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25일 목요일

고마와요 vs 고마워요

‘고마와’가 맞을까 아님 ‘고마워’가 맞을까. 요컨대 이는 ㅂ불규칙용언의 ‘와’형이냐 ‘워’형이냐의 문제다.

한글맞춤법 제4장(형태에 관한 것) 제18항(다음과 같은 용언들은 어미가 바뀔 경우, 그 어간이나 어미가 원칙에 벗어나면 벗어나는 대로 적는다.) 6.어간의 끝 ‘ㅂ’이 ‘ㅜ’로 바뀔 적을 규정하고 있다.
돕다(助)의 ‘도와’나 곱다(麗)의 ‘고와’를 제외하고는 가까워(가깝다), 괴로워(괴롭다), 구워(굽다), 기워(깁다), 매워(맵다), 무거워(무겁다), 미워(밉다), 새로워(새롭다), 순조로워(순조롭다), 쉬워(쉽다), 아름다워(아름답다), 외로워(외롭다), 추워(춥다) 처럼 소리나는대로 적는 현실적인 발음 형태를 취하여 ‘워’로 활용한다.
그러므로 ‘고마와, 고마와서, 고마와요’가 아니라 ‘고마워, 고마워서, 고마워요’가 문법적으로 맞는 것이 된다. 하지만 나는 히힛~ 그냥 ‘고마와, 고마와요, 새로와’로 적고 싶다.

참고로, 형용사인 ‘고맙다’의 어간 ‘고맙-’ 뒤에 보조동사 ‘-하다’가 붙으면 동사인 ‘고마워하다’로 품사가 바뀐다.

2017년 5월 18일 목요일

열치매 나타난 달

위클리 공감 403호(2017.05.15 발행)를 수령했다. 요즘 품귀현상을 빚고 있다는 타임 아시아판(Time Asia)을 구할 수 없으니 이 문화체육관광부 정보지로 위안을 삼고 아끼련다. 네고시에이터로 카피를 뽑은 타임지와 달리 공감지의 타이틀은 “새로운 대한민국의 문을 열다”이다. 블랙리스트의 암운이 걷혔으니 이제야말로 제대로 공감할 수 있는 정책정보지를 격주로 받아볼 수 있겠구나.


노회찬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말 몹시 준비된 대통령의 모습이다. 오늘의 5·18 기념식 행보도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대통령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이렇게도 모든 것이 맑아지는구나.
5·18과 6월 항쟁, 11월 촛불혁명… 부디 초심을 견지하여 재조산하(再造山河)의 큰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지지하고 그러나 감시할 것이다.
달하 노피곰 도드샤 머리곰 비취오시라.

2017년 5월 17일 수요일

삼성동 역사문화트레킹

서른두 번째 역사문화트레킹은 삼성동을 돌아보는 코스로 대치동에서 출발했다.
선릉역 1번출구 앞 대치빌딩 17·18·19층에는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입주해 박ㄹ혜-최순실 국정농단을 수사했다. 황교활이 연장승인을 거부하면서 2017년 2월 28일 특검 활동이 종료되었지만 어쩌면 더 중요하게 된 공소유지 등이 계속되고 있다. 2016년 11월 30일 특검이 임명되고, 공식수사 69일 동안 최순실·김종·안종범·문형표·조여옥·류철균·남궁곤·김종덕·정호성·차은택·이재용·박상진·김경숙·김기춘·조윤선·김영재·최경희·이인성·유재경·박채윤·우병우·이영선 등을 줄줄히 소환하고 상당수를 구속시켰다. 윤석열 수사팀장과 이규철 특검보 등 모든 특검팀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관련보도1: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735035


