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4일 일요일

내포 해미읍성과 해미성지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내포(內浦)는 당진·서산·홍성·예산 일대를 일컫는 충청도 서북부의 지역명으로 삽교천·무한천·석우천 유역의 지방 생활권을 총칭하는 충적지의 이름이다.
고려말에 해안지역을 침략해온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나중에 ‘읍성’이라 불리는) 석성을 축조하기 시작했는데, 1407년(태종7)에 정해(貞海)와 여미(餘美)의 두 현을 합하여 해미(海美)라는 새로운 현이 만들어진 이후 1421년(세종3) 무렵에 해미읍성(사적 제116호)이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기엔 한때 충청병마절도사의 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영(營) 취락의 입지가 방어에 유리한 곳으로 기능하였다. 이순신 장군도 35세 때인 1579년(선조12) 충청병사의 군관으로 부임해 전라도로 전임될 때까지 10개월간 근무한 역사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고창읍성(사적 제145호), 순천 낙안읍성(사적 제302호)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읍성으로 꼽힌다. 해미읍성은 5m의 높이의 성곽이 남북으로 긴 타원형을 이루며 1.8㎞를 둘러 6만 여평의 면적을 만든다.
내포 지역은 초대교회가 창설된 이후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루도비코)에 의해 교세가 크게 확장된 것에 비례하여 신유(1801)·기해(1839)·병오(1846)·병인(1866) 4대 박해를 모두 치를만큼 혹독한 수난을 겪은 순교의 땅이기도 하다. 실제로 충남지역에는 수원교구(14개소), 전주교구(11개소), 서울대교구(10개소), 부산교구(8개소) 등 타교구에 비해 가장 많은 18개소의 성지가 위치해 있다.


해미읍성의 정문인 진남문(海美邑城 鎭南門) 안쪽에 황명홍치사년신해조(凰明弘治四年辛亥造)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성곽 바깥에는 적들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치성(雉城)이 돌출되어 있다.


박해 당시 내포의 천주쟁이들은 인근 13개 군현을 관할하던 정3품 겸영장(兼營將)이 정주하던 해미읍성으로 끌려와 수감되어 고문당한 후 처형되었다.
그네줄을 매고 그네뛰기 딱 좋은 것을… ‘호야나무’로 불리는 읍성 한가운데의 회화나무 가지에는 철사를 매달아 신자들의 머리채를 묶었던 자국이 지금도 남아 있다.
사형수가 많아 처형하기 힘들게 되자 서문 밖 해미천에 큰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했다고 한다. 구제역이나 조류독감이 창궐할 때면 살처분이라고 해서 돼지와 닭을 생매장하는 지금의 행태와 다름이 없었다.


동헌으로 들어가는 문에는 호서좌영(湖西左營)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객사(客舍) 너머로 내아(內衙)의 지붕이 보인다.


당시 순교자들은 해미읍성의 서문을 ‘천국으로 가는 문’으로 여겼다고 한다. 처형장으로 끌려가던 신자들이 쉼없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기도했는데 그 소리를 ‘예수머리’로 알아들은 사람들이 ‘여숫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진둠벙’으로 불리는 연못에 수장된 신자들도 많았다. ‘죄인’이 축약된 ‘진’과 웅덩이의 전라·충청 방언인 ‘둠벙’이 합쳐진 말이다. 이곳에서 처형된 무명의 순교자들은 병인박해 때만 1천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런 참혹한 역사 때문에 2014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종도 해미읍성을 방문하여 미사를 봉헌한 바 있다.



해미순교탑 앞으로 ‘무명 생매장 순교자들의 묘’가 있다. 병인박해 때 해미 생매장 순교 현장을 목격했던 이주필·임인필·박승익 등의 증언에 따라 1935년 서산성당 범 베드로 신부가 생매장지 일부를 발굴하여 순교자들의 유해 및 묵주·십자가를 수습하고 4월 2일 서산군 음암면 상흥리 공소 뒷산 백씨 문중 묘역에 안장하였다. 1995년 9월 20일 순교자 대축일에 이를 다시 해미성지로 이장하여 본래의 순교터(현 순교자 기념탑 앞)에 모셨다. 상흥리 순교자 묘소 자리에는 십자고상과 진토가 된 순교자 유해 일부를 모셔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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