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엔 정도전 열풍이 불더니 금년엔 류성룡이 대세다. 서점에도 따로 징비록(懲毖錄) 코너가 마련되어 있고, 이곳저곳에서 강좌가 이어진다. 사극의 힘이다. 정독도서관에서 준비한 《징비록이 말하는 또 하나의 임진왜란》 1강 〈류성룡과 전쟁〉 강연회에 다녀왔다.
「류성룡, 7년의 전쟁」의 이종수 작가는 이름과는 달리 여성분이었고, 국문학도임에도 미술사학까지 공부하여 인문과 감성이 조화된 자신만의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다고 변(辯)하였다.
우선 임란의 전개과정에서 조선·일본·명 삼국의 군사적 상황과 리더들을 세밀하게 분석한 저자의 탐구력이 돋보였다. 소인배 선조에 대비되는 류성룡·이순신 투톱 조합에 이원익·이덕형·이항복으로 이어지는 트리플 볼란치 라인으로 일본의 파상공세를 막아내게 된다.
임란 이듬해인 1593년부터 류성룡은 영의정 겸 도체찰사로 전시의 국정과 군무를 총괄하며 난관을 돌파해 가지만 우여곡절 끝에 1598년 11월 19일 파직을 당하는데, 같은 날 이순신은 전날부터 이어진 노량해전 와중에 전사하게 된다.
류성룡의 작미법 같은 개혁정책은 이원익이 계승하고 후에는 김육이 강력히 추진하여 결국 대동법으로 확립된다. 류성룡 본인은 물론이고, 이원익 정도를 제외하고는 함께 전란을 이겨낸 후배들은 모두 죽거나(이순신) 파직되거나(이덕형) 유배되는(이항복) 등 말년이 좋지 못했다. 우유부단 의심쟁이 이균 때문이다.
어지러운 이 시대, 이 나라… 당파를 초월하여 국익과 국민을 위해 진력하는 참정치인을 바라는 염원은 갈수록 어림없어 보인다. 서애 대감의 절절한 기록은 국보로 전해오지만, 그분의 바람과는 달리 안타깝게도 전혀 징비(懲毖)가 되지 못하고 있다.
「류성룡, 7년의 전쟁」의 이종수 작가는 이름과는 달리 여성분이었고, 국문학도임에도 미술사학까지 공부하여 인문과 감성이 조화된 자신만의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다고 변(辯)하였다.
조선
|
일본
|
명
|
|
지휘부
|
선조/광해군 류성룡 윤두수/이원익 이항복 |
도요토미 히데요시 마에다 토시이에 이시다 미쓰나리 |
만력제 석성/송응창 (정유재란-형개/양호) |
지휘관
|
도원수-김명원/권율 수군-이순신 신립 의병장-곽재우, 유정 |
총대장-우키타 히데이에 1군-고니시 유키나가 2군-가토 기요마사 수군-도도/와키자카 |
제독-이여송 (정유재란-유정,마귀, 동일원, 진린) |
외교/
협상 |
이덕형 윤근수 |
고니시 유키나가 | 심유경 |
군사력
(개전시) |
8만 4천 | 16만~23만 5천 | 5만 4천(임진1차 원군) |
우선 임란의 전개과정에서 조선·일본·명 삼국의 군사적 상황과 리더들을 세밀하게 분석한 저자의 탐구력이 돋보였다. 소인배 선조에 대비되는 류성룡·이순신 투톱 조합에 이원익·이덕형·이항복으로 이어지는 트리플 볼란치 라인으로 일본의 파상공세를 막아내게 된다.
선조
|
류성룡
|
이순신
|
이원익
|
이덕형
|
이항복
|
|
생몰
|
1552~1608
(즉위 1567) |
1542~1607
|
1545~1598
|
1547~1634
|
1561~1613
|
1556~1618
|
1592
|
41세
재위 25 |
51세
좌의정(정1) |
48세
좌수사(정3) |
46세
이판(정2) |
32세
대사헌(종2) |
37세
도승지(정3) |
특기
|
의심
|
중심
|
지략
|
근실
|
영민
|
포용
|
관직/
최후 |
재위 41
|
영의정
삭탈관작 후 복권 |
수군통제사
전사 |
영의정
사직 |
영의정
삭탈관작 |
영의정
유배 |
임란 이듬해인 1593년부터 류성룡은 영의정 겸 도체찰사로 전시의 국정과 군무를 총괄하며 난관을 돌파해 가지만 우여곡절 끝에 1598년 11월 19일 파직을 당하는데, 같은 날 이순신은 전날부터 이어진 노량해전 와중에 전사하게 된다.
류성룡의 작미법 같은 개혁정책은 이원익이 계승하고 후에는 김육이 강력히 추진하여 결국 대동법으로 확립된다. 류성룡 본인은 물론이고, 이원익 정도를 제외하고는 함께 전란을 이겨낸 후배들은 모두 죽거나(이순신) 파직되거나(이덕형) 유배되는(이항복) 등 말년이 좋지 못했다. 우유부단 의심쟁이 이균 때문이다.
어지러운 이 시대, 이 나라… 당파를 초월하여 국익과 국민을 위해 진력하는 참정치인을 바라는 염원은 갈수록 어림없어 보인다. 서애 대감의 절절한 기록은 국보로 전해오지만, 그분의 바람과는 달리 안타깝게도 전혀 징비(懲毖)가 되지 못하고 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