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30일 토요일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 그 여자 이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리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려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곱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고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이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은 오소리 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속처럼 어두운 토방에 팔 괴고 누워
나 부연 들창 틈서리 푸설거리는 마른 눈이나 내려다보겠네
쓴 담배나 뻑뻑 빨면서 또 한세월 보내겠네
그 여자 허리 굵어지고 울음조차 잦아들고
눈에는 파랗게 불이 올 때쯤
나 덜컥 몹쓸 병 들어 시렁 밑에 자리 보겠네
말리는 술도 숨겨놓고 질기게 마시겠네
몇해고 애를 먹어 여자 머리 반 쯤 셀 때
마침내 나 먼저 숨을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도 배우리 욕도 배우리


이만하면 제법 속절없는 사랑 하나 안되겠는가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김사인 시집《가만히 좋아하는》(창비 2006) 에서 옮겨봤다.

마치 강경애의 소설이나, 백석의 시를 대하는 듯 비애가 넘쳐난다.
이쯤되면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어불성설이 되고 만다.

사랑하는 여자를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둠벙에 빠쳐놓는 이 남자..
설사 그것이 자의가 아닐지라도
술과 도박과 여자에 탐닉하여 나태와 무능으로 인생을 탕진하는 이 남자..
사랑이라는 얽매임으로 피할 수 없이 더욱 쪼그라드는 이 여자..
황야는 남정네의 가슴에만 머문 게 아니라 여인의 가슴에도 옮겨앉았다.
어둠은 깊고, 바람은 차가와 삶이 매몰되는 황막하고 쓸쓸한 불모의 시간.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으련만..
피하려 하면 피해지는 것인가.
스스로의 업값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남자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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