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3일(토), 을미년 새해 첫 씨알순례길 답사지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최고 사당(shrine) 종묘(宗廟)… 종묘광장 정비공사로 외대문(外大門) 앞 일대는 꽤나 불편하고 번거로왔다.
새 왕조를 연 이성계와 건국세력은 곧바로 천도(遷都)를 추진하여 전조후시 좌묘우사(前朝後市 左廟右社), 제후칠괘(諸侯七軌)의 주례 고공기(周禮考工記) 원리에 따라 도성을 계획하였다. 고려왕조의 왕씨 조상귀신들이 차지한 자리(개경의 종묘)에 새 왕조의 이씨 귀신들을 함께 모시는 것은 심히 껄끄러운 일이었기에 한양에 새 종묘를 조성하여 1395년(태조 4년)에 경복궁보다 먼저 완공했다.
사적 제125호 종묘는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그 가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Convention Concerning the Protection of the World Cultural and Natural Heritage)에 의거하여 1995년 12월 9일 유네스코에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세계유산이란 당해 문화재가 세계적으로 특출하고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인류 전체의 이익을 위해 보호되어야 할 유산을 말한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늘의 원은 신의 도형이고 땅의 방은 사람의 도형으로 위계가 설정되었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에 따라 종묘의 연못은 방형(方形)으로 조성되었고 그 중앙에 원형(圓形)의 석단(石壇)을 쌓아 향나무를 심었다.
팔작지붕의 망묘루(望廟樓) 우측에는 고려 제31대 공민왕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을 모신 고려공민왕영정봉안지당(高麗恭愍王影幀奉安之堂)이 있다. 공민왕이 친히 그렸다고 전하는 말 그림도 사당 안에 있다. 왕조의 뿌리와 정통성을 상징하는 종묘에 전 왕조의 왕을 모신 이유는 뭘까. 아마도 새 왕조에 대한 민심이반(民心離反)을 잠재우기 위함이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마포구 창전동 광흥창지(廣興倉地) 일대에도 공민왕 사당(恭愍王祠堂)이 있다.(등록문화재 제 231호)
종묘 일간도(宗廟一間圖)는 종묘의궤에 수록되어 있는 신실 한 칸의 배치도이다. 신주를 모신 신주장(神主欌)을 중심으로 서쪽에 책장, 동쪽에 보장이 있다. 신주장 앞의 신탑에는 궤가 놓여 있고 그 앞에 제상과 좌우에 봉선과 황개가 놓여있다.
왕조가 이어져 봉안해야 할 신위(神位 위패)가 늘어남에 따라 몇 차례 건물을 옆으로 증축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왕이나 왕비가 승하하면 궁궐에서 3년상을 치른 후에 그 신주를 종묘로 옮겨 모신다. 정전(正殿)에는 공덕이 뛰어난 임금들을 모셨고, 영녕전(永寧殿)에는 태조의 4대조와 사후에 왕으로 추존되었거나 정전에서 신주를 옮겨온 임금들을 모셨다. 정전의 신실 19칸에는 태조를 비롯한 왕과 왕비의 신위 49위를, 영녕전의 신실 16칸에는 신위 34위를 모셔 두었다.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위는 종묘에 모시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종묘를 재건한 군왕은 광해군이지만 정작 자신의 신주는 모셔지지 못했다.
총 35칸 = 25칸(연산군·광해군 제외) + 9칸(추존왕: 목조·익조·도조·환조ㆍ덕종ㆍ원종ㆍ진종ㆍ장조ㆍ문조) + 1칸(영친왕)
종묘제례(宗廟祭禮)는 국가의 가장 큰 제사로서 정전에서 1년에 5번, 영년전에서는 1년에 2번 열렸으며 왕이 친히 주관했다. 종묘제례에는 왕세자와 문무백관(文武百官)이 참여하였으며, 음악(樂)·노래(歌)·춤(舞)이 일체화한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에 맞추어 진행됐다.
현재 종묘제례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행하고 있다. 제사 외에도 종묘에서는 국가의 중요한 일을 알리거나 기원하는 의식을 행하기도 했다. 종묘의 모든 건물은 장식과 기교를 배재하여 단순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단순함 속에서 삶과 죽음의 깊은 의미를, 엄숙함 속에서 왕조의 신성한 권위를 읽을 수 있다. 중국이나 베트남과 달리 한국의 종묘는 건축물과 더불어 제례와 제례악의 본모습을 그대로 보존하여 실현하고 있는 유일한 곳이다. 종묘는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은 2001년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등재되었다.
우리나라 목조건축물 중 가장 긴 건물인 종묘정전(국보 제227호)은 동서 109m, 남북 69m의 넓은 월대 위에 맞배지붕을 올려 조선시대 건축물 가운데 가장 절제되고 장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19실의 중앙인 현종대왕을 모신 10실까지는 배흘림기둥으로, 이후부터는 민흘림기둥으로 왕조의 영속성을 지탱하고 있다. 배흘림기둥은 기둥 높이의 1/3정도에서 가장 굵어졌다가 다시 차츰 가늘어지는 기둥(배나온 아저씨)이고, 민흘림기둥은 기둥 위에서 아래로 내려올수록 굵어지는 모양의 기둥(치마입은 여인)으로 둘 다 육중한 지붕을 무리없이 떠받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어 시각적 안정감을 주는 효과가 있는 듯하다.
정전 옆 악공청(樂工廳)을 둘러보다가 기둥의 모양이 사각에서 원에 이르는 여러 도형들로 구성된 것을 발견했다. 뭔가 이유가 있을 듯한데 관련된 안내문은 찾아볼 수 없었다.
