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두 번째 역사문화트레킹은 삼성동을 돌아보는 코스로 대치동에서 출발했다.
선릉역 1번출구 앞 대치빌딩 17·18·19층에는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입주해 박ㄹ혜-최순실 국정농단을 수사했다. 황교활이 연장승인을 거부하면서 2017년 2월 28일 특검 활동이 종료되었지만 어쩌면 더 중요하게 된 공소유지 등이 계속되고 있다. 2016년 11월 30일 특검이 임명되고, 공식수사 69일 동안 최순실·김종·안종범·문형표·조여옥·류철균·남궁곤·김종덕·정호성·차은택·이재용·박상진·김경숙·김기춘·조윤선·김영재·최경희·이인성·유재경·박채윤·우병우·이영선 등을 줄줄히 소환하고 상당수를 구속시켰다. 윤석열 수사팀장과 이규철 특검보 등 모든 특검팀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관련보도1: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735035
삼성동에 위치한 사적 제199호 선정릉(宣靖陵)은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한꺼번에 부르는 합성어다. 3개의 능이 있다고 해서 삼릉공원으로 불리는데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1960년대 이후 강남이 개발되면서 금천교와 연못이 없어지고 능역이 훼손·축소되었다.
조선의 18단계 품계 중 가장 낮은 종9품 관직명 중의 하나가 참봉인데, 재실(齋室)에 머물면서 선대왕의 능을 모시는 것이 능참봉이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박석(薄石)이 깔린 참도(參道)는 죽은 왕이 이용하는 왼쪽의 신도(神道)와 살아있는 왕이 이용하는 오른쪽의 어도(御道)로 나뉜다. 참도가 끝나는 지점에 정자각(丁字閣)이 앉아 있고 그 뒤편으로 능침이 올라가 있다.
선릉은 성종과 성종비의 무덤이 하나의 정자각 뒤로 각기 다른 언덕에 배치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다. 세조의 광릉(光陵)이나 선조의 목릉(穆陵)도 같은 형태이다. 원래는 성종의 숙조부가 되는 광평대군(세종의 5남)의 묏자리였으나, 지금의 일원동으로 광평대군의 묘를 옮기고 자리잡은 것이다.
잘산대군 이혈(李娎)은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의 차남이다. 권신 한명회와 조모 정희왕후의 정치적 후원으로 친형인 월산대군을 제치고 13세에 9대 왕으로 즉위하여 25년간 통치하고 38세에 승하했다.
첫 번째 왕비인 한명회의 막내딸 공혜왕후 한씨는 18세에 요절했는데(1474) 능호는 파주의 순릉(順陵)이다. 이후 숙의에서 새 왕비로 책봉된(1476) 이가 연산군의 생모인 제헌왕후 윤씨이다. 역사에 따르면 투기가 심해 후궁 문제로 갈등을 빚다가 용안에 손톱자국을 낸 일로 폐서인된 후 사약을 받아 죽었다고 한다(1479). 이어 세 번째 왕비로 책봉된(1480) 이가 중종의 모친인 정현왕후 윤씨이다.
경국대전을 마무리하고 여지승람·동국통감·동문선·악학궤범 등을 편찬하면서 조선의 문물을 완성하였기에 이룰 성(成) 자로 묘호를 썼을 터인데… 조선 최대 섹스 스캔들의 히로인 어우동과의 연관설 등 여성 편력이 만만치 않다.
성종의 능에서 내려와 오른쪽으로 숲길을 걸으면 정현왕후(자순대비)의 능이다. 남편의 능과는 달리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두르고 있다. 2m가 훌쩍 넘는 문인석과 무인석 역시 우직함보다는 보다 더 섬세하다는 느낌을 준다.
진성대군 이역(李懌)은 성종의 차남으로 1506년 이복형인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11대 왕으로 추대되어 38년간 통치하였다.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영입하여 조광조를 중용하고 개혁정치를 펼쳤으나 기묘사화로 귀결되기도 했다.
진성대군의 장인 신수근은 자신의 매부 연산군을 생각하여 중종반정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사사당했는데, 그로 인해 자신의 딸 단경왕후는 입궁 7일 만에 폐위되었다. 고모와 조카딸 관계인 연산군의 배위와 중종의 첫 번째 왕비가 모두 거창신씨로 가문의 몰락을 애통히 지켜봐야 했다.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의 히로인 단경왕후 신씨의 능호는 장흥면 일영의 온릉(溫陵)이다.
