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흥! 너두 벨수가 없었던 모양이로구나? 그러게 내 뭐라던? ……내남직할 것 없이 입찬소리란 못하는 법이다……
흥! 하고 또 한 번 코웃음을 치고, 문득 고개를 들자, 그곳 머리맡 벽에 가 걸려 있는 십자가가 눈에 띈다. 영이는 입을 한 번 실룩거리고 중얼거렸다.
“이 거룩한 밤에 주여! 바라옵건대 길을 잃은 양들에게도 안식을 주옵소서. 아아멘. ……흥?”
이렇게 기도를 드려두면 순이도 꿈자리가 사납다거나 그런 일은 없을 게다……
―― 흥! (박태원, ‘성탄제(聖誕祭)’, 1937년 12월 「여성」 21호)
1930년대 식민지 경성, 남달리 사이가 나쁜 네 살 터울의 자매가 있다. 카페 여급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다가 사생아를 낳고 집안에 들어앉은 언니 영이와, 언니 덕에 여학교에 다니면서도 뭇 사내들에게 시달리며 웃음이나 파는 언니를 경멸하고 여배우가 되겠다며 학교를 자퇴하는 동생 순이의 딱한 이야기.
크리스마스라고 교회당에 간다며 초저녁에 나간 순이는 자정이 넘어 언젠가의 영이처럼 남자를 끌고 집에 들어왔다. 눈치를 챈 영이는 순이와 함께 쓰던 건넌방을 내주고 안방으로 들어가 드러누운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부모는 지금 건넌방에서 순이의 몸 위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고 있겠지만 이미 놀라지도 슬퍼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인생이란 것이냐?” 영이는 동생마저 자기와 같은 신세로 전락하는 현실이 서러워 눈물을 흘렸다. 영이는 머리맡 십자가를 보며 기도한다. “이 거룩한 밤에 주여! 바라옵건대 길을 잃은 양들에게도 안식을 주옵소서, 아아멘” 이제 꿈자리가 사납지는 않을 터였다. 동생도, 자기도…
생존이 윤리를 내모는 궁핍한 시대, 가난한 사람들의 막막함에 몸이 으스스 추워진다. 성탄절날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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