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8일 토요일

주말엔 세종마을 도보여행

오후엔 도심권50+센터 및 한양길라잡이와의 업무협약으로 세종마을가꾸기회가 주관하는 ‘주말엔 세종마을’ 도보여행에 참가했다. 봄에 해설과정을 모집하고  답사와 시연 과정을 거쳐 7월부터 실전 해설에 돌입한 지역특화사업인데, 다음주(10월 16일)에 시즌 마감한다고 해서 어제 오전에 부랴부랴 신청하여 다녀온 것이다.
사실 서촌 명칭의 근거는 빈약한 편이다. 예전처럼 상촌(上村)이라는 뜻의 우대(웃동네)로 부르는 것이 좋겠지만, 옛 북부 준수방은 세종대왕의 탄생지이므로 2010년부터 지역주민들이 고쳐 부르고, 2011년 종로구지명위원회에서 의결했다는 ‘세종마을’로 부르는 것도 그럴듯하게 들린다.
사진은… 통의동 백송 ~ 이상의 집 ~ 노천명 가옥 ~ 이상범 가옥 ~ (이중섭 화실) ~ 박노수 가옥 ~ 윤동주 하숙집 터 ~ 수성동 계곡 ~ 옥인아파트 터 ~ 윤덕영첩 구옥 ~ 벽수산장 터 ~ 가재우물 ~ 벽수산장 입구의 다리 ~ 자수궁 터 ~ 대오서점 순이다.

경복궁역 4번 출구를 나와 왼편 골목으로 들어가면 통의동 백송 터가 나오는데, 이곳은 영조의 잠저였던 창의궁(彰義宮) 터 및 추사 김정희 선생 집터이기도 하다. 통의동 백송은 높이 16m, 둘레 5m, 수령 6백년의 노송으로 1962년 12월 천연기념물 4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1990년 여름에 몰아친 태풍으로 갈라진 뒤 회생작업에도 불구하고 1992년 7월 고사(枯死) 판정을 받아 천연기념물에서 지정 해제되었다. 마음이 짠하지만 베어진 그루터기 옆으로 어린 백송 4그루가 자라고 있는 것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


횡단보도를 건너 통인동 우리은행(효자동 지점) 이면도로에 들어서면 천재 문학가 김해경(1910~1937)이 23살까지 살았던 집터 일부를 고쳐 지은 통유리의 기와집을 만날 수 있다. 단편 「날개」에서 매음하는 아내가 주는 아스피린(실제는 아달린)이나 받아 먹으며 무기력하게 빈둥대는 1930년대 지식인의 모습은 이곳 ‘이상의 집’에서 구상된 것이 아닐까 궁금해진다.


누하동 골목의 장애아동시설 ‘라파엘의 집’ 맞은편에 서울시 미래유산인 노천명(1911~1957) 가옥이 있다. 대표작 「사슴」으로 유명해졌으나, 1943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친일 작품을 발표하였다. 6·25 전쟁 당시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사회주의 문화인 행사에 참여하여 서울수복 후 좌익분자 혐의로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모가지가 길어 슬픈 시인은 1949년 이 집에 안착하여 양녀와 8년 간을 살다가 뇌빈혈로 쓰러져 46년 짧은 생을 마감했다.
역광… 사진을 잘못 박았다.


종로기업(주)에서 필운대로 건너편 청운자동차공업사 옆 누하동 골목 안쪽에는 이상범 가옥과 화실(등록문화재 제171호)이 있다. 청전 이상범 화백(1897~1972)은 근대 산수화의 대가로 청전(靑田) 양식이라는 독창적인 화풍을 구축했다.
1936년 동아일보에 재직시에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기도 했으나, 40대 이후에는 훼절하여 일제에 부역하였다.


「흰소」로 유명한 이중섭(1916~1956)이 개인전을 준비하던 누상동 2층집은 대략의 위치만 가늠하고 옥인길을 건너갔다.
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의 백부라는 신분에도 스스럼없이 매국행위를 자행한 윤덕영(1873~1940)이 자기 딸을 위해 1937년 지은 한·양 절충식 집을 1973년 남정 박노수(1927~2013) 화백이 소유하여 2011년 말까지 거주한 박노수 가옥은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1호(1991)로 등록돼 있다. 2011년 종로구에서 기증받아 구립 박노수 미술관으로 운영 중인데, 입장료로 2천원을 받고 있다. 연예인 이민정이 박노수의 외손녀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윤동주(1917~1945) 시인은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김송(1909~1988)의 집에서 2달간 머물며 서시, 별 헤는 밤,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등 주옥같은 명시들을 썼다고 한다.
윤동주 하숙집 터 앞쪽에는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이 다정하게 밤을 구워 팔고 있었다.