삼성동에 위치한 사적 제199호 선정릉(宣靖陵)은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한꺼번에 부르는 합성어다. 3개의 능이 있다고 해서 삼릉공원으로 불리는데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1960년대 이후 강남이 개발되면서 금천교와 연못이 없어지고 능역이 훼손·축소되었다.
조선의 18단계 품계 중 가장 낮은 종9품 관직명 중의 하나가 참봉인데, 재실(齋室)에 머물면서 선대왕의 능을 모시는 것이 능참봉이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박석(薄石)이 깔린 참도(參道)는 죽은 왕이 이용하는 왼쪽의 신도(神道)와 살아있는 왕이 이용하는 오른쪽의 어도(御道)로 나뉜다. 참도가 끝나는 지점에 정자각(丁字閣)이 앉아 있고 그 뒤편으로 능침이 올라가 있다.
선릉은 성종과 성종비의 무덤이 하나의 정자각 뒤로 각기 다른 언덕에 배치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다. 세조의 광릉(光陵)이나 선조의 목릉(穆陵)도 같은 형태이다. 원래는 성종의 숙조부가 되는 광평대군(세종의 5남)의 묏자리였으나, 지금의 일원동으로 광평대군의 묘를 옮기고 자리잡은 것이다.
잘산대군 이혈(李娎)은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의 차남이다. 권신 한명회와 조모 정희왕후의 정치적 후원으로 친형인 월산대군을 제치고 13세에 9대 왕으로 즉위하여 25년간 통치하고 38세에 승하했다.
첫 번째 왕비인 한명회의 막내딸 공혜왕후 한씨는 18세에 요절했는데(1474) 능호는 파주의 순릉(順陵)이다. 이후 숙의에서 새 왕비로 책봉된(1476) 이가 연산군의 생모인 제헌왕후 윤씨이다. 역사에 따르면 투기가 심해 후궁 문제로 갈등을 빚다가 용안에 손톱자국을 낸 일로 폐서인된 후 사약을 받아 죽었다고 한다(1479). 이어 세 번째 왕비로 책봉된(1480) 이가 중종의 모친인 정현왕후 윤씨이다.
경국대전을 마무리하고 여지승람·동국통감·동문선·악학궤범 등을 편찬하면서 조선의 문물을 완성하였기에 이룰 성(成) 자로 묘호를 썼을 터인데… 조선 최대 섹스 스캔들의 히로인 어우동과의 연관설 등 여성 편력이 만만치 않다.


성종의 능에서 내려와 오른쪽으로 숲길을 걸으면 정현왕후(자순대비)의 능이다. 남편의 능과는 달리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두르고 있다. 2m가 훌쩍 넘는 문인석과 무인석 역시 우직함보다는 보다 더 섬세하다는 느낌을 준다.


진성대군 이역(李懌)은 성종의 차남으로 1506년 이복형인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11대 왕으로 추대되어 38년간 통치하였다.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영입하여 조광조를 중용하고 개혁정치를 펼쳤으나 기묘사화로 귀결되기도 했다.
진성대군의 장인 신수근은 자신의 매부 연산군을 생각하여 중종반정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사사당했는데, 그로 인해 자신의 딸 단경왕후는 입궁 7일 만에 폐위되었다. 고모와 조카딸 관계인 연산군의 배위와 중종의 첫 번째 왕비가 모두 거창신씨로 가문의 몰락을 애통히 지켜봐야 했다.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의 히로인 단경왕후 신씨의 능호는 장흥면 일영의 온릉(溫陵)이다.


두 번째 왕비는 장경왕후 윤씨로 윤임(尹任)을 영수로 하는 대윤파 라인이다. 훗날의 인종을 출산하고 산후병으로 돌아갔다(1515). 세 번째 왕비는 명종의 생모인 문정왕후 윤씨로 윤원형(尹元衡)이 실세인 소윤파 라인이다.
중종은 승하 후 고양군 원당에 있는 1계비 장경왕후의 희릉(禧陵)에 동원이강릉으로 안장됐다. 명종의 모후로 수렴첨정을 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2계비 문정왕후 윤씨는 죽은 후 남편과 함께 묻히고 싶었다. 그래서 봉은사 주지 보우대사와 의논한 후 풍수적으로 볼때 장마에 물이 차오르는 형국이라는 이유를 들어 중종의 능을 선릉 근처로 이장하여 우선 단릉으로 만들어 놓았다(1562).
하지만 새로 이장해 조성한 정릉은 지대가 낮아 장마철 홍수에 재실과 정자각이 침수되는 등 길지가 아니었다. 결국 정릉 천장(遷葬)의 구실이 됐던 풍수 때문에 문정왕후는 사후 태릉(泰陵)에 쓸쓸히 단릉으로 묻혔다. 덕분에 중종 역시 3명의 왕비 누구와도 함께 하지 못하고 단릉으로 홀로 잠들게 되었다.


공공연한 비밀 한 가지… 선정릉 3개 능은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능침을 파헤치고 재궁(왕과 왕비의 관)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기에 시신 없이 비어 있다. 1593년 4월 경기좌도 관찰사 성영(成泳)의 보고서를 보면 그때 이미 선릉의 광중(壙中)은 비어 있었고, 정릉 광중에서 시신이 하나 발견되었다고 한다. 후에 중종의 옥체가 맞는지 종친과 원로대신, 내시와 궁녀들을 동원하여 확인했으나 중종이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나서 의대(衣襨)만 묻게 되었다. 선릉 역시 부장품으로 넣었던 옷을 태워 안장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개간이 불가한 왕릉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총독부가 식량증산이라는 명목으로 능과 능 사이 구릉지대의 개간을 허가하여 능역 안에 농지가 존재하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 때에도 능역 외곽을 잘라 민간에 파는 등 선정릉의 수난은 계속되었다. 이나마도 보존되어 있는 것이 다행이랄까. 석촌호수와 비슷한 198,813㎡ 면적의 선정릉에는 하루 평균 1500명 정도가 관람한다.


