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1년 이른바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전라감영에 이송된 윤지충(바오로)·권상연(야고보)가 참수치명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순교터가 지척인 곳…
명동성당을 설계한 바 있는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통감부에 의해 헐려나간 풍남문 성벽의 돌들을 가져다 주춧돌 삼아 1914년 완공한 전동성당은 호남지역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꼽힌다.
비잔틴 양식의 종머리와 격식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이 어우러지고, 아치형 천장과 밝은 조명이 신비로움과 경건함을 더해 주는 전동성당은 한복을 차려입은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공양왕 원년(1388) 전라관찰사 최유경에 의해 축성된 풍남문(豊南門·보물 제308호)은 정유재란으로 파괴된 후 영조 대에 관찰사 조현명·홍낙인이 재건하였으나, 신작로를 내겠다는 일제에 의해 헐리고 원형이 훼손된 것을 70년대에 복원한 것이다.
현판은 한고조 유방의 고향 풍패(豊沛)로부터 비롯된 이름으로 ‘풍(豊)’자는 왕조를 의미하는데, 전주부성의 풍남문(豊南門)과 화성행궁의 신풍루(新豊樓)는 각기 조선왕조의 세거지와 재출발의 거점을 뜻한다고 할 수 있겠다.
풍남문은 정면3칸·측면3칸의 1층에 정면3칸·측면1칸의 2층 팔작지붕 주심포 양식인데 반달모양의 옹성까지 갖췄다. 문루 1층 안쪽의 기둥을 그대로 2층까지 이어올린 건축기법은 우리나라 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독특한 방식이다.
1894년에는 관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여 전주부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의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깃발이 풍남문 문루에 나부꼈을 것이다.
호남제일문 풍남문 광장 좌편에도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과 같은 형상의 소녀상이 있다. 영화 ‘귀향’의 장면들이 생각나 마음이 아프다. 역사란 단순히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까지 깊은 연관을 맺는 것임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객사(客舍)란 고려 이후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관사 또는 객관으로 사신이 내왕할 때 묵던 숙소를 말함이니 전주에만 객사가 있던 것이 아니다. 2010년 문화재청은 전주객사(全州客舍·보물 583호)의 이름을 풍패지관(豊沛之館)으로 변경하였는데, 사대(事大)의 냄새가 풍기는 건 왜일까. 현판은 성균관의 명륜당(明倫堂) 판액을 썼던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의 글씨이다. 전주시는 풍남동 풍남문에서 중앙동 전주객사에 이르는 옛 전라감영 주변 500여 미터 공간에 역사문화의 거리를 조성한다고 한다.
오동나무(梧木)가 많다 하여 오목대(梧木臺)라는 이름이 붙은 곳. 경기전(慶基殿) 동남쪽으로 500m 떨어진 언덕에 위치하여 한옥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우왕 6년(1380년) 삼도도순찰사 이성계가 삼도도체찰사 변안열 등과 연합하여 남원 운봉에서 왜적을 섬멸한 황산대첩 직후 귀경하는 길에 종친들을 불러 모아 승전잔치를 벌이고 한고조의 ‘대풍가(大風歌)’를 부르면서 새 왕조 창건에 대한 의지를 은근히 내비쳤던 곳이다. 대한제국 광무(光武) 4년(고종37·1900)에 고종이 태조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라는 뜻의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蹕遺址)’라는 친필로 비석을 세웠다.
오목대 건너 70m 위쪽에는 이성계의 고조부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의 태생지인 이목대(梨木臺)가 있다.
공민왕 3년에 창건됐다는 전주향교(全州鄕校)는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향교 중 하나로, 평지에 입지해 있어 대성전이 명륜당 앞쪽에 배치된 전묘후학(前廟後學)의 공간구조를 갖고 있다. 특히 유교 5대 성인(공자·안자·자사·증자·맹자) 부친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계성사(啓聖祠)로 유명한 곳이다.
승암산 줄기의 혈자리 명당 한벽당(寒碧堂)은 1404년 직제학을 지낸 월당 최담(崔霮)이 낙향하여 세운 누각으로, 500년간 전주 선비들의 풍류를 담아왔던 곳이라고.
1931년 10월 일제가 승암산(僧岩山)의 정기를 자르고 전주-남원 간 전라선을 개통하면서 뚫은 한벽굴은 역사의 아픔이 고스란이 남아있는 현장이다.
