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1일 수요일

섣달 씨순길… 동대문 낙산길

12월 씨순길은 동대문역 ①번출구에서 집결하여 낙산성곽길을 오르고 혜화동을 경유하여 성균관대학교를 통과하는 일정이다. 전날까지 기승을 부리던 중국발 미세먼지의 농도가 약해져 걷기에 큰 무리가 없었다.

거유(巨儒) 정도전은 역법의 팔괘를 구현하여 도성의 팔문을 만들었는데, 특히 인간의 근본 도리인 오상(五常)을 사대문의 이름으로 삼았다. 한양의 동대문을 흥문(興門), 서대문을 돈문(敦門), 남대문을 숭문(崇門), 북문을 홍문(弘門)이라 했다. 북대문은 실질적인 문의 역할을 하지 않았기에 북서쪽에 있는 현재의 상명대학교 앞쪽 문에 ‘지(智)’를 넣어 홍지문(弘智門)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후 고종 연간에 보각(普閣)이 재건되어 인의예지신 동서남북중의 유교적 방위 개념이 완성되었다.

흥인문에서의 ‘仁’은 오행(金木水火土)에서 木에 해당하고 木은 東에 해당하므로 흥인은 곧 동방이라는 뜻이다. 헌데, 동쪽의 산세가 낮고 허술했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 실제로는 산을 높게 만들어야 하지만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세조 때 ‘지(之)’라는 글자를 더하여 이를 대신하고자 하였다. ‘지(之)’ 또는 ‘현(玄)’자는 풍수에서 용이 걸어오는 모습, 즉 산맥의 모양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또한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甕城: 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둘러 축조한 성문을 방어하기 위한 성)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1592년 임진왜란 때 조선군이 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바람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무혈입성이 가능했다.

저 동대문밖 너른 들에는 목장이 있었을 것이고, 동대문 맞은편 길가에는 윤오영씨를 애태우던 방망이를 깍아 파는 노인이 앉아있었을 것이다.


동대문성곽길 초입의 동대문교회는 당초 경기도 광교 신도시에 부지를 마련해 새 예배당을 신축하여 이전할 계획이었으나, 감리교 유지재단이 교회 역사성 보존을 이유로 이전을 반대하면서 동대문교회와 감리교단 간 재산권 소송이 발생해 교회 이전이 진행되지 못했다. 이에 서울시가 명도소송을 제기해 지난 10월 판결에서 승소하였고, 동대문교회는 광교부지에 새 예배당을 신축할 때까지 우선 연지동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으로 이전하여 목회 활동을 한다고 한다.



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에 비해 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은 산세가 허약하다. 산 모양이 낙타의 등과 같아 낙타산이라고도 하는 낙산은 대학로 뒷편에서 서울디자인지원센터(구 이화대학병원), 즉 동대문 근처에 와서 슬그머니 그 꼬리를 감추어 버리고 만다. 아래 사진은 최근 임주환·강소라 주연의 SBS 드라마 「못난이 주의보」에 자주 등장하던 곳이다.




태조 연간 도성을 축조할 때 동북쪽의 소문을 홍화문(弘化門)이라 했으나, 중종 때 혜화문(惠化門)으로 개칭하고, 순조 때 중수, 고종 때 보수하였다가 1928년에 문루를 헐고 석문만 남겨 두었는데 그 후 전차를 부설하면서 석문마저 철거되었다. 1994년에 복원된 혜화문은 위치도 다르고, 모양도 엇비슷하게만 만들었다.
도로변과 주택가 전봇대 등에 무질서하게 난립하여 도시미관을 해치는 불량공중선 좀 정비해주면 좋으련만. 도로처럼 공중선에도 점용료를 부과하면 어떨까 싶다.