종묘 답사 후에는 유영모(1890~1981), 함석헌(1901~1989) 선생의 씨알사상을 지향하는 씨알재단의 신년하례식에도 참석하여 새해 포부를 나누었다.
새 왕조를 연 이성계와 건국세력은 곧바로 천도(遷都)를 추진하여 전조후시 좌묘우사(前朝後市 左廟右社), 제후칠괘(諸侯七軌)의 주례 고공기(周禮考工記) 원리에 따라 도성을 계획하였다. 고려왕조의 왕씨 조상귀신들이 차지한 자리(개경의 종묘)에 새 왕조의 이씨 귀신들을 함께 모시는 것은 심히 껄끄러운 일이었기에 한양에 새 종묘를 조성하여 1395년(태조 4년)에 경복궁보다 먼저 완공했다.
사적 제125호 종묘는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그 가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Convention Concerning the Protection of the World Cultural and Natural Heritage)에 의거하여 1995년 12월 9일 유네스코에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세계유산이란 당해 문화재가 세계적으로 특출하고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인류 전체의 이익을 위해 보호되어야 할 유산을 말한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늘의 원은 신의 도형이고 땅의 방은 사람의 도형으로 위계가 설정되었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에 따라 종묘의 연못은 방형(方形)으로 조성되었고 그 중앙에 원형(圓形)의 석단(石壇)을 쌓아 향나무를 심었다.
팔작지붕의 망묘루(望廟樓) 우측에는 고려 제31대 공민왕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을 모신 고려공민왕영정봉안지당(高麗恭愍王影幀奉安之堂)이 있다. 공민왕이 친히 그렸다고 전하는 말 그림도 사당 안에 있다. 왕조의 뿌리와 정통성을 상징하는 종묘에 전 왕조의 왕을 모신 이유는 뭘까. 아마도 새 왕조에 대한 민심이반(民心離反)을 잠재우기 위함이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마포구 창전동 광흥창지(廣興倉地) 일대에도 공민왕 사당(恭愍王祠堂)이 있다.(등록문화재 제 231호)
종묘 일간도(宗廟一間圖)는 종묘의궤에 수록되어 있는 신실 한 칸의 배치도이다. 신주를 모신 신주장(神主欌)을 중심으로 서쪽에 책장, 동쪽에 보장이 있다. 신주장 앞의 신탑에는 궤가 놓여 있고 그 앞에 제상과 좌우에 봉선과 황개가 놓여있다.
왕조가 이어져 봉안해야 할 신위(神位 위패)가 늘어남에 따라 몇 차례 건물을 옆으로 증축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왕이나 왕비가 승하하면 궁궐에서 3년상을 치른 후에 그 신주를 종묘로 옮겨 모신다. 정전(正殿)에는 공덕이 뛰어난 임금들을 모셨고, 영녕전(永寧殿)에는 태조의 4대조와 사후에 왕으로 추존되었거나 정전에서 신주를 옮겨온 임금들을 모셨다. 정전의 신실 19칸에는 태조를 비롯한 왕과 왕비의 신위 49위를, 영녕전의 신실 16칸에는 신위 34위를 모셔 두었다.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위는 종묘에 모시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종묘를 재건한 군왕은 광해군이지만 정작 자신의 신주는 모셔지지 못했다.
총 35칸 = 25칸(연산군·광해군 제외) + 9칸(추존왕: 목조·익조·도조·환조ㆍ덕종ㆍ원종ㆍ진종ㆍ장조ㆍ문조) + 1칸(영친왕)
종묘제례(宗廟祭禮)는 국가의 가장 큰 제사로서 정전에서 1년에 5번, 영년전에서는 1년에 2번 열렸으며 왕이 친히 주관했다. 종묘제례에는 왕세자와 문무백관(文武百官)이 참여하였으며, 음악(樂)·노래(歌)·춤(舞)이 일체화한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에 맞추어 진행됐다.
현재 종묘제례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행하고 있다. 제사 외에도 종묘에서는 국가의 중요한 일을 알리거나 기원하는 의식을 행하기도 했다. 종묘의 모든 건물은 장식과 기교를 배재하여 단순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단순함 속에서 삶과 죽음의 깊은 의미를, 엄숙함 속에서 왕조의 신성한 권위를 읽을 수 있다. 중국이나 베트남과 달리 한국의 종묘는 건축물과 더불어 제례와 제례악의 본모습을 그대로 보존하여 실현하고 있는 유일한 곳이다. 종묘는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은 2001년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등재되었다.
우리나라 목조건축물 중 가장 긴 건물인 종묘정전(국보 제227호)은 동서 109m, 남북 69m의 넓은 월대 위에 맞배지붕을 올려 조선시대 건축물 가운데 가장 절제되고 장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19실의 중앙인 현종대왕을 모신 10실까지는 배흘림기둥으로, 이후부터는 민흘림기둥으로 왕조의 영속성을 지탱하고 있다. 배흘림기둥은 기둥 높이의 1/3정도에서 가장 굵어졌다가 다시 차츰 가늘어지는 기둥(배나온 아저씨)이고, 민흘림기둥은 기둥 위에서 아래로 내려올수록 굵어지는 모양의 기둥(치마입은 여인)으로 둘 다 육중한 지붕을 무리없이 떠받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어 시각적 안정감을 주는 효과가 있는 듯하다.
정전 옆 악공청(樂工廳)을 둘러보다가 기둥의 모양이 사각에서 원에 이르는 여러 도형들로 구성된 것을 발견했다. 뭔가 이유가 있을 듯한데 관련된 안내문은 찾아볼 수 없었다.
종묘 답사 후에는 유영모(1890~1981), 함석헌(1901~1989) 선생의 씨알사상을 지향하는 씨알재단의 신년하례식에도 참석하여 새해 포부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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