두 번째 왕비는 장경왕후 윤씨로 윤임(尹任)을 영수로 하는 대윤파 라인이다. 훗날의 인종을 출산하고 산후병으로 돌아갔다(1515). 세 번째 왕비는 명종의 생모인 문정왕후 윤씨로 윤원형(尹元衡)이 실세인 소윤파 라인이다.
중종은 승하 후 고양군 원당에 있는 1계비 장경왕후의 희릉(禧陵)에 동원이강릉으로 안장됐다. 명종의 모후로 수렴첨정을 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2계비 문정왕후 윤씨는 죽은 후 남편과 함께 묻히고 싶었다. 그래서 봉은사 주지 보우대사와 의논한 후 풍수적으로 볼때 장마에 물이 차오르는 형국이라는 이유를 들어 중종의 능을 선릉 근처로 이장하여 우선 단릉으로 만들어 놓았다(1562).
하지만 새로 이장해 조성한 정릉은 지대가 낮아 장마철 홍수에 재실과 정자각이 침수되는 등 길지가 아니었다. 결국 정릉 천장(遷葬)의 구실이 됐던 풍수 때문에 문정왕후는 사후 태릉(泰陵)에 쓸쓸히 단릉으로 묻혔다. 덕분에 중종 역시 3명의 왕비 누구와도 함께 하지 못하고 단릉으로 홀로 잠들게 되었다.
공공연한 비밀 한 가지… 선정릉 3개 능은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능침을 파헤치고 재궁(왕과 왕비의 관)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기에 시신 없이 비어 있다. 1593년 4월 경기좌도 관찰사 성영(成泳)의 보고서를 보면 그때 이미 선릉의 광중(壙中)은 비어 있었고, 정릉 광중에서 시신이 하나 발견되었다고 한다. 후에 중종의 옥체가 맞는지 종친과 원로대신, 내시와 궁녀들을 동원하여 확인했으나 중종이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나서 의대(衣襨)만 묻게 되었다. 선릉 역시 부장품으로 넣었던 옷을 태워 안장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개간이 불가한 왕릉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총독부가 식량증산이라는 명목으로 능과 능 사이 구릉지대의 개간을 허가하여 능역 안에 농지가 존재하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 때에도 능역 외곽을 잘라 민간에 파는 등 선정릉의 수난은 계속되었다. 이나마도 보존되어 있는 것이 다행이랄까. 석촌호수와 비슷한 198,813㎡ 면적의 선정릉에는 하루 평균 1500명 정도가 관람한다.
한국문화재재단은 충무로의 전통문화 공간인 ‘한국의 집’에 프랑스 요리학교와 식당을 설립한다는 업무협약을 최순실이 주도한 미르재단과 2016년 7월에 맺은 바 있다. 한식의 세계화에도 미르재단의 검은 마수가 뻗쳤던 것일까. 아이들이 공부하는 사회책에 이른바 ‘문화 융합’ 사례로 화려하게 등장하고 싶었던 것일까.
한국과학창의재단은 과학문화 확산을 위해 만든 미래창조과학부 산하기구이다. 그러나 박ㄹ혜 정권이 들어서면서 창조경제의 홍위병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쏟아지기도 했다.
최순실 조카의 처남인 김모 씨를 채용하여 구설수에 오른 적도 있다. 또한 정유라 특혜 의혹의 핵심 당사자로 수감 중인 이화여대 김경숙 신산업융합대학장의 남편이자 육학 전공자인 김천제 건국대 축산식품공학과 교수가 2016년 10월 창의재단 이사장 공모에 지원했다가 낙하산 논란이 일자 철회한 바 있다.
관련보도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9211105001&code=94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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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edaily.com/NewsView/1L45AC2DFK
관련보도4: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6102150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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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85271.html
한국문화재재단에서 분당선 선정릉역 대각선 방향 1번출구 뒤편은 논현동 봉은사로49길이다. 이 길 안쪽의 강남족발 맞은편에는 카페 테스타로사(테사) 1호점이 있었다. 최순실은 K스포츠재단이 전국 220곳에 건립하려 했던 K스포츠클럽에 자신의 카페를 입점시켜 식음료 사업으로 수익을 챙기려 했다. 창고가 있는 지하공간과 일반영업을 위한 1층·2층, 비밀아지트인 옥탑방으로 구성돼 있다. 정호성·안종범, 고영태·차은택 등이 수시로 들락거리며 회의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권 실세와 대기업 인사들도 자주 왔었다고 한다.