한국문화재재단은 충무로의 전통문화 공간인 ‘한국의 집’에 프랑스 요리학교와 식당을 설립한다는 업무협약을 최순실이 주도한 미르재단과 2016년 7월에 맺은 바 있다. 한식의 세계화에도 미르재단의 검은 마수가 뻗쳤던 것일까. 아이들이 공부하는 사회책에 이른바 ‘문화 융합’ 사례로 화려하게 등장하고 싶었던 것일까.
한국과학창의재단은 과학문화 확산을 위해 만든 미래창조과학부 산하기구이다. 그러나 박ㄹ혜 정권이 들어서면서 창조경제의 홍위병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쏟아지기도 했다.
최순실 조카의 처남인 김모 씨를 채용하여 구설수에 오른 적도 있다. 또한 정유라 특혜 의혹의 핵심 당사자로 수감 중인 이화여대 김경숙 신산업융합대학장의 남편이자 육학 전공자인 김천제 건국대 축산식품공학과 교수가 2016년 10월 창의재단 이사장 공모에 지원했다가 낙하산 논란이 일자 철회한 바 있다.

관련보도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9211105001&code=940100
관련보도3: http://www.sedaily.com/NewsView/1L45AC2DFK
관련보도4: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61021500009
관련보도5: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85271.html


한국문화재재단에서 분당선 선정릉역 대각선 방향 1번출구 뒤편은 논현동 봉은사로49길이다. 이 길 안쪽의 강남족발 맞은편에는 카페 테스타로사(테사) 1호점이 있었다. 최순실은 K스포츠재단이 전국 220곳에 건립하려 했던 K스포츠클럽에 자신의 카페를 입점시켜 식음료 사업으로 수익을 챙기려 했다. 창고가 있는 지하공간과 일반영업을 위한 1층·2층, 비밀아지트인 옥탑방으로 구성돼 있다. 정호성·안종범, 고영태·차은택 등이 수시로 들락거리며 회의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권 실세와 대기업 인사들도 자주 왔었다고 한다.
보증금 1억에 월세 700만원… 본격적으로 국정농단 사건이 불거지기 전에 이미 매물로 내놓았다고 한다. 내부에 들어가보지는 못했다. 지금은 광고회사가 인수했다고 하는데 빨간색이었던 천막이 검은색으로 바뀌어 있다.
베트남은 세계 2위의 커피생산국이고 인접한 미얀마에서도 커피를 생산한다. 최순실은 미얀마에서 커피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유재경을 미얀마 대사에 앉혔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이태리어로 ‘빨간 머리’를 의미하는 테스타로싸(Testa Rossa)는 페라리(Ferrari)의 빨간색 명차 이름이기도 하다. 뒷발을 디디고 뛰어오르는 말 문양의 페라리 엠블럼에서 승마를 하는 정유라를 연결시켜 카페 브랜드로 런칭한 것이 아닐까.

관련보도6: http://news.joins.com/article/21075909
관련보도7: http://news1.kr/articles/?2830358
관련보도8: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2/02/2017020200119.html



지난 3월 20일 설립허가가 취소된 논현동 K스포츠재단에는 들르지 않고 바로 돌아나와 횡단보도를 건너서 호산프라자 왼편의 선릉로112길로 들어섰다. 박ㄹ혜의 삼성동 42-6 자택은 지하 1층, 지상 2층의 단독주택으로 484.8㎡(146평), 건물은 317.35㎡(96평) 규모이다.
특검 수사에 따르면 비선실세 최순실의 모친인 임선이가 1990년에 10억 5000만원에 매매계약을 주도하고 구매했다고 한다. 높은 담장과 나무 등으로 가려져 있는데, 내부를 촬영하려는 보도진의 취재 열기로 인근 건물은 때아닌 깔세 특수가 일기도 했다. 바로 옆 아파트의 이름이 삼성롯데캐슬킹덤아파트이다. 삼성과 롯데… 하필이면 뇌물수수 의혹과 관련한 오묘한 이름이다.
헌재의 탄핵 선고 이후 청와대에서 퇴거하면서 박ㄹ혜는 유기 논란을 빚으면서 취임시 삼성동 주민이 선물한 진돗개를 두고 나왔다. 퍼스트도그(first dog)의 원래 이름은 ‘민주'와 ‘통일'이었는데 청와대로 가면서 ‘새롬'이와 ‘희망’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김막업 요리연구가를 데리고 나왔고, 전담 미용사 정송주·정매주 자매는 거의 매일 아침마다 택시를 타고 방문했다. 최순실의 소개로 청와대에 입성한 윤전추 행정관과 이영선 경호관이 파면된 대통령을 보좌해 논란이 있었다. 14개의 주요 신문을 구독했지만 중앙일보와 일간스포츠는 제외되었다. 장시호는 법정에서 이모 최순실이 2층 방에 돈이 있으니 그 돈으로 손자(정유라 아들)를 키우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관련보도9: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3/06/2017030600152.html
관련보도10: http://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791830.html
관련보도11: http://www.nocutnews.co.kr/news/4775537

