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24일 토요일

용산 답사

오전 10시, 숭례문 앞에서 시작하여 조선통신사의 길을 따라 후암동을 거쳐 경리단길을 탐방했다.


조선통신사는 일반적으로 임진왜란 이후인 1607년(선조 40년)부터 1811년(순조 11년)까지 조선 국왕이 일본 막부 쇼군에게 보낸 12차례의 외교사절을 일컫는다. 국내노정만 해도 한양 숭례문을 출발하여 부산까지 약 20일 동안 440㎞ 거리를 가야하는 대장정이었다.
사진은 숭례문관리소 인근에서 확인한 ‘조선통신사의 길’ 표석이다.


밀레니엄 서울 힐튼호텔에서 필립스코리아 T타워쪽을 조망하면 힐튼호텔과 CJ빌딩 사이에 공터가 보이는데, 이곳이 서울 최초의 관우 사당인 남묘(南廟)가 있던 곳이다. 지금은 국립현충원 사당동 인근으로 옮겨가 있다.


브라운스톤 남산아파트는 옛 특경대(1953), 옛 국방부(1953), 옛 병무청(1970) 자리였다고 한다.


후암시장 안쪽에 낡았지만 특이한 주택이 있어 앵글에 담아봤다. 일본식과 서양식이 혼재된 양식으로 보인다.


후암동 396번지는 의열단원 김상옥(1890.1.5~1923.1.22)의 매부 고봉근이 살던 곳이다. 1923년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에 투척된 폭탄으로 타격을 입은 일경은 5일 후 金相玉의 은신처를 추적하여 포위망을 좁혀왔다. 김상옥이 쌍권총을 들고 반격하여 일본 순사를 사살한 곳이 후암동 304번지이다. 그는 눈 덮인 남산 줄기를 타고 왕십리 방면으로 피신하였다가 이후 효제동에 이르러 3시간 넘게 총격전을 벌이던 중 탄환이 떨어지자 자결, 순국하였다.


아동양육시설인 영락보린원(후암로4길 70)이 들어선 자리는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있었기에 조선시대에 전생서가 설치되어 국가제사용 가축을 길렀다. 영락보린원 입구에 전생서터(典牲暑址) 표석이 세워졌다.


후암로16가길은 옛 조선은행 사택지였다. 현재는 한국은행 직원공동숙소인 후암생활관으로 쓰이고 있다.


1919년 4월 1일 후암동 190번지 일대에 용산 인근의 일본거류민 자제를 위한 경성삼판공립심상소학교가 설립됐다. 해방 후인 1946년 4월 1일엔 삼판(三板)을 삼광(三光)으로 개칭하였다. 답사일 현재 운동장 등이 한창 공사중이었는데, 후문 쪽 진입로엔 특이하게도 현대문구, 삼광문구 2개의 문방구가 건재하다.
삼광초등학교 정문길을 사이에 두고 1920년 4월 경성공립고등여학교의 분교가 설치되었는데 1923년 경성제2공립고등여학교로 전환되어 일본인 중등교육을 담당하다가 해방 후인 1946년에 수도여자중학교로 개칭되었다. 1951년에 수도여고·수도여중으로 분리된 후 2000년에 신대방동으로 이전하여 비어 있던 자리에 2008년 서울교육청 시설관리사업본부가 들어왔다. 삼광초와 수도여고 인근은 적산가옥(敵産家屋)으로 추정되는 일본식 주택이 더러 보인다.


용산고 정문 앞의 이태원 터(梨泰院址) 표석은 그 위치가 잘못됐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1906년 용산에 주둔하고 경성위수병원을 세우는 과정에서 이태원 주변의 마을 사람들을 보광동 등으로 강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이 맞다면 최소 1㎞ 정도 격차가 있게 된다.


1918년 4월 개교한 용산중학교는 경성중학교와 더불어 서울지역의 일본인 남학교였다가 일제 패망 후 한국인 학교로 재탄생하였다.


용산고 맞은편 호달짬뽕집 인근(萬樹園 터?)에 있는 주자창은 지붕이 특이하여 앵글에 담아봤다.


우리은행 후암동지점 앞 삼거리 비탈길을 올라가는 돌계단은 그 위쪽의 해방촌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로 유명하다. 108하늘계단으로 불리는 이 계단은 일제 말기에 조성된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로 향하는 표참도(表参道)인데, 현재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기 위해 한창 공사중이다. 주민 편익은 상승하겠지만 그로 인해 역사는 깨어진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