보증금 1억에 월세 700만원… 본격적으로 국정농단 사건이 불거지기 전에 이미 매물로 내놓았다고 한다. 내부에 들어가보지는 못했다. 지금은 광고회사가 인수했다고 하는데 빨간색이었던 천막이 검은색으로 바뀌어 있다.
베트남은 세계 2위의 커피생산국이고 인접한 미얀마에서도 커피를 생산한다. 최순실은 미얀마에서 커피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유재경을 미얀마 대사에 앉혔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이태리어로 ‘빨간 머리’를 의미하는 테스타로싸(Testa Rossa)는 페라리(Ferrari)의 빨간색 명차 이름이기도 하다. 뒷발을 디디고 뛰어오르는 말 문양의 페라리 엠블럼에서 승마를 하는 정유라를 연결시켜 카페 브랜드로 런칭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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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joins.com/article/21075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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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1.kr/articles/?2830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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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2/02/2017020200119.html
지난 3월 20일 설립허가가 취소된 논현동 K스포츠재단에는 들르지 않고 바로 돌아나와 횡단보도를 건너서 호산프라자 왼편의 선릉로112길로 들어섰다. 박ㄹ혜의 삼성동 42-6 자택은 지하 1층, 지상 2층의 단독주택으로 484.8㎡(146평), 건물은 317.35㎡(96평) 규모이다.
특검 수사에 따르면 비선실세 최순실의 모친인 임선이가 1990년에 10억 5000만원에 매매계약을 주도하고 구매했다고 한다. 높은 담장과 나무 등으로 가려져 있는데, 내부를 촬영하려는 보도진의 취재 열기로 인근 건물은 때아닌 깔세 특수가 일기도 했다. 바로 옆 아파트의 이름이 삼성롯데캐슬킹덤아파트이다. 삼성과 롯데… 하필이면 뇌물수수 의혹과 관련한 오묘한 이름이다.
헌재의 탄핵 선고 이후 청와대에서 퇴거하면서 박ㄹ혜는 유기 논란을 빚으면서 취임시 삼성동 주민이 선물한 진돗개를 두고 나왔다. 퍼스트도그(first dog)의 원래 이름은 ‘민주'와 ‘통일'이었는데 청와대로 가면서 ‘새롬'이와 ‘희망’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김막업 요리연구가를 데리고 나왔고, 전담 미용사 정송주·정매주 자매는 거의 매일 아침마다 택시를 타고 방문했다. 최순실의 소개로 청와대에 입성한 윤전추 행정관과 이영선 경호관이 파면된 대통령을 보좌해 논란이 있었다. 14개의 주요 신문을 구독했지만 중앙일보와 일간스포츠는 제외되었다. 장시호는 법정에서 이모 최순실이 2층 방에 돈이 있으니 그 돈으로 손자(정유라 아들)를 키우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관련보도9: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3/06/2017030600152.html
관련보도10:
http://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791830.html
관련보도11:
http://www.nocutnews.co.kr/news/4775537
박ㄹ혜의 삼성2동 자택은 한때 지지자들의 성역으로 북적였다. 일부 개신교 신자들의 통성기도로 시끄러웠고, 건물을 향해 절을 하기도 했다. 구호와 군가가 난무했다. 고성을 지르며 알몸 시위를 벌인 40대 남성이 체포된 일도 있었다. 추종자들이 붙여놓은 태극기·꽃·사진·메모지 등으로 담벼락이 빼곡히 채워지기도 했다.
지난 4월에 홍성열 마리오아울렛 회장이 이 집을 67억5000만원에 매입했다. 그리고선 5월 6일 박ㄹ혜의 이사짐이 서초구 내곡동으로 옮겨졌다.
5월 9일 치러진 19대 대선 투표집계 결과 강남구 22개 동 가운데 문재인이 홍준표를 앞서지 못한 6개동은 압구정동·신사동·청담동·삼성1동·도곡2동·도곡3동 등 6곳이었다.