박ㄹ혜의 삼성2동 자택은 한때 지지자들의 성역으로 북적였다. 일부 개신교 신자들의 통성기도로 시끄러웠고, 건물을 향해 절을 하기도 했다. 구호와 군가가 난무했다. 고성을 지르며 알몸 시위를 벌인 40대 남성이 체포된 일도 있었다. 추종자들이 붙여놓은 태극기·꽃·사진·메모지 등으로 담벼락이 빼곡히 채워지기도 했다.
지난 4월에 홍성열 마리오아울렛 회장이 이 집을 67억5000만원에 매입했다. 그리고선 5월 6일 박ㄹ혜의 이사짐이 서초구 내곡동으로 옮겨졌다.
5월 9일 치러진 19대 대선 투표집계 결과 강남구 22개 동 가운데 문재인이 홍준표를 앞서지 못한 6개동은 압구정동·신사동·청담동·삼성1동·도곡2동·도곡3동 등 6곳이었다.

관련보도12: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7/03/20/20170320002998.html
관련보도13: http://www.segye.com/newsView/20170320002820
관련보도14: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7042110591202468
관련보도15: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70511014006


삼성동성당 뒤편 봉은사로 대로변에는 최순실의 언니인 최순득 소유의 승유빌딩(삼성동 45-12)이 있다. 1층에 국민은행 봉은사로지점이 입점해 있는데 최씨 일가의 부실대출 의혹을 낳고 있다.

관련보도16: http://www.todaykorea.co.kr/news/view.php?no=231221
관련보도17: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61115000023


신덕왕후의 정릉(貞陵) 봉국사(奉國寺), 세조의 광릉(廣陵) 봉선사(奉先寺)처럼 봉은사는 선릉의 원찰이다. 원찰(願刹)이란 승하한 임금의 화상이나 위패를 모셔 놓고 명복을 비는 사찰을 말한다. 신라의 연회국사(緣會國師)가 794년(원성왕10)에 창건한 견성사(見性寺)를 1498년(연산군4) 정현왕후 윤씨가 중창하고 선릉의 원찰로 삼으면서 봉은사로 개칭하였다. 1562년(명종17)에 선정릉에서 2시 방향으로 1㎞ 여 떨어진 수도산 자락으로 이전했는데, 원래의 견성사 위치는 불분명하다.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봉은사 주지가 된 나암(懶庵) 보우대사(1509~1565)는 위기의 불교를 구해낸 선승이지만, 당대의 유학자들과 극심한 대립을 빚기도 했다. 선종의 수찰로 봉은사를, 교종의 수찰로 봉선사를 지정하여 선·교 양종을 부활시켰다. 도첩제도 다시 시행하여 4000여명의 승려를 선발했고, 승과(僧科)를 설치하여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었던 휴정(休靜)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인 유정(惟政) 사명대사와 같은 고승을 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1565년 문정왕후 사후 이이(李珥)의 상소로 제주도에 유배되어 제주목사 변협(邊協)에게 참형당했다.
봉은사 경내에 들어서려면 진여문(眞如門)을 지나야 한다. 불변의 진리 안으로 들어선다는 의미라고 한다. 진여문을 지나니 1200년 역사의 봉은사는 연등으로 가득차 있다. 영각(影閣)에는 개파조사 연회국사와 중흥조 보우대사,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남호 영기율사와 영암큰스님 등의 영정과 탱화가 모셔져 있다.


1996년에 완공된 미륵대불은 23m에 달하는 거대석불로 웅장함을 자랑한다. 왼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수인이다.


미륵대불 왼편으로 봉은사에서 가장 오래된 정면5칸, 측면3칸의 판전(板殿)이 앉아있다. 화엄경·유마경·금강경 등의 경판을 보존하고 있는 전각이다.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북청 유배에서 돌아와 과천에 기거하면서 71세로 운명하기 3일 전에 쓴 마지막 글씨로 유명하다.


