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9일 수요일

헌인릉 탐방

내곡동 헌인릉(獻仁陵)에서 시작한 2016년 한가람 2월 답사(2016.2.27)…
23대 순조(이공)와 순원왕후 김씨를 합장한 인릉(仁陵)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신도(神道)-어도(御道)가 아니라 신도(神道) 대신에 향로(香路)라는 푯말을 붙인 것이 특이했다.


11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순조는 아버지 정조와 장남 효명세자(익종)의 그늘에 가려 그닥 존재감이 크지 않은 임금으로 기억된다. 순조 대에 김조순을 주축으로 60여 년간의 본격적인 세도정치가 시작되며, 서북지방에서는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고, 오가작통법 등으로 천주교가 크게 탄압받는다. 순조는 45세에 매독3기로 승하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병풍석 없이 12간의 난간석으로 둘려졌고, 건너편으로는 테러방지법 등으로 최근 더욱 세가 강화된 국정원을 발치에 거느리고 있는 형국이다. 국정원이 위치하고 있는 이곳 헌인릉 근처 어딘가에 다라치고개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3대 태종(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의 쌍릉인 헌릉(獻陵)은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현정릉(玄正陵)과 같은 양식에다 석마가 추가됐는데 세종의 효심으로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여흥부원군 문도공 민제(閔霽)의 차녀인 여흥 민씨는 두살 연하 남편인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나, 집권 후 왕권을 강화하려는 태종의 정책으로 친정 동생들이 유배·사사당하는 과정을 고통스럽게 지켜봐야 했고, 남편보다 먼저 수강궁 별전에서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각기 병풍석을 두른 두 봉분이 12간의 난간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부모님이 서로 화해하기를 바랬던 세종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태종 말년에 전국적인 가뭄이 들었는데, 병석에 누워있던 태종이 “내가 죽으면 하늘에 올라가 상제께 비를 내리시도록 청하여 우리 백성들의 근심을 덜어주겠다.”는 말을 남긴 후 5월 10일에 승하하자 정말 비가 내려 해갈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이후 태종의 기일인 음력 오월 초열흘날이 되면 항상 비가 내렸다고 해서 태종우(太宗雨)라고 하는데, 상석(床石) 밑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헌릉이 위치한 대모산 기슭은 물이 많아 곡장 옆으로 배수로를 뚫어 놓았다. 새봄이 오면 오리나무 숲의 경관이 더욱 볼 만할 것이다.


춘정 변계량(1369~1430)의 비문으로 태종 이방원(1367∼1422)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한 태종 헌릉 신도비(太宗 獻陵 神道碑, 보물 제1805호)가 웅대하다. SBS 퓨전사극 ‘육룡이 나르샤’에서의 카리스마가 발산되는 듯하다.
현재 청량리에 위치한 세종의 신도비를 마지막으로 이후 왕릉에서는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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