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22일 수요일

이재명 의사의 그날

1909년 12월22일 오늘은 이재명 의사가 명동성당 앞에서 역적 3관왕 이완용을 처단하기 위해 의거한 날이다.

평안북도 선천 출신의 이재명(李在明, 1887~1910)은 평양 일신학교를 마친 뒤 1904년 미국 노동이민 모집에 응모해 하와이에서 농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1906년 3월에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안창호가 설립한 공립협회에 가입해 활동하던 그는 1907년 7월24일 한일신협약(제3차 한일협약, 정미 7조약)의 강제 체결소식을 접하고, 매국노를 처단한다는 공립협회의 결의에 따라 같은 해 10월 도쿄와 나가사키를 거쳐 귀국했다.

1909년 1월, 순종 황제의 서도(西道, 평안도) 순시에 동행하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초대 한국통감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동지들과 함께 평양역 부근에서 대기했으나, 황제의 안전을 우려한 안창호의 만류로 실행하지 못했다. 이후 원산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넘어갔다가 같은 해 10월26일(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 척살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무되어 귀국했다.

1909년 12월22일(수), 종현천주교회당(명동성당)에서 콩고 대학살로 악명 높은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12월17일 사망)의 추도미사에 이완용(李完用)이 참석한다는 신문기사를 본 이재명은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문밖에서 대기하다가, 오전 11시30분경 식장에서 나와 인력거에 오른 이완용에게 달려들었다. 인력거꾼 박원문의 제지를 칼로 제압한 뒤, 이완용의 복부를 찔렀다. 이완용이 인력거 아래로 고꾸라지자 어깨 등을 힘주어 찔렀는데, 이에 이완용이 죽었다고 판단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의거 직후, 일본 순사의 군도에 왼쪽 넓적다리를 찔리는 중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이완용은 이재명의 칼에 왼쪽 폐가 관통되어 치명상을 입은 듯했으나, 대한의원(서울대학교병원)으로 후송돼 일본인 외과의사들이 집도한 수술(국내 흉부외과 수술 제1호)과 당시의 최신의료기술이 총동원된 2개월간의 입원 치료 끝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완용은 이때 얻은 상처가 천식과 폐렴으로 발전하여 동절기마다 크게 고생했고 훗날 사망(1926) 원인이 된다.

이재명 의사는 이완용 살인미수와 박원문 살해 혐의로 곧 재판정에 섰는데, 공판에서 태연한 안색과 호걸다운 어조로 이완용의 8대 죄악을 들어 통렬히 꾸짖고 나라를 위하여 처단함이 당연함을 재삼 강조하였다. 안병찬(安秉瓚) 변호사는 장인환(張仁煥) 의사가 미국인 스티븐스(Durham W. Stevens)를 저격한 사건을 미국 법정에서 가볍게 언도한 사실 등을 들어 경한 형을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사형을 선고했다.

이재명 의사는 “왜법(倭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을 빼앗기는 하나 나의 충혼(忠魂)을 빼앗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幻生)하여 기어이 너희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고 웅변하였다.
1910년 9월13일(화) 이재명 의사는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조용히 찬송가를 부르고 24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으로 의기로운 대한사람의 일생이 아닐 수 없다.

명동성당 입구 보도에 이재명 의사의 의거를 기념하는 표지석이 있다. 1909년 12월22일(수) 의거 당일, 눈이 왔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표석문구] 이재명(1890~1910)은 친일 매국노인 이완용을 척살하려 한 독립운동가이다. 평북 선천 출생으로, 1909년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을 칼로 찔렀으나, 복부와 어깨에 중상만 입히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이듬해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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