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20일 일요일

강재 신숙 선생 묘소 참배

몽양 선생님 67주기 추모식을 마치고, 북한산 둘레길 2구간 순례길을 따라 30여분 도보하여 강재 신숙(剛齋 申肅) 선생님 묘역에 도착, 참배.
본명은 연길(連吉)이고, 12세에 태봉(泰鳳), 21세 때 태련(泰鍊)으로 바꾸었다. 신숙이란 이름은 1920년 35세의 나이로 중국으로 망명할 때부터 사용했다. 호는 강재(剛齋)·시정(是丁)·치정(癡丁) 등을 사용하였다.



가평이 낳은 위대한 독립운동가 신숙(1885.12.29~1967.11.22) 선생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렸다. 12세에 이규봉(李圭鳳)에게 한학을 배웠으며, 19세가 되던 1903년 4월 강원도 양구 의병장 최도환(崔道煥)의 차녀 최백경(崔百卿)과 혼인하였다. 이해 동학운동에 투신하였고, 3·1혁명 시에는 「기미독립선언서」를 교정·인쇄하여 각지에 배포하였다. 임시정부 시절에는 외교노선에 반대하고 무장투쟁노선을 주장하여, 창조파의 주요이론가로 활동하였다. 1928년 1월 신민부(新民府)의 민정위원이 되어 3부(신민부·정의부·참의부) 통합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32년 쌍성보 전투에 한국독립군의 참모장으로 참전하였다. 1935년 노모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만주로 가다가 일경에 피체, 옥고를 치르다가 이듬해 보석으로 석방되어 일제의 감시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해방 후에는 한인동포들의 신변안전과 귀국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 1947년 6월 좌우합작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48년 4월에는 김구·김규식과 함께 남북협상을 위하여 평양에 다녀오는 등 남북분단을 막고 통일조국을 세우기 위해 진력하였다. 1960년 4·19혁명 직후에는 국민각계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었고, 과도내각 때 실시된 7·29총선에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에도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 정착에 힘쓰다가 중풍으로 쓰러져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967년 11월 22일 가회동 자택에서 83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서훈했다. 천도교 요직을 역임했으며, 저서로 「나의 일생」이 있다.


제수는 김진숙·김삼희 선생님이 애써주셨고, 신동현·최윤배·박종락·이미정·정선옥·김익완·변자형과 삼희쌤의 아바타 최다은 학생이 동행했다.



강재 선생은 민본정치(民本政治) 실현, 노본경제(勞本經濟) 건설, 인본문화(人本文化) 창달(暢達)이라는 삼본주의를 제창하였다. 오랫만에 손주(신현건)가 올리는 술잔을 받고 좋아하셨을 것이다.

댓글 1개:

  1. 선생님 혹시
    여기 대표 분의 연락처를 받고 싶습니다.
    taiji6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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