옥인길을 올라 끝에 다다르면 겸재 정선(1676~1759)의 진경산수화 「수성동」의 배경이 된 수성동 계곡을 만나게 된다. 세종의 3남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이 1442년 비해당(匪懈堂)을 짓고 노닐던 계곡이다. 그림에 보이는 기린교로 추정되는 작은 돌다리가 걸쳐져 있다. 경복궁역에서 10분 간격으로 오가는 9번 마을버스를 타면 수성동 계곡까지 편하게 갈 수 있다. 마을버스 노선도를 기록해 둔다.
수성동 계곡 ~ 박노수 미술관 ~ 통인시장 앞 ~ 오거리 한옥마을입구 ~ 광화문 새마을금고 ~ 경복궁역 ~ 세종문화회관 ~ 조선일보 ~ 시청역 ~ 삼성프라자 ~ 남대문시장 ~ 프레스센터 ~ 광화문 한국통신 ~ 경복궁역 ~ 광화문 새마을금고 ~ 오거리 한옥마을입구 ~ 통인시장 종로보건소 ~ 박노수 미술관 ~ 수성동 계곡



군데군데 연결된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다보니 윤덕영의 첩이 살았다는 한옥이 나왔다. 1910년대 지어진 집으로 처마에 익공을 달았고, 민간에서 보기 어려운 고급주택의 양식을 갖추고 있어 희소성이 있다고 한다. 1977년 문화재로 지정됐다가 1997년 해제됐는데, 지금은 7가구가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재개발조합과 지자체의 갈등 만큼이나 문 틈으로 보이는 살림살이가 어지러워 보였다.


천수경(?~1818)이 인왕산 옥류천 위에 송석원을 짓고 평민들의 시사 모임을 열었던 곳을 후에 윤덕영이 사들여 건평 1,983㎡에 달하는 프랑스풍의 초호화 별장 벽수산장(碧樹山莊)을 지었다. 1966년 화재로 전소됐다는데, 추사가 썼다는 松石園 글자 또한 찾기 어렵다. 지금은 ‘우리술 문화공간’이 들어서 있다.


김상헌의 후손인 가재 김창업(1658~1721)이 팠다는 가재우물 터는 그 흔적조차 짐작하기 힘든 상태였다.


벽수산장 입구의 다리가 있던 터라고 설명 들은 거 같은데… 어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나중에 다시 확인해 봐야겠다. 그런데 저 ‘오’자 낙서는 무어냐? 자랑스런 한글이지만, 한글이라 부끄러운 경우도 있다.


문종이 이복동생인 무안대군 이방번의 집을 수리하여 세종의 후궁들이 거처하도록 마련한 처소가 자수궁(慈壽宮)이다. 성종의 계비였던 폐비 윤씨, 중종의 원비 단경왕후 신씨도 퇴궁 당한 후 자수궁에 머물렀다고 한다. 궐 밖으로 나온 자수궁의 후궁들은 불교에 귀의하는 경우가 많아서 자수궁은 자수원(慈壽院)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후 현종 대에 혁파하여 북학(北學)을 세웠는데, 지금은 군인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고추짜장면으로 유명한 영화루(중국집)를 지나면 1934년 지은 ㄷ자형 한옥 건물로 1951년에 문을 연 대오서점이 나온다. 안채 일부를 카페로 꾸며놓은 듯한데, 칠이 벗겨진 간판 등을 통해 오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오늘 코스에는 없었지만 촬영해 봤다.


좁고 미로 같은 골목길을 찾아 다니는 건 쉽지 않다. 2시간에 걸쳐 친절히 해설해 주신 민평순, 이혜옥 선생님께 고맙다는 말씀 전하고 싶다.

댓글 1개:

  1. 노천명가옥 : 누하동 225-1번지
    천경자가옥 : 누하동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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