관련보도12: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7/03/20/20170320002998.html
관련보도13:
http://www.segye.com/newsView/20170320002820
관련보도14: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7042110591202468
관련보도15: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70511014006
삼성동성당 뒤편 봉은사로 대로변에는 최순실의 언니인 최순득 소유의 승유빌딩(삼성동 45-12)이 있다. 1층에 국민은행 봉은사로지점이 입점해 있는데 최씨 일가의 부실대출 의혹을 낳고 있다.
관련보도16:
http://www.todaykorea.co.kr/news/view.php?no=231221
관련보도17: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61115000023
신덕왕후의 정릉(貞陵) 봉국사(奉國寺), 세조의 광릉(廣陵) 봉선사(奉先寺)처럼 봉은사는 선릉의 원찰이다. 원찰(願刹)이란 승하한 임금의 화상이나 위패를 모셔 놓고 명복을 비는 사찰을 말한다. 신라의 연회국사(緣會國師)가 794년(원성왕10)에 창건한 견성사(見性寺)를 1498년(연산군4) 정현왕후 윤씨가 중창하고 선릉의 원찰로 삼으면서 봉은사로 개칭하였다. 1562년(명종17)에 선정릉에서 2시 방향으로 1㎞ 여 떨어진 수도산 자락으로 이전했는데, 원래의 견성사 위치는 불분명하다.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봉은사 주지가 된 나암(懶庵) 보우대사(1509~1565)는 위기의 불교를 구해낸 선승이지만, 당대의 유학자들과 극심한 대립을 빚기도 했다. 선종의 수찰로 봉은사를, 교종의 수찰로 봉선사를 지정하여 선·교 양종을 부활시켰다. 도첩제도 다시 시행하여 4000여명의 승려를 선발했고, 승과(僧科)를 설치하여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었던 휴정(休靜)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인 유정(惟政) 사명대사와 같은 고승을 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1565년 문정왕후 사후 이이(李珥)의 상소로 제주도에 유배되어 제주목사 변협(邊協)에게 참형당했다.
봉은사 경내에 들어서려면 진여문(眞如門)을 지나야 한다. 불변의 진리 안으로 들어선다는 의미라고 한다. 진여문을 지나니 1200년 역사의 봉은사는 연등으로 가득차 있다. 영각(影閣)에는 개파조사 연회국사와 중흥조 보우대사,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남호 영기율사와 영암큰스님 등의 영정과 탱화가 모셔져 있다.
1996년에 완공된 미륵대불은 23m에 달하는 거대석불로 웅장함을 자랑한다. 왼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수인이다.
미륵대불 왼편으로 봉은사에서 가장 오래된 정면5칸, 측면3칸의 판전(板殿)이 앉아있다. 화엄경·유마경·금강경 등의 경판을 보존하고 있는 전각이다.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북청 유배에서 돌아와 과천에 기거하면서 71세로 운명하기 3일 전에 쓴 마지막 글씨로 유명하다.
판전 왼편 아래쪽에 추사김정희선생기적비(秋史金正喜先生記績碑)와 흥선대원위영세불망비(興宣大院位永世不忘碑)가 병렬해 있다. 인성(인간의 본성)과 물성(인간 이외 존재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같다는 낙론(인물성동론)에 가까웠던 추사는 고증을 통해 과거의 사물에 대해 철저하게 탐구하고자 하였다.
불망비는 왕실에서 하사받은 봉선사 소유의 사하전 일부가 주변 지주들과의 소유권 분쟁으로 시끄러울 때 흥선대원군이 봉은사의 손을 들어준데 대한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세운 비석이다.
원래 코엑스, 아셈타워, 인터콘티넨탈호텔, 현대차 신사옥 부지 등의 삼성동 노른자 땅은 거의 대부분 봉은사의 사하전(寺下田)이었다고 한다. 1970년대 박정희정권의 요청으로 내홍 끝에 결국 40만㎡의 땅을 매각했는데, 그로부터 1개월 뒤 정부는 대대적인 강남개발계획을 발표하였다. 2014년에 삼성동 무역센터 일대의 0.19㎢는 ‘강남 마이스’라는 이름의 관광특구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