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에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의 ‘북촌한옥마을 춘곡 고희동 가옥 답사’에 동참했다.
한국 가톨릭 순교시절에 북촌 지역을 관할하던 가회동성당 4층 옥상에 올라 바라본 가회동 31번지 북촌 한옥마을의 모습이다.
진단학회 터(震檀學會地)
계동 98번지 언저리는 1934년 5월 7일 일제의 문화통치에 대항하여 민족문화를 수호, 발전코자 설립한 진단학회 사무소가 1936년 초 성북동으로 옮겨갈 때까지 있던 자리이다. ‘옛것(古)을 즐긴다(樂)’는 뜻의 락고재(樂古齋)라는 옥호를 지닌 이 터의 주인은 원래 친일사학자 이병도(李丙燾)였다고 하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한옥 부티크 호텔(Hanok Boutique Hotel)로 재탄생해 운영되고 있다.
유심사 터(惟心社地)
계동 43번지는 일제강점기부터 보존된 한국 전통 가옥으로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겸 문인인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이 거처하면서 불교 월간잡지 「유심(惟心)」을 발행하던 출판사가 있던 곳이다. 천도교계 최린의 물밑작업으로 기독교계 이승훈과 불교계 한용운이 합심하여 3·1운동의 준비작업이 긴박하게 돌아가던 유서깊은 곳인데… 둘러보기 전에는 바보같이 사찰(惟心寺)이 있던 장소로 오인하고 있었다.
그날의 함성과 안간힘은 온데간데 없고 지금은 ‘만해당(萬海堂)’이란 이름의 게스트하우스가 들어서있다.
석정보름우물
20세기 초 서울에 상수도시설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 우물은 주된 음수(飮水), 생활용수 공급원이었으며 계동길 110번지 석정보름우물도 북촌 주민들의 중요한 음수원이었다. 석정(石井)은 물맛이 좋기로 소문난 명천(名泉)이었으며, 이 우물물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 인근 궁궐 궁녀들도 몰래 떠다 마시며 성은을 입어 아이 낳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정조 8년에 갑자기 우물물이 요동치며 흘러넘치는 변고가 일어나기에 조사한 결과, 병조판서 댁 서자를 사모하던 망나니의 딸이 상사병을 앓다 결국 그를 죽여 우물에 유기하고 자신도 뒤따라 투신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원혼제를 올려주자 범람은 멈추었으나, 이후 15일 동안은 맑고 15일 동안은 흐려지곤 해서 보름우물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보름우물은 초창기 천주교 역사와도 관련이 깊다. 1794년 중국에서 압록강을 건너 온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사제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새남터에서 순교하기 전까지 계동 최인길(마티아) 집에 숨어 지내면서 조선땅 첫 미사를 봉헌하였고, 이 우물물로 세례를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1845년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도 북촌 지역에서의 짧은 사목기간동안 이 물을 성수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컨대 보름우물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성수이자 포교의 원천(源泉)이었던 것이다. 천주교 박해당시 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하자 보름우물 샘물이 핏빛을 띠면서 물맛이 써져서 한동안 사람들이 먹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석정보름우물은 1987년에 한 차례 복원됐으나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돌로 채워진 우물을 2013년에 다시 복원하고 안내판과 안전을 위한 투명 덮개를 함께 설치했다.
원서동 고희동 가옥(苑西洞 高羲東 家屋)
춘곡(春谷) 고희동(1885~1965) 선생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1918년에 직접 설계해서 지은 한옥으로, 41년간 거주하던 곳이다(등록문화재 제84호). 고희동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서, 새로운 조형 방법을 후진에게 가르친 미술 교육자이며 화단을 형성하고 이끌어나간 미술 행정가이자 미술 운동가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생활공간 외에 지필묵과 물감, 이젤이 있는 화실을 따로 두었으며 안채와 사랑채를 잇는 복도를 만들고 추위를 막기 위해 유리창을 달았다. 정면 7칸, 측면 2칸 반의 일자형 안채가 동향을 하고 있고, ㄷ자형 사랑채가 안채를 감싸고 있어 전체적으로 ㅁ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다. 이 집은 1918년 서양과 일본 집의 장점을 한옥에 적용한 근대 초기 한국 주택의 변화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김수정씨의 인기만화 아기공룡 둘리에 쌍문동 고길동씨의 조카로 ‘희동이’라는 아기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우습게도 처음엔 그 생각부터 났다.
북촌 투어를 위해 수고해주신 박병호 서울시 문화해설사와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봉사자 분들께 감사말씀 전한다.