서울문묘와 성균관(사적 제143호)은 조선시대의 국가 통치이념인 유교적 세계관과 관련된 곳으로서, 孔子(B.C 551~B.C 479)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의 훌륭한 유학자들의 제사를 지내고 인재들을 길러내는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1398년(태조 7)에 처음 지었고, 이후 여러 번 고쳐 지었다. 1869년(고종 6)에 크게 수리를 했는데 그 모습이 현재 남아 있다.
문묘(文廟)는 공자의 사당이고, 성균관(成均館)은 교육기관인데 이 둘을 묶어서 문묘 혹은 성균관이라 하였다. 지방에 있는 공자의 사당과 중등교육 시설은 문묘 혹은 향교(鄕校)라 하였다.
삼문과 담장으로 둘러싸인 문묘의 제사 공간은 대성전 앞으로 동무와 서무가 마주보고 있다. 교육 공간에는 수업하는 장소인 명륜당을 중심으로,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도서관이었던 존경각, 지원 시설인 양현고 등이 있다. 서울 문묘와 성균관은 검소하고 소박하면서도 질서 있게 구성되어 있다.
이곳에서 매년 행해지는 석전제(釋奠祭)는 귀중한 무형 문화유산으로 매우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동재(東齋)·서재(西齋)는 명륜당 동서로 있는 장방형 구조의 유생들의 기숙사였다. 사진으로 봐서는 온돌이 없는 마루방으로 보이는데 한기를 어찌 견디어 내었을지 궁금해진다.


존경각(尊經閣)은 경전을 보관하는 도서관이고, 육일각(六一閣)은 육례(六禮) 중 하나인 궁술을 익히기 위한 활과 화살을 보관하던 곳이다.


문묘(文廟)를 관리하던 남자 하인들이 거처하던 대학당(戴學堂)·수복청(守僕廳) 앞의 주목나무가 이채롭다. 반면 금녀의 구역인 성균관에서 유생들의 식사를 담당하던 여자 하인들의 거처는 비복청(婢僕廳)이라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성묘(聖廟: 공자를 모시는 묘)의 뒷쪽에는 반드시 은행나무를 심었고 이것을 행단(杏壇)이라고 했다. 이는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데서 유래하는 듯 하다. 천연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된 수령 약 500년의 서울문묘 은행나무들은 1519년(중종 14)에 대사성을 지낸 윤탁(尹倬)이 심었다고 전한다. 대개 은행나무는 암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지만 이 나무는 수나무다. 나무의 가슴높이 부분에 60㎝ 정도 되는 3개의 유주(호흡작용을 도와주는 줄기)가 있는데 이것은 나무가 나이를 많이 먹었을 때 생긴다. 예로부터 은행나무는 절이나 향교, 문묘, 사단, 경승지 등에 널리 심었다. 은행나무는 지정 보호수 가운데 느티나무 다음으로 개체 수가 많다.
성균관대학교의 교목도 은행나무고, 심볼마크도 은행잎을 형상화한 것이다.


보물 제141호 대성전(大成殿)은 공자(문선왕)와 4성(聖: 안자·증자·자사자·맹자), 10철(哲: 안회·민자건·염백우·중궁·재아·자공·염유·자로·자유·자하), 송조육현(宋朝六賢: 주돈이·정이·장재·정호·소옹·주희), 우리나라 동국 18현(賢: 설총·최치원·안향·정몽주·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김인후·이이·성혼·김장생·조헌·김집·송시열·송준길·박세채)의 위패가 동서로 위차봉안(位次奉安)되어 있는 20간의 다포식 전각으로 1년에 2회 정기적으로 석전(釋奠)을 지낸다. 현판은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의 친필(親筆)이다.


명륜당(明倫堂)은 대성전 뒤에 있는 강학(講學) 장소로 중앙에 본당, 좌우에 협실(夾室)이 있으며 총 18간이다. 현판 글씨는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썼다는데, 내 눈에는 석봉의 글씨가 훨씬 힘있어 보인다.


날짐승이 앉지 못하게 하려고 전각(殿閣)의 처마밑을 싸서 치는 철망을 부시(罘罳)라고 하는데, 대성전과 명륜당 현판 등은 모두 부시 속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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