판전 왼편 아래쪽에 추사김정희선생기적비(秋史金正喜先生記績碑)와 흥선대원위영세불망비(興宣大院位永世不忘碑)가 병렬해 있다. 인성(인간의 본성)과 물성(인간 이외 존재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같다는 낙론(인물성동론)에 가까웠던 추사는 고증을 통해 과거의 사물에 대해 철저하게 탐구하고자 하였다.
불망비는 왕실에서 하사받은 봉선사 소유의 사하전 일부가 주변 지주들과의 소유권 분쟁으로 시끄러울 때 흥선대원군이 봉은사의 손을 들어준데 대한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세운 비석이다.


원래 코엑스, 아셈타워, 인터콘티넨탈호텔, 현대차 신사옥 부지 등의 삼성동 노른자 땅은 거의 대부분 봉은사의 사하전(寺下田)이었다고 한다. 1970년대 박정희정권의 요청으로 내홍 끝에 결국 40만㎡의 땅을 매각했는데, 그로부터 1개월 뒤 정부는 대대적인 강남개발계획을 발표하였다. 2014년에 삼성동 무역센터 일대의 0.19㎢는 ‘강남 마이스’라는 이름의 관광특구로 지정되었다.

2017년 5월 6일 토요일

덕릉 역사문화트레킹

황사와 미세먼지 ‘매우 나쁨’이라는 예보가 있었지만 길을 나섰다. 오늘 트레킹은 4호선 당고개역에서 시작한다. 1번출구에서 직진하다가 왼편의 상계로37길·35길로 올라가면 태고종 천영사와 광덕사, 조계종 학림사로 갈 수 있지만 덕릉로 쪽으로 길을 잡았다.


상계3·4동 주민센터를 지나 덕릉로139길의 대진빌라 골목으로 올라갔다. 오래된 노후주택이 밀집한 지역이다. 슬레트 지붕 위로 길냥이가 어슬렁거린다. 담장과 외벽 곳곳에 금이 가고 빈집도 많아 보였다. 곳곳에 발파작업을 한다는 특정시간이 적힌 플래카드가 붙어 있는데, 아마도 진접으로 연결되는 4호선 연장구간 공사 때문인 듯하다.


작은 규모의 석가사는 그럴듯한 전각이 대웅전과 지장전만 보인다. 인근이 ‘동막골’로 불리는 동네일까. 주변에 한국불교, 세계불교 타이틀을 단 크고 작은 절집이 많다.


고물자전거가 쌓여있는 한영환경자원 앞으로 나왔다. 2016년에 개통된 덕릉터널을 통과하면 바로 별내동으로 진입한다. 버스가 다니는 왼편 고개길로 올라갔다.


구불구불 S자의 길을 올라가면 덕릉고개 정상에 10-5번, 85번 마을버스가 운행하는 덕능교장 버스정류소(23001)가 있다. 정류장 뒤편이 56사단 동원훈련장이다. 고개마루에서 철조망이 쳐진 긴 담벼락을 따라 10분쯤 내려가면 덕흥대원군묘(德興大院君墓) 푯말이 보인다.


묘비에 ‘덕흥대원군지묘, 하동부대부인정씨지묘’라 새겨져 있다. 이초(李岧)는 11대 중종과 창빈안씨 소생으로 9세에 덕흥군에 책봉되고 하동정씨와 혼인하여 3남 1녀를 두었으나 30세에 병을 얻어 졸하였다(1530~1559). 12대 인종과 13대 명종이 이복형들이다. 명종 사후 이초의 3남 하성군 이연(李昖)이 즉위하게 되니 이가 바로 14대 선조이다. 재신들의 반대로 생부인 이초를 왕으로 추존코자 한 선조의 시도는 실패하였지만, 1569년(선조2)에 최초의 대원군으로 추존되었다. 제헌왕후의 회릉이 회묘로, 공빈김씨의 성릉이 성묘로 격하된 것처럼 덕릉이란 이름도 덕묘가 맞는 표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왕릉에만 세울 수 있는 무인석이 서 있는 것으로 보아 묘역만이라도 능(陵)으로 조성하고 싶었던 선조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하단에는 2m 크기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신도비 아래쪽에 하원군이정묘역이 있다. 이정(李鋥)은 덕흥대원군의 장남이다. 묘비에 ‘현록대부하원군지묘, 남양군부인홍씨지묘’라 새겨져 있다. 이곳은 수락산 권역이고 묘역 아래 덕릉로 길 건너편은 불암산이다.