한국 가톨릭 순교시절에 북촌 지역을 관할하던 가회동성당 4층 옥상에 올라 바라본 가회동 31번지 북촌 한옥마을의 모습이다.
진단학회 터(震檀學會地)
계동 98번지 언저리는 1934년 5월 7일 일제의 문화통치에 대항하여 민족문화를 수호, 발전코자 설립한 진단학회 사무소가 1936년 초 성북동으로 옮겨갈 때까지 있던 자리이다. ‘옛것(古)을 즐긴다(樂)’는 뜻의 락고재(樂古齋)라는 옥호를 지닌 이 터의 주인은 원래 친일사학자 이병도(李丙燾)였다고 하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한옥 부티크 호텔(Hanok Boutique Hotel)로 재탄생해 운영되고 있다.
유심사 터(惟心社地)
계동 43번지는 일제강점기부터 보존된 한국 전통 가옥으로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겸 문인인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이 거처하면서 불교 월간잡지 「유심(惟心)」을 발행하던 출판사가 있던 곳이다. 천도교계 최린의 물밑작업으로 기독교계 이승훈과 불교계 한용운이 합심하여 3·1운동의 준비작업이 긴박하게 돌아가던 유서깊은 곳인데… 둘러보기 전에는 바보같이 사찰(惟心寺)이 있던 장소로 오인하고 있었다.
그날의 함성과 안간힘은 온데간데 없고 지금은 ‘만해당(萬海堂)’이란 이름의 게스트하우스가 들어서있다.
석정보름우물
20세기 초 서울에 상수도시설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 우물은 주된 음수(飮水), 생활용수 공급원이었으며 계동길 110번지 석정보름우물도 북촌 주민들의 중요한 음수원이었다. 석정(石井)은 물맛이 좋기로 소문난 명천(名泉)이었으며, 이 우물물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 인근 궁궐 궁녀들도 몰래 떠다 마시며 성은을 입어 아이 낳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정조 8년에 갑자기 우물물이 요동치며 흘러넘치는 변고가 일어나기에 조사한 결과, 병조판서 댁 서자를 사모하던 망나니의 딸이 상사병을 앓다 결국 그를 죽여 우물에 유기하고 자신도 뒤따라 투신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원혼제를 올려주자 범람은 멈추었으나, 이후 15일 동안은 맑고 15일 동안은 흐려지곤 해서 보름우물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보름우물은 초창기 천주교 역사와도 관련이 깊다. 1794년 중국에서 압록강을 건너 온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사제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새남터에서 순교하기 전까지 계동 최인길(마티아) 집에 숨어 지내면서 조선땅 첫 미사를 봉헌하였고, 이 우물물로 세례를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1845년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도 북촌 지역에서의 짧은 사목기간동안 이 물을 성수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컨대 보름우물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성수이자 포교의 원천(源泉)이었던 것이다. 천주교 박해당시 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하자 보름우물 샘물이 핏빛을 띠면서 물맛이 써져서 한동안 사람들이 먹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석정보름우물은 1987년에 한 차례 복원됐으나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돌로 채워진 우물을 2013년에 다시 복원하고 안내판과 안전을 위한 투명 덮개를 함께 설치했다.
원서동 고희동 가옥(苑西洞 高羲東 家屋)
춘곡(春谷) 고희동(1885~1965) 선생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1918년에 직접 설계해서 지은 한옥으로, 41년간 거주하던 곳이다(등록문화재 제84호). 고희동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서, 새로운 조형 방법을 후진에게 가르친 미술 교육자이며 화단을 형성하고 이끌어나간 미술 행정가이자 미술 운동가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생활공간 외에 지필묵과 물감, 이젤이 있는 화실을 따로 두었으며 안채와 사랑채를 잇는 복도를 만들고 추위를 막기 위해 유리창을 달았다. 정면 7칸, 측면 2칸 반의 일자형 안채가 동향을 하고 있고, ㄷ자형 사랑채가 안채를 감싸고 있어 전체적으로 ㅁ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다. 이 집은 1918년 서양과 일본 집의 장점을 한옥에 적용한 근대 초기 한국 주택의 변화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김수정씨의 인기만화 아기공룡 둘리에 쌍문동 고길동씨의 조카로 ‘희동이’라는 아기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우습게도 처음엔 그 생각부터 났다.
북촌 투어를 위해 수고해주신 박병호 서울시 문화해설사와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봉사자 분들께 감사말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