산성입구’역과 혼동하여 지각사태 발생.
참고로 9번 버스는 많이 돌아가므로 15분 정도 더 소요됨.
산성역 → (버스) → 남한산성행궁 → 숭렬전 → 수어장대 → 우익문(서문) → 마천역에 이르는 수월한 코스.



한강 남쪽 제일의 누각이란 의미의 남한산성행궁 정문인 한남루(漢南樓)에서 순성 출발했다. 기둥에 세로로 써 붙인 주련(柱聯)의 글귀를 통해 당시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기둥을 받치고 있는 4개의 초석도 눈길을 잡는다.


왕이 집무를 보던 외행전 옆에는 발굴된 통일신라시대의 건물지와 와적지가 보존돼 있다. 잘 다듬은 초석과 기단석이 사용된 건물은 벽 두께가 2m나 되고, 조선시대 것의 5배인 20㎏짜리 대형기와가 사용되었다. 대당전쟁을 위해 문무왕이 한산주(漢山州)에 쌓은 주장성(晝長城)이 남한산성의 토대로 추정된다고 한다.



한남루를 지나서 계단을 올라 외삼문과 중문을 거쳐야 본전에 이르니 삼문삼조(三門三朝)라는 조선 궁궐의 구성원칙이 적용됐음을 알 수 있다. 구조는 비슷하지만 왕의 거처(침전)인 내행전이 외행전보다 조금 더 넓다. 내행전(밤)과 외행전(낮)을 오가는 고립 47일 동안 능양군(綾陽君) 이종(李倧)은 군왕으로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나. 명국과 청국 사이에 정세오판으로 자초한 병자호란… 슈퍼파워 미국과 굴기(崛起) 중국 사이에 국운을 건 현명한 대처가 필요한 오늘날의 대한민국 상황에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남한산성 행궁은 20곳에 달하는 조선 행궁(왕의 임시거처) 중 종묘(좌전)와 사직(우실)을 거느린 유일한 행궁이다. 유사 시 임시수도 역할을 수행했던 곳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현재는 사직을 모신 우실(右室)은 없고, 종묘에 해당하는 좌전(左殿)만 남아 있다. 2천원의 입장료 때문인지 산성길에 비해 행궁을 둘러보는 탐방객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한번은 인조의 꿈에 온조왕이 나타나 청군의 침입을 알려주어 한때나마 그 선발대를 물리칠 수 있었기에 인조 16년(1638)에 사당(온조왕사)을 짓고 백제 시조인 온조대왕을 모셨다. 뒷날 이번에는 정조의 꿈에 온조왕이 나타나 정조의 인품과 성업을 칭찬하면서 혼자 있기가 쓸쓸하니 죽은 사람 중에서 명망있는 신하를 같이 있게 해달라고 청하기에… 정조 19년(1795)에 남한산성 축성 당시 총책임자로서 병자호란 때 전사한 총융사 이서(李曙) 장군의 위패를 함께 배향하면서 숭렬전(崇烈殿)이라 사액했다.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2014년 6월에는 숭렬전에서 우리나라 11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인증서 봉헌 행사가 거행되었다.



장대(將臺)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 5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은 장대가 수어장대다. 성 안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축성 때 단층으로 지어 서장대(서쪽에 있는 장대)라 부르던 것을 영조 27년(1751) 광주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2층으로 다시 짓고 수어장대(守禦將臺)라는 현판을 달았다. 수어장대 2층 내부에는 무망루(無忘樓)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볼모로 심양(沈陽)에 잡혀갔다가 귀국하여 청국에 대한 복수심으로 북벌을 꾀하다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후세에 전하고 그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이다. 영조와 정조는 효종의 능소인 여주 영릉에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 장대에 들러 하룻밤을 지내면서 병자호란 때의 치욕사를 되새겼다고 전한다. 현재 무망루 편액은 수어장대 오른편에 보호각을 지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보관하고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 투성이인 요즘인지라 새삼 새로운 ‘무망’이다.


김훈의 장편소설 「남한산성」에서는 수어청(守禦廳)의 장군으로 수어사 이시백(李時白)이 등장한다. 병자호란의 국치에 대한 반감으로 창작된 「박씨부인전」에서는 피화당주(避禍堂主) 朴氏의 배필로 한자가 다른 이시백(李始白)이 조연으로 나온다.
수어장대에서 서문(右翼門)으로 내려가는 순성길가에는 “공원에서는 노점 상행위를 할 수 없다”는 펼침막 옆에서 버젓이 막걸리와 이런저런 주전부리 등 주효(酒肴)를 차려놓고 장사를 하는 노점상이 곳곳에 산재했으나 단속 공무원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시민성이라는 개념은 요원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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