묘역에서 내려와 왼편의 흥국사로 향하는 덕릉로1071번길로 돌아 올라가면 덕흥대원군묘역의 재실인 덕릉재실(德陵齋室)이 나온다. 수락산방(水落山房)이나 덕흥사(德興祠)로도 불리는 곳으로 선조의 조모, 부모, 백형 내외의 불천지위(不遷之位) 6위를 모시는 묘당이다. 참고로 선조의 조모인 창빈안씨묘역은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경내에 있다.


재실 앞에 덕흥대원군의 글씨를 각자하여 세운 시비가 있다. 재실 뒤편 산비탈에 일단의 무덤군이 있어 사진을 박아보았다.


덕릉재실에서 길 건너편의 덕릉마을 산신각에 올라갔다. 1880년대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지금도 전통을 계승하여 매해 음력 1월과 10월에 산신제를 지낸다고 한다. 내부에 산신도가 그려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1칸 짜리 작은 산신각은 1998년에 정비한 것인데, 어이없게도 산신각 한글현판 글씨가 매직으로 대충 쓰여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산신각을 내려와 덕릉의 원찰인 흥국사를 보려고 조금 더 올라갔다. 그러나 쌈밥정식으로 알려진 목향원 등 음식점에 차 끌고 오는 인파로 북적대어 포기하고 내려왔다. 아주 일주문 기둥 초입에까지 차들을 세워놨더군… 교통체증을 가중시키는 이들 식당에는 상당한 정도의 교통유발부담금을 반드시 물려야 마땅하다.
하늘은 맑고 파래 보이는데 마스크를 쓰지 않아서인지 중국발 황사와 미세먼지로 눈 따끔 코 맹맹에 목 칼칼이다. 안경과 휴대폰 액정에도 흙먼지가 내려앉았다.

2017년 5월 5일 금요일

경춘선숲길 걷기

경춘선숲길 1단계와 2단계 구간(약 3㎞)을 걸어보았다. 1호선 월계역 4번출구로 나와 사슴아파트 3단지 월계로를 걸어 녹천중학교와 성원상떼빌 404동 사이의 경춘철교(The Gyeongchun Railroad Bridge)에 도착했다.
중랑천을 가로질러 노원구 월계동과 공릉동을 연결하는 경춘철교는 1939년 개설된 경춘선(옛 성동역~춘천역)이 지나던 폭 6m, 길이 176.5m의 교량이다. 중랑천의 옛 이름을 본떠 한천철교(漢川鐵橋)라고도 불렀다. 일제강점기인 1939년 7월에 건설된 후 2010년 12월 경춘선 복선전철화 사업에 따라 광운대역(옛 성북역)에서 갈매역까지 약 8.5㎞ 구간이 폐선되기까지 71년간 서울과 춘천을 오가며 여객과 화물을 운송하였다. 2016년 경춘선숲길 2단계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보행교로 재정비 되었다. 교각과 철로를 원형대로 유지하고 중랑천변길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과 엘리베이터도 설치되어 있다.


경춘철교를 지나 오른쪽 숲길을 걷다보면 옛 무궁화호 객차 2량을 발견할 수 있는데, 경춘선숲길 안내소로 사용되고 있다. 경춘철교를 건너지 않고 이곳 객차로 바로 가는 방법도 있다. 7호선 하계역 4번 출구로 나와 뒤로 돌면 세이브존 대각선 지점인데 여기서 우회전하여 공릉역 방향으로 조금만 걸으면 하계지하차도 윗부분에 객차가 보인다.


두산 위브 103동 옆으로 ‘공릉동 사랑의 꽃터널’이 꾸며져 있다. 철길은 다소 척박한 땅이지만 강한 생명력을 가진 들풀들이 피어난다. 벌개미취, 쑥부쟁이, 구절초, 감국, 코스모스, 루드베키아, 수크령, 억새, 홍띠, 실새풀, 꽃범의꼬리, 나비꽃, 층꽃나무, 꼬리풀… 들꽃은 인위적으로 심지 않았어도 먼 곳에서 꽃씨로 날아와 쇄석을 뚫고 자라고 어우러지며 철길만이 가지고 있는 풍경을 만들어낸다. 철길은 들꽃길이기도 하다.


2013년 서울시의 도시재생프로젝트에 따라 폐선부지는 보전, 활용, 기타 등으로 용도 구분되어 공원화되었다. 타이틀은 경춘선 ‘숲길’이지만 대부분 구간은 보도블럭화 되어 있고, 객차 주변의 짧은 구간만 스트로브잣나무 산책길이 조성돼 있다. 경춘선은 레일 사이의 너비가 1,435㎜인 표준계인 듯하다.


