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동두천시 지행동, 광암동, 보산동, 상봉암동 일대를 탐방했다.
지행역 인근 동두천생태평화갤러리 더꿈에서 파견작가들의 동두천역사문화공원추진을 위한 기금마련展 작품을 감상했다. 「숲은 어린 짐승들을 기른다」라는 전시 표제에서 얼마전 읽은 유키코 노리다케의 키큰이 책 「형제의 숲(Forêt des frères)」을 떠올렸다.
광암로17번길을 달려 턱거리마을로 이동했다. 캠프 호비 정문 왼편의 담벼락길에서 1971년 스스로 생을 마감한 한 여성의 묘 앞에 섰다. 비문은 글자가 흐릿하고 띄어쓰기도 이상한데 대략 이런 내용이다. 가독성을 위해 임의로 마침표를 넣어 보았다. “SOONJA REYNOLDS DIED 7 FEB 1971. MY LOVE REST IN PEACE AND THINK OF ME FOR. I AM THINKING OF YOU FOREVER. AND OUR HEARTS ARE JOINED TO GET HER. 박순자 가지 말아주오. 1971年 2月 9日.”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힘겨운 기지촌을 떠나 미군병사 레이놀즈와 함께 새로운 삶을 꿈꾸던 순자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한 군인의 애달픈 순애보가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마음을 적신다.
단일 궁궐로 보면 경복궁이 가장 규모가 크지만,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한 동궐의 면적은 북궐을 넘어선다. 순자묘소 앞 담장 너머는 430만평을 자랑하는 캠프호비(Camp Hovey)다. 인근의 캠프케이시(Camp Casey) 역시 430만평 규모로 이 둘을 합치면 무려 860만평이 된다. 미군의 해외 단일기지 가운데 세계 최대규모로 알려진 평택 캠프험프리스(Camp Humphreys)의 450만평 규모를 가뿐히 압도한다. 동두천시는 현재 시 전체 면적의 42%인 40.63㎢(1천2백3십만평)를 미군측에 공여하고 있다.
캠프호비 동편의 순자묘(광암동 산 92-8). 50여년 전의 사부곡(思婦曲) “순자 레이놀드 1971년 2월7일 사망하다. 내 사랑 평화롭게 쉬기를, 그리고 날 기억해 주오. 우리의 마음은 결합돼 있고 나는 영원히 당신을 생각하고 있으니, 박순자 가지 말아주오. 1971年 2月 9日.” |
길을 돌아 나와 쇠목교4거리에서 쇠목계곡으로 향했다. 산촌농원으로 들어가는 작은 삼거리에 ‘주한미군 공여지 반환운동 기념비’가 있다(광암동 87-7). 1996년 3월에 주한미군이 사유지에 어떤 협의나 동의도 없이 미8군 탱크사격장으로 사용하겠다며 과녁용 구형탱크를 밭에 가져다 놓았다. 이에 쇠목마을 주민과 동두천민주시민회의 격렬한 저항을 초래했고 결국 1998년 우리나라 최초로 600만평의 공여지를 반환받게 된다. 이를 계기로 전국의 주한미군기지가 있는 지역마다 공여지 반환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쇠목길을 따라 ‘쇠목마을 미군공여지 반환운동’ 당시 미군탱크의 마을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주민들이 쌓아 만든 몇 기의 돌탑(해원비)이 주욱 서 있다.
쇠목 공여지 반환기념비(동두천시 광암동 87-7). 이곳은 1996년 우리나라 주한미군공여지 반환운동의 시발점이다. 2005년 7월16일 세워진 기념비는 새의 등에 촛불이 올려진 형상이다. 불꽃의 세로글씨는 故신영복 교수의 쇠귀체. |
1992년 10월28일, 26세의 기지촌 여성이 미육군 제2보병사단 케네스 마클(Kenneth Lee Markle Ⅲ) 의무이병에게 무참하게 살해당한다. 윤금이의 죽음으로 미군범죄와 불평등한 사법처리 문제가 불거지며 사회일반의 인식전환을 가져오고 SOFA를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동력을 얻게 되었다. 2001년 4월, 결코 충분하지 않지만 살인, 강간, 유괴, 마약거래, 마약생산, 방화, 흉기휴대 강도, 폭행·상해 치사, 음주운전 치사, 뺑소니 등 12개 중대범죄를 저지른 미군 피의자의 신병인도 시점이 재판종료 후에서 기소시점으로 앞당겨진다는 내용을 포함한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개정이 이루어졌다.
30여 년 전 사건현장(보산동 431-50)은 현재 철공방이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사찰 아래에는 사하촌(寺下村)이나 절골, 사동(寺洞), 탑동(塔洞) 등이 번창하고, 향교나 서원 소재지에는 향교촌(鄕校村), 서원촌(書院村)이 들어서는 것이라면 軍기지 주변에 기지촌(基地村, military camp town)이 생활권을 형성하는 것은 지극히 기계적인 물리현상인지도 모르겠다. 미군뿐만 아니라 문무 신라와 연합했다는 정방 당군이나 선조 조선을 원조왔다는 天兵 명군처럼 어쩌면 이 땅에 외국군대가 주둔한 자리는 대개 그러했을 터. 일본군위안부만 생각해 오다가 대뜸 미군위안부라는 개념을 맞닥뜨린 충격이 크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동두천시 상봉암동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 쪽에서 바라본 옛 성병관리소. 본관 앞쪽에 감시용 초소가 보인다. |
소요산역 1번출구를 나와 ‘홍덕문 추모비’가 있는 5거리를 지나서 자유수호평화박물관으로 향하는 우측(남쪽) 도로를 올라가기 전에 철망 등으로 통행을 봉쇄한 곳을 만나게 된다. 구역 안쪽으로는 천막과 차양막 등으로 덮어놓은 건물이 보이는데 얼핏 봐서는 용도를 짐작할 수 없다. 이 수상한 건물의 이름은 옛 성병관리소다. 멀리서나마 정면으로 보기 위해선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 데크길을 이용해야 한다.
1965년 양주군 조례에 따라 동두천에 처음으로 설치된 성병관리소가 1973년 2,000평 부지의 현 위치로 이전하며 2층 막사가 세워졌다. 이 ‘언덕 위의 하얀 집’의 성격은 성병검진에서 양성판정을 받은 기지촌 여성들을 끌고와 감금하고 학대했던 ‘낙검자수용소’다. 미군들은 ‘Monkey House’로 불렀다는데, 다분히 동양인 폄하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과도한 페니실린 투여량으로 사망한 여성이 많았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1996년 3월 폐쇄된 이곳은 동두천시가 신한대학(구 신흥대학)으로부터 부지를 매입하면서 현재 철거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경기북부평화시민행동은 옛 성병관리소의 평화적 전환과 활용을 위한 아이디어를 공모하고 학계·문화계 전문가의 의견을 모아 근현대사의 비극을 기억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거꾸로 읽는 동두천사’ 전시연계 역사유적탐방 참가자들(2024.6.24. 오후 2~5시). 참 열정적인 사람들이다. |
김대용 대표님은 學자나 勝자, 官이 아닌 저항하고 기억하는 民에 의해서 역사가 진보한다고 믿고 있다. 기억되지 않은 일들은 일어나지 않은 일과 같으며 다시 반복된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우중에도 차량 운전을 해주신 고경환 선생님과 연대의 힘을 보여준 여러 작가분들께 고마움 전한다. 역사의 필연은 종종 우연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