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26일 일요일

선정릉, 봉은사 역사문화트레킹

선릉과 정릉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2호선 선릉역 10번출구로 나가는 것이 빠르지만 오늘은 먼저 1번출구를 택했다. 특검이 입주해 있는 대치빌딩으로 나가기 위해서다. 지난 12월 21일 수사를 개시한 이후 박사모·일베·어버이연합·엄마부대·자총·친박 국개의원 등의 온갖 방해와 모략과 포악질에도 흔들리고 않고 쉼없이 달려오면서 문형표·김기춘·조윤선·최경희·이재용 등을 기소하였다. 다만 피의자 박ㄹ혜 대면조사와 청와대 압색이 무산되고, 우병우 구속이 불발된 것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부역자 황교안이 특검연장을 해줄리 만무하니 지금까지 보여준 정의감과 수사력은 이제 종료되겠지만, 헌정 사상 최고의 특별검사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선정릉(宣靖陵)은 빌딩숲에 둘러싸여 있으니 말그대로 자연과 인공의 조화라고 해야 할까. 도심 속 녹지가 쾌적해 보였다.
제9대 성종(이혈)은 잘산군(乽山君) 시절 할머니 정희왕후 윤씨(세조비)와 권신 한명회의 정치적 결합으로 13세에 등극하여 38세로 승하하기까지 26년간 재위하였다. 초반 7년 간은 할머니의 섭정을 받았다. 3명의 왕비(공혜왕후·제헌왕후·정현왕후)와 다수의 후궁 사이에 20여 명의 자녀를 두어 카사노바라는 부정적 비판도 있는데, 유교적이지 못한 면은 분명히 있어 보인다. 성종이 추진했던 독서당(讀書堂) 제도에 관심이 간다.


제헌왕후 윤씨(폐비)에 이어 성종의 3번째 왕후가 된 정현왕후 윤씨(자순대비)는 중종의 생모이다. 2계비임에도 불구하고 남편 옆에 묻혀 있다.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으로 조성된 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은 가까이까지 접근하여 살펴볼 수 있는데, 정현왕후 릉에 없는 병풍석이 성종의 릉에는 둘러져 있다.


제11대 중종(이역) 역시 3명의 왕비(단경왕후·장경왕후·문정왕후)를 두었으나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이곳에 홀로 누워 있다.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이라든가 조광조와의 관계는 널리 알려진 것들이다.
정자각(운상각) 동쪽에는 올라가는 계단이 2개인데, 서쪽에는 1개 뿐인 이유가 궁금하다. 정자각 뒤의 열려진 문을 통해 건너다 봐도 능묘 언저리만 얼핏 보일 뿐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는 구조이다.


폐출된 정비 단경왕후(온릉)는 차치하고, 애초엔 1계비였던 장경왕후의 희릉(서삼릉 소재)에 중종의 릉이 조성되었으나, 풍수지리를 이유로 1562년(명종 17)에 2계비인 문정왕후에 의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그러나 저지대로 인한 침수피해 탓에 정작 문정왕후는 남편 곁에 묻히지 못하고 멀리 떨어진 태릉에서 잠들게 되었다.
조선왕릉은 도굴을 봉쇄하기 위해 화강암을 짜맞춰 견고한 석실(石室)로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선릉과 정릉의 세 능을 파헤쳐 재궁을 불태우고 시신을 훼손하였다고 한다. 숭악한 놈들~
선정릉(사적 제199호)은 3개의 능이 있다고 해서 삼릉공원이라고도 불리고, 그 남쪽길은 1972년 삼릉로(三陵路)로 개통되었다가 1977년 테헤란 시장이 방한하면서 테헤란로로 개칭되었다.
조선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저자도리·무동도리·부리도리였던 세 마을이 1914년 3월 1일 경기도 구역 획정 때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삼성리로 합쳐졌다가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될 때 성동구 소속의 삼성동으로 명명된 후 1975년 10월 1일에 강남구로 이속되었다.


강남 최대사찰 봉은사는 794년(원성왕 10)에 연회국사에 의해 견성사(見性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1498년(연산군 4)에 선릉의 능침사찰이 되면서 많은 땅을 하사받고 사찰 이름도 ‘은혜를 받든다’는 의미의 봉은(奉恩)으로 개명되었다. 명종의 모친 문정왕후가 보우대사를 신임하고 불교를 장려하면서 봉은사는 선종 수사찰이 되어 승과의 과거시험장으로 사용되어 유생들의 견제를 받았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같은 고승이 장원급제 출신이다. 현판에는 수도산(修道山) 수선종(首禪宗) 봉은사(奉恩寺)라는 글씨가 써있다. 참고로 교종의 수사찰은 남양주 봉선사(奉先寺)이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전각이 파괴되어 재건축했기 때문에 역사적인 건축물은 미미하다. 2015년에 9호선 지하철 봉은사역이 개통되어 접근성이 더욱 좋아졌다. 2010년에 자승 총무원장이 직영사찰로 만들어 당시 이명박 정권에 대립각을 세웠던 이른바 강남좌파 명진스님을 축출한 바 있다.


사찰삼문 중 첫 번째인 일주문의 역할은 2마리의 코끼리 석상이 대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천왕문도 따로 진여문(眞如門)으로 부르는 것 같다. 진여문을 지나 오른편에 크고작은 부도와 탑비, 공덕비 등이 늘어서 있다.
대웅전의 현판 글씨는 추사가 쓴 진관사(津寬寺) 대웅전의 것을 모각한 것이라고 한다. 판전의 현판은 말년의 추사가 죽기 사흘전 과천에서 썼다고 해서 마지막 글씨로 이름난 것인데, 왼편에 71과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이라는 낙관이 보인다.


판전(板殿) 옆 작은 비각 안에 예서체의 흥선대원위영세불망비(興宣大院位永世不忘碑)가 있다. 대원군이 땅문제로 송사에 휘말린 봉은사 측의 손을 들어준 것에 대한 감사의 내용이라고 한다. 미륵전 뒤편의 미륵대불은 23m 높이로 국내 최대의 석불이다. 영암스님이 발원하여 익산에서 가져온 돌로 10년 간의 불사 끝에 1996년에 완공을 보았다고 한다. 종루의 범종에는 비천상 무늬가 있고 상단부에 음통이 달린 양식으로 조성되었다.


봉은사에서 나와 봉은사역 2번출구를 돌아 올라가는 영동대로 언덕마루에 삼성리토성 표석이 있다. 고개를 넘어 내려가면 청담역 2번출구인데 우편은 아이파크, 왼편은 경기고등학교이다. 삼성동토성은 수도산(修道山) 능선을 둘러싼 백제의 테뫼식 토성으로 추정되는 바, 한성백제의 왕성을 방어하고 해운의 중심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보다 세밀한 발굴조사가 필요하다.


이렇게 오늘의 제23차 역사문화트레킹을 마쳤다. 인근의 논현동 K스포츠재단이나 미르재단과 연계하여 이른바 ‘부패투어’로 기획해 보아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