6호선 화랑대역 4번출구 앞에 파란색의 육군사관학교 관광안내판이 있다. 사전예약 후 제2정문 행정안내소에서 시작하는 1시간 30분에서 2시간짜리 육사 도보관광코스이다.  다음 기회엔 육사을 둘러봐야겠군.


2017년 5월 3일 수요일

모란공원, 흥선대원군묘 역사문화트레킹

제29차 역사문화트레킹으로 남양주 화도읍을 다녀왔다. 경춘선 마석역 1번출구에서 마석윗삼거리를 지나 1㎞쯤 걸으면 모란공원이다. 입구 왼쪽의 모란미술관을 지나면 바로 오른편에 민족민주열사묘역이 있다.


김근태(1947~2011)는 서울상대 재학 때부터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대표적인 재야 인사였다. 박정희·전두환 파쇼정권에 저항하며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하였다. 이 때문에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기술자로 불리는 이근안에 의해 온갖 고문을 당하게 된다. 종국엔 고문 후유증과 파킨슨병으로 고생하다가 64세로 타계했다. 참여정부 시절 “계급장 떼고 논쟁하자”고 대통령에게 맞장 뜨던 뜨거운 열정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1970년 11월 13일 22살의 전태일(1948~1970)이 분신하자 3공정권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모란공원으로 장지를 결정했다. 이후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의 유해가 하나 둘 모란공원으로 모이면서 그 상징성은 더욱 짙어지게 된다. 2011년 9월에는 전태일의 어머니인 이소선(1929~2011) 여사가 아들 묘소 뒤쪽으로 모셔져 영면하고 있다.


‘늦봄’ 문익환(1918~1994) 목사님은 평생을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헌신해 온 분으로 내가 존경하는 정말 몇 안되는 목사님 중 한 분이다. 그의 시집 「두 하늘 한 하늘」을 간직하고 있다. 2011년 부인 박용길 장로가 별세하며 각막을 기증했다.


1987년 1월 14일 5공정권은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박종철(1965~1987)을 고문치사(拷問致死)하고 이를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며 조작 은폐하여 6월항쟁을 불러온다.


민주열사묘역 왼쪽 권역, 조계종 달뫼산 아미타사 일주문 맞은편에는 영혜옹주의 남편이자 철종의 부마도위인 박영효(1861~1939)의 묘소가 있다. 경술년의 병탄 이후 박영효는 후작 작위를 받고 조선귀족회 회장, 중추원 의장을 역임하며 반민족 친일행보를 이어갔다. 1882년 9월 수신사 일행으로 도일하는 메이지마루(明治丸)호 선상에서 박영효가 이응준의 태극기에서 4괘를 바꾼 태극기를 디자인했다고 한다. 박영효의 손녀인 박찬주는 의친왕 이강의 차남으로 알려진 이우와 결혼했다.


모란공원을 나와 마석역 방향의 경춘로를 걸어 마석그랜드힐 아파트길로 들어섰다. 204동 오른편 인공바위 밑 나무데크 계단을 올라간 후 산책로를 거쳐 벤치 앞에서 철망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고 하산길을 잡으니 흥선대원군묘 곡장 위쪽으로 나올 수 있었다. 여기서 산나물을 다듬고 있는 여성 한 분(이 여사)을 마주쳤다. 본인을 흥선대원군의 5대 손녀라고 소개했다. 1시간 넘게 머물면서 대한제국 황실에 대한 이런저런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게 되었는데, 하나 같이 흥미로운 이야기들이다.


이곳은 흥선대원군의 3번째 음택이다. 그는 광무 2년(1898.2.22)에 운현궁의 별서이자 수장(壽葬, 생전에 만들어 놓은 무덤)을 겸했던 고양군 공덕리(현 염리동 동도중학교) 아소당(我笑堂)에서 운명한 뒤 뒤뜰에 묻혔다. 대한제국 시기였기에 대원군도 대원왕으로 추봉되었다. 10년 뒤인 1908년 조정의 논의 끝에 왕에 걸맞는 예우를 위해 파주군 운천면 대덕리(현 문산읍 운천리)로 천봉(遷奉)되면서 흥원(興園)으로 격상되었다. 운천은 6·25전쟁 후 휴전선과 인접한 군사작전지역이었기에 미군 제2보병사단의 요청에 따라 1966년 6월 16일 이곳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의 운현궁 가족묘지로 재천봉되었다.
흥원은 흥선헌의대원왕 이하응과 배위 순목대원비(純穆大院妃) 민씨의 합장원(합장묘) 형식이다. 묘역 입구에 국태공원소(國太公園所)라고 음각된 석조 묘표가 있다. 왕의 묘는 산릉(山陵), 왕세자·왕세자빈이나 왕의 친척들의 무덤은 원소(園所), 일반 묘는 산소(山所)라 부른다.
대한흥선헌의대원왕(大韓興宣獻懿大院王) 신도비의 비신은 깨어지고 떨어진 곳이 많이 보였다. 원침(園寢)을 수호하는 석양은 있는데, 석호는 보이지 않는다. 혼이 좌정하는 혼유석은 귀면이 새겨진 4개의 고석이 받치고 있다. 좌우 망주석에 가늘게 조각한 호랑이 문양의 세호(細虎)가 오르내리고 있다. 원(園)이기 때문에 무인석은 없다. 원침 오른편의 하얀 계단은 신계(神階)일까. 전체적으로 석물들의 파손 흔적이 많아 보인다.


