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26일 목요일

애국으로 승화된 신심

안중근(1879~1910) 의사의 부친 안태훈(1862~1905)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동학군으로부터 노획한 5백 석 가량의 양곡을 군량미로 전용한 것이 문제가 되어 조정이 간여하자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상경, 명동성당으로 피신하여 1년을 지냈다. 프랑스인 신부의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1년 뒤인 1895년 천주교에 입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천주교 관련 서적을 가지고 귀향(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하여 전교활동을 펼친다.
안중근(토마스) 역시 독실한 천주교도였다. 그의 신심은 개인적 구원에 그치지 않고 민족구원과 동양평화 사상으로 승화하여 독립전쟁과 하얼빈 의거로 표출되었다. 뤼순감옥 수감 중에는 그에게 영세를 주었던 빌렘(Joseph Wilhelm, 홍석구) 신부가 성사를 베풀기도 했으나, 당시 한국 천주교회 최고위 성직자인 뮈텔 주교는 의거가 일어난 1909년 10월 26일 저녁에 조선통감부를 방문하여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죽음에 조의를 표했다. 더하여 그의 의거를 살인행위로, 그를 단순 살인자로 규정하면서 그가 천주교 신자인 사실을 부인하기까지 했다. 1993년에 이르러서야 안중근 도마는 김수환 추기경에 의해 평신도로 복권되고 의거의 정당성을 재평가받게 된다.


2009년 ‘TV쇼 진품명품’(739회)에 삼중스님이 들고나온 안의사의 유묵 경천 敬天…
뤼순 감옥에서 사형집행을 앞두고 쓴 날카로움과 부드러움이 조화를 이룬 독창적인 글씨체가 돋보인다. 당시 김영복 고서 감정위원은 전시회 보험가액을 참고하여 최종 감정가를 6억원으로 책정했다면서, 실제 가격은 100억이든 1000억이든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중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글씨 자체의 미학보다는 글쓴이 말년의 고매한 절개가 가장 중요한 감정 포인트가 된다는 멘트도 기억난다. 안의사의 하늘은 천주이자 조국이었을 것이다. 어찌 한낱 테러리스트로 폄하할 수 있을까.

2015년 3월 26일 오늘은 대한의군 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안중근 의사께서 순국하신지 105주기 되는 날이다. 못난 후손들은 매번 안배진삼(安倍晋三)류에 놀아나며, 아직 그분의 유해조차 찾질 못하고 있다. 진정 애통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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