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15일 일요일

서대문형무소 씨순길

2015년 2월 씨순길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거쳐 안산자락길을 걷는 일정이다.


한양도성의 서쪽 바깥편 큰 길은 조선의 9대 간선도로의 하나인 의주로(義州路)이다. 중국 사신들은 1천리의 의주로를 통해 무악재를 넘어 영은문(迎恩門)을 지나 모화관(慕華館)에서 쉬고 남대문을 통해 한양으로 들어와서 태평관(太平館)에 머물렀다.
1407년(태종 7) 돈의문 밖에 건축된 모화루(慕華樓)는 1430년(세종 12)에 모화관(慕華館)으로 개칭되어 그 앞에 홍살문을 세웠는데, 1537년(중종 32)에 이를 개축하여 영조문(迎詔門)이라 했던 것을 1539년(중종 34) 명나라 사신 설정총(薛廷寵)의 요청으로 영은문(迎恩門)으로 재개칭했다.
영은문(중국의 은혜를 맞이하는 문)은 청일전쟁(1894.7.25~1895.4.17) 끝무렵인 1895년 2월에 김홍집 내각에 의해 철거되어 장주형초석만 남아 있었다. 독립협회는 헐어낸 영은문 북쪽 자리에 국왕의 승인을 받아 새로 독립문을 세우기로 합의하고, 서재필을 책임자로 선정하여 건립 계약을 체결하였다. 대대적인 모금운동이 벌어졌지만, 건립 자금의 상당액은 황실에서 지원하여 1897년(광무 원년) 11월 20일에 완공되었다.
파리 개선문을 소박하게 본뜬 높이 14.28m, 너비 11.48m의 독립문은 1천 850개의 화강암 벽돌로 쌓아 올렸다. 북쪽 현판석에는 한자로 ‘獨立門’, 남쪽 현판석에는 국문으로 ‘독립문’이라고 새겨 넣었는데 글씨 좌우에는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독립문의 앞뒤에 달려있는 편액은 당대의 명필로 이름을 날린 훗날의 매국노 이완용 후작의 글씨이다. 무지개문의 이맛돌에는 황실 상징인 오얏꽃 문양이 새겨져 있다. 독립문 내부 왼쪽에는 지붕 위로 올라가는 돌층계가 있으며, 정상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었다.
사직터널에서 금화터널 방면으로 이어지는 고가도로의 건설로 1973년 원위치에서 서북쪽으로 70m 가량 물러앉은 것이 바로 지금의 자리이다. 한국사회에선 ‘개발이냐 보존이냐’의 가치가 맞붙게 되면 언제나 개발의 논리가 승리하여 왔다. 최근엔 춘천 중도 레고랜드 조성사업으로 국내 최대 고조선유적지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중국사신이 모화관(중화를 사모하는 관)에 들면 왕세자와 백관이 나아가 재배례를 행하였다. 청일전쟁과 갑오경장(1894~1895) 무렵 모화관은 사용이 중지되어 방치되어 있었다. 서재필 등은 대중국 사대관계의 또 다른 핵심 상징물이었던 모화관을 전면 개수해 1897년 5월 23일 황태자가 국문으로 친서한 ‘독립관’의 현판식을 거행하고 개관했다. 독립관은 독립협회의 활동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처럼 초창기 독립협회의 주류세력은 영은문과 모화관을 대중국 사대의 상징물로 간주하고 자주 독립국가의 위상을 널리 알리기 위해 독립문·독립관·독립공원 같은 독립기념물을 조성하려 했다. 그러나 서재필식의 독립이란 청으로부터의 독립에 국한된 것이고, 한글의 로마자화를 위한 한글전용을 주장했다는 의심도 사고 있으며, 동학군이나 의병을 도둑떼로 표현하는 등 그의 흑역사는 좀더 널리 드러나야 한다.


사적 제324호 서대문형무소는 안산의 동쪽 아랫녁에 자리하고 있다.
1908년(순종 2) 10월 21일 일본인 건축가 시텐노 가즈마의 설계로 최초의 근대식 감옥인 경성감옥으로 준공되었다. 1912년 일제에 의해 서대문감옥으로,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불렸으며, 1946년 경성형무소, 1950년 서울형무소로 개칭되었다. 이후 1961년 서울교도소, 1967년 서울구치소로 불리다가 1987년 옥사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되고부터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바뀌어 역사교육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일제는 지하에 음침한 고문실과 흉악한 고문장치들을 갖춰 놓고 독립운동가들을 잔인하게 고문했다. 거꾸로 매달아 놓고 코에 물을 마구 들이붓는 물고문(水拷問, Water Torture)으로 폐에 물이 차서 숨지기도 했다. 드라마 「각시탈」에 나왔던 것처럼 안쪽에 날카로운 못과 쇠꼬챙이를 박아 놓은 상자 안에 사람을 집어넣어 마구 흔들며 고통을 주었던 상자고문(箱拷問)도 있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러한 만행이 해방 후의 조국에서도 독재정권에 의해 자행됐다는 사실이다.


1922년 2층으로 지어진 10·11·12옥사는 3·1독립만세운동으로 수감자가 급증하자 신축되었던 건물이다. 감시와 통제가 용이하도록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의 파놉티콘(Panopticon) 구조를 도입하여, 가운데 중앙간수소를 중심으로 각 옥사를 부채꼴 모양으로 배치하였다. 또한 천장에는 수감자들의 움직임이 잘 보이도록 복도를 밝게 하기 위한 채광창이 설치되었다.
12옥사 내부에 설치되었던 독방은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약 2.4㎡(0.7평)의 공간이다. 내부는 24시간 내내 빛이 한줌도 들어오지 않아 마치 먹물처럼 깜깜하다 하여 일명 먹방(墨部屋, Ink Cell)이라 불렸다. 또한 마룻바닥 끝부분에 구멍을 내어 용변을 밖으로 처리하게 하는 등 외부와 철저히 격리된 공간이었다. 이곳에 감금되면 정신공황장애를 겪기도 하는 등 상상 이상의 고통이 뒤따랐다.



1919년 3·1혁명운동 당시 이화학당에 재학 중이던 유관순 열사는 천안 고향에 내려가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5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모진 매질과 옥고로 1920년 9월 28일 19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셨다.
유관순 열사의 시신은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됐으나 일제가 군용기지를 건설하는 와중에 안타깝게도 유실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유관순, 강우규, 안창호, 김동삼… 자랑스러우면서도 가슴 시린 존귀한 이름들…
서대문형무소는 일제의 조선 지배를 위해 만들어졌기에 단순한 감옥 이상의 상징성이 있다. 본래 3만평 부지 100동 건물에 3천명이 넘는 애국지사들을 가둬둘 수 있을 정도로 방대한 규모였으나, 지금은 8동의 건물만 남겨져 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곳 붉은 벽돌에 갇혀서 온갖 고초를 겪었다. 1945년 이후에도 독재에 항거한 많은 민주운동가들이 고통받은 곳이기에, 식민과 독재의 역사를 증언하는 역사적 성소라 할 수 있다.


독립문을 헐어내지 않고 그 옆에 형무소를 건설하여, ‘독립운동 하면 감옥 간다’는 의식을 조선인 뼈속 깊이 주입한 일제의 치밀함과 극악함에 분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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