흥원 오른편 지척에는 지도상에 흥친왕묘로 표시된 곳이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봉분이 없고 곡장 안쪽으로 운현궁 일가 8인의 이름과 생몰연대가 새겨진 비석만 놓여 있다.


興親王    恩信君    洛川君
李淙    李淸公    李鍝公    李汶鎔    李埈公

뒷줄 왼쪽부터 흥선대원군의 적장자이자 고종의 친형 흥친왕(興親王 이재면 1846~1912), 정조의 이복동생이자 흥선대원군의 조부 은신군(恩信君 이진 1755~1771), 은신군 종숙이자 흥선대원군의 증조부뻘 낙천군(洛川君 이온 1720~1737), 앞줄 왼쪽부터 이우 차남 이종(李淙 1940~1966), 이우 장남 이청(李淸 1936~ ), 이준의 아들 이우(李鍝 1911~1945), 이준 동생 이문용(李汶鎔 1882~1901), 흥친왕의 아들이자 흥선대원군의 적장손 이준(이준용 李埈鎔 1870~1917) 순이다. 이청과 이문용의 생몰연대는 새겨져 있지 않고, 이청·이우·이준은 각각 이청공·이우공·이준공으로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여사님 주장에 따르면 부동산업자들이 묘역을 훼손하고 납골당으로 만들어버렸다고 하는데, 사실관계를 입증할 필요가 있겠지. 이들의 묘표·묘갈·신도비 등의 묘비들은 현재 서울역사박물관 광장에 옮겨져 있다. 우측으로 기울어진 장명등을 지탱하기 위해 오른쪽 문인석 발치까지 지지목을 대어 놓은 모습이 안쓰럽다.


이 여사님이 알려준 대로 흥친왕묘 위쪽으로 조금 올라갔더니 한 켠이 무너진 곡장을 두른 무덤이 하나 나왔다. 그가 ‘꼭대기 할아버지’로 부른다는 이재선(李載先)의 묘소였다. 오마이갓! 실전된 것으로 알고 있던 완은군(完恩君)의 묘소를 발견하게 될 줄이야!
흥선대원군의 서장자이자 흥친왕과 고종의 이복형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계동 큰서방님’의 숨겨진 얘기를 흥미진진하게 들을 수 있었음은 크나큰 행운이었다.



세 묘역의 문인상을 사진으로 비교해 본다. 순서대로 흥선대원군묘(이하응), 흥친왕묘(이재면), 완은군묘(이재선)의 문인석이다. 역시나 표정이나 관복에 차이가 있다.


다시 길을 거슬러 빽빽한 수풀을 헤치면서 내려왔다. 지도에 ‘영선군 이준용묘와 신도비’로 나와있는 곳은 봉분도 신도비도 없이 잡초만 우거져 방치돼 있었다. 흥친왕 이재면의 아들이자, 흥선대원군 적장손의 무덤 모습이다. 조지훈 시인이 몰락한 왕조의 유물로 읊은 봉황수(鳳凰愁) 시구가 떠오르는 구슬픈 풍경이다.



탐방을 마치고 이준용묘 옆 오솔길을 따라 마을로 접어들었는데 재실(齋室)로 볼만한 집을 찾지 못했다. 폭포로17번길을 걸어나와 마석역으로 회귀했다.
석가탄신일인데도 공휴일 시간표가 아니라 평일 시간표대로 경춘선이 운행되어 헷갈렸다. 경춘선 객차에는 최소한의 매너나 공중도덕마저 개무시하는 쫄복 입은 자전거족이 그득했다. 객차 바닥에 쭈구려 앉는 것은 물론이고 ‘휠체어 이용고객 배려공간’이기에 “자전거를 거치할 수 없습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는 곳까지 지멋대로 자전거들을 기대어 놓았다. 지들 건강과 취미와 오락과 여흥을 위해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몰지각·몰상식·몰염치·몰싸가지·민폐 부류들을 정말이지 극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