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점에 가면 주창과 관평을 좌우에 거느리고 위엄을 뽐내는 관우 그림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 중 하나가 충과 의리의 대명사 운장(雲長) 관우(關羽)가 아닐까 싶다.
관우(162~219)가 손권에게 참수당한 직후 여몽을 비롯해 여러 장수가 급사하고 홍수나 나고 전염병이 창궐한 이유가 관우 귀신의 탓이라고 믿은 형주 사람들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면서 역신(疫神)으로서의 관우 숭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문성(文聖) 공자의 무덤은 산동성에 있는 공림(孔林)이고, 무성(武聖) 관우의 무덤은 낙양(수급)과 당양(시신)이며 관림(關林)이라 부른다.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문묘(文廟)처럼 관우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무묘(武廟)라 한다.
조조에 의해 수정후(侯)에 봉해진 이후 금나라의 위세에 눌린 남송대에 이르러서는 충혜공(公)을 거쳐 무안왕(王)으로 승격되면서 군신(軍神)의 위상을 갖게 된다. 임란 이후 후금과 대적하는 명나라 신종이 성제군으로 봉하면서 관제(帝)가 된다.
한족에게 관우는 남송의 악비(岳飛)와 같은 존재였지만, 달가울리 없는 청조 대에는 재신(財神)으로 변신하게 된다. 사실 촉(蜀)과 형주(荊州, 징저우)의 두 지역에서 출격하여 협공작전을 펴는 것이 제갈공명의 원래 계획이었지만, 관우의 실수로 형주를 잃고 촉의 발전동력은 꺽이기 시작한다.
1598년(선조31), 조선에 출병한 명나라 유격장군 진인이 왜군 격퇴의 염원으로 남산 기슭에 관왕묘(남관왕묘)를 세웠고, 이듬해 선조가 동대문 밖에 새 관왕묘(동관왕묘)를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동묘(보물 142호)이다. 중국풍 건물과 문, 소상 그리고 백목전 상인들이 헌납한 석물들이 들어차 있다.
동관왕묘(보물 제142호)의 중심건물은 2개의 건물이 앞두로 붙어 있는데, 이것은 중국의 절이나 사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라고 한다.
지붕은 높은 丁자 모양과 一자 모양이 합쳐진 工자 모양이다. 실내 공간도 앞뒤로 나뉘어 있는데, 앞은 제례를 위한 전실이고 뒤는 관우와 부하장군들의 조각상을 둔 본실이다.
전실과 본실을 감싼 벽돌 벽의 바깥에는 다시 기둥을 두어 처마를 받치고 있다.
정전 앞에 顯靈昭德義烈武安聖帝廟(현령소덕의열무안관제)라 쓰인 현판이 둘이나 되는 이유가 궁금하다. 정전에는 영조가 내린 현령소덕무안왕묘(顯靈昭德武安王廟)라는 편액이 걸려있고, 좌우에 천추의기(千秋義氣) 만고충심(萬古忠心)이라 쓰인 편액도 보인다.
정전 가운데에 보이는 관우의 목상에 처음으로 금색 용포를 입힌 이는 후한 광무제의 후계자를 자처한 고종이었는데, 관우의 힘을 빌어 일제를 떨쳐내고자 하는 심정이었는도 모른다.
어쨌거나 관왕을 추앙하는 일은 고종에 이르러 정점에 이르는데, 무당들에게 인기있는 몸주는 관우 말고도 최영·남이 같은 분들이 있다. 현재 동묘 주변은 서울 안 최대의 헌옷시장이 서는데다 정문 보수공사로 상당히 어수선한 분위기다.
모화사상이니 우상숭배니 하는 것보다는 그저 왜적을 상대하던 군신(軍神) 관왕으로 생각하면 편하겠다.
관우(162~219)가 손권에게 참수당한 직후 여몽을 비롯해 여러 장수가 급사하고 홍수나 나고 전염병이 창궐한 이유가 관우 귀신의 탓이라고 믿은 형주 사람들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면서 역신(疫神)으로서의 관우 숭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문성(文聖) 공자의 무덤은 산동성에 있는 공림(孔林)이고, 무성(武聖) 관우의 무덤은 낙양(수급)과 당양(시신)이며 관림(關林)이라 부른다.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문묘(文廟)처럼 관우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무묘(武廟)라 한다.
조조에 의해 수정후(侯)에 봉해진 이후 금나라의 위세에 눌린 남송대에 이르러서는 충혜공(公)을 거쳐 무안왕(王)으로 승격되면서 군신(軍神)의 위상을 갖게 된다. 임란 이후 후금과 대적하는 명나라 신종이 성제군으로 봉하면서 관제(帝)가 된다.
한족에게 관우는 남송의 악비(岳飛)와 같은 존재였지만, 달가울리 없는 청조 대에는 재신(財神)으로 변신하게 된다. 사실 촉(蜀)과 형주(荊州, 징저우)의 두 지역에서 출격하여 협공작전을 펴는 것이 제갈공명의 원래 계획이었지만, 관우의 실수로 형주를 잃고 촉의 발전동력은 꺽이기 시작한다.
1598년(선조31), 조선에 출병한 명나라 유격장군 진인이 왜군 격퇴의 염원으로 남산 기슭에 관왕묘(남관왕묘)를 세웠고, 이듬해 선조가 동대문 밖에 새 관왕묘(동관왕묘)를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동묘(보물 142호)이다. 중국풍 건물과 문, 소상 그리고 백목전 상인들이 헌납한 석물들이 들어차 있다.
동관왕묘(보물 제142호)의 중심건물은 2개의 건물이 앞두로 붙어 있는데, 이것은 중국의 절이나 사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라고 한다.
지붕은 높은 丁자 모양과 一자 모양이 합쳐진 工자 모양이다. 실내 공간도 앞뒤로 나뉘어 있는데, 앞은 제례를 위한 전실이고 뒤는 관우와 부하장군들의 조각상을 둔 본실이다.
전실과 본실을 감싼 벽돌 벽의 바깥에는 다시 기둥을 두어 처마를 받치고 있다.
정전 앞에 顯靈昭德義烈武安聖帝廟(현령소덕의열무안관제)라 쓰인 현판이 둘이나 되는 이유가 궁금하다. 정전에는 영조가 내린 현령소덕무안왕묘(顯靈昭德武安王廟)라는 편액이 걸려있고, 좌우에 천추의기(千秋義氣) 만고충심(萬古忠心)이라 쓰인 편액도 보인다.
정전 가운데에 보이는 관우의 목상에 처음으로 금색 용포를 입힌 이는 후한 광무제의 후계자를 자처한 고종이었는데, 관우의 힘을 빌어 일제를 떨쳐내고자 하는 심정이었는도 모른다.
어쨌거나 관왕을 추앙하는 일은 고종에 이르러 정점에 이르는데, 무당들에게 인기있는 몸주는 관우 말고도 최영·남이 같은 분들이 있다. 현재 동묘 주변은 서울 안 최대의 헌옷시장이 서는데다 정문 보수공사로 상당히 어수선한 분위기다.
모화사상이니 우상숭배니 하는 것보다는 그저 왜적을 상대하던 군신(軍神) 관왕으로 생각하면 편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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