명동성당을 설계한 바 있는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통감부에 의해 헐려나간 풍남문 성벽의 돌들을 가져다 주춧돌 삼아 1914년 완공한 전동성당은 호남지역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꼽힌다.
비잔틴 양식의 종머리와 격식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이 어우러지고, 아치형 천장과 밝은 조명이 신비로움과 경건함을 더해 주는 전동성당은 한복을 차려입은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공양왕 원년(1388) 전라관찰사 최유경에 의해 축성된 풍남문(豊南門·보물 제308호)은 정유재란으로 파괴된 후 영조 대에 관찰사 조현명·홍낙인이 재건하였으나, 신작로를 내겠다는 일제에 의해 헐리고 원형이 훼손된 것을 70년대에 복원한 것이다.
현판은 한고조 유방의 고향 풍패(豊沛)로부터 비롯된 이름으로 ‘풍(豊)’자는 왕조를 의미하는데, 전주부성의 풍남문(豊南門)과 화성행궁의 신풍루(新豊樓)는 각기 조선왕조의 세거지와 재출발의 거점을 뜻한다고 할 수 있겠다.
풍남문은 정면3칸·측면3칸의 1층에 정면3칸·측면1칸의 2층 팔작지붕 주심포 양식인데 반달모양의 옹성까지 갖췄다. 문루 1층 안쪽의 기둥을 그대로 2층까지 이어올린 건축기법은 우리나라 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독특한 방식이다.
1894년에는 관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여 전주부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의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깃발이 풍남문 문루에 나부꼈을 것이다.
호남제일문 풍남문 광장 좌편에도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과 같은 형상의 소녀상이 있다. 영화 ‘귀향’의 장면들이 생각나 마음이 아프다. 역사란 단순히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까지 깊은 연관을 맺는 것임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객사(客舍)란 고려 이후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관사 또는 객관으로 사신이 내왕할 때 묵던 숙소를 말함이니 전주에만 객사가 있던 것이 아니다. 2010년 문화재청은 전주객사(全州客舍·보물 583호)의 이름을 풍패지관(豊沛之館)으로 변경하였는데, 사대(事大)의 냄새가 풍기는 건 왜일까. 현판은 성균관의 명륜당(明倫堂) 판액을 썼던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의 글씨이다. 전주시는 풍남동 풍남문에서 중앙동 전주객사에 이르는 옛 전라감영 주변 500여 미터 공간에 역사문화의 거리를 조성한다고 한다.
오동나무(梧木)가 많다 하여 오목대(梧木臺)라는 이름이 붙은 곳. 경기전(慶基殿) 동남쪽으로 500m 떨어진 언덕에 위치하여 한옥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우왕 6년(1380년) 삼도도순찰사 이성계가 삼도도체찰사 변안열 등과 연합하여 남원 운봉에서 왜적을 섬멸한 황산대첩 직후 귀경하는 길에 종친들을 불러 모아 승전잔치를 벌이고 한고조의 ‘대풍가(大風歌)’를 부르면서 새 왕조 창건에 대한 의지를 은근히 내비쳤던 곳이다. 대한제국 광무(光武) 4년(고종37·1900)에 고종이 태조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라는 뜻의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蹕遺址)’라는 친필로 비석을 세웠다.
오목대 건너 70m 위쪽에는 이성계의 고조부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의 태생지인 이목대(梨木臺)가 있다.
공민왕 3년에 창건됐다는 전주향교(全州鄕校)는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향교 중 하나로, 평지에 입지해 있어 대성전이 명륜당 앞쪽에 배치된 전묘후학(前廟後學)의 공간구조를 갖고 있다. 특히 유교 5대 성인(공자·안자·자사·증자·맹자) 부친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계성사(啓聖祠)로 유명한 곳이다.
승암산 줄기의 혈자리 명당 한벽당(寒碧堂)은 1404년 직제학을 지낸 월당 최담(崔霮)이 낙향하여 세운 누각으로, 500년간 전주 선비들의 풍류를 담아왔던 곳이라고.
1931년 10월 일제가 승암산(僧岩山)의 정기를 자르고 전주-남원 간 전라선을 개통하면서 뚫은 한벽굴은 역사의 아픔이 고스란이 남아있는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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