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18일 일요일

815 아차산행

8월 15일… 평교협과 한여연 멤버들의 아차산 등반이 있던 날.


아차산(阿且山)은 고대 삼국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서기 286년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백제 책계왕(286~298)은 아차성을 수리했으며, 396년 고구려 광개토태왕(391~412)은 백제 공격시 이 아차성을 함락시켰다. 475년 장수태왕(413~491)이 백제 한성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아차산에서 죽였으며, 아차산 일대를 신라가 차지한 후에 고구려 온달이 신라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장소로 유명하듯 아차산 일대는 삼국시대 최대의 격전지였다. 백제 성왕(523~554)이 한강 유역을 수복하였으나, 553년 신라의 진흥왕(534~576)이 한강 하류지역까지 점령하였다.



아차산성(사적 제234호)은 평면 부정형의 포곡식 석축산성으로 둘레는 1038m에 이른다.
아차산은 용마산과 망우산 등 주변 산지와 연결되어 있고, 조선시대까지는 이 모두를 아차산이라고 불렀다.
아차산에는 능선을 따라 작은 봉우리마다 ‘보루’라고 하는 군사유적이 있는데, 아차산의 전략적 중요성은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고구려 보루군의 입지조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보루(堡壘)란, 적을 막거나 적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주로 산꼭대기에 만들어진 요새인데, 점령지로서 일반인이 거주했던 산성과 달리 교통로 확보를 위해 주변 전망과 감시를 주로 하는 곳이었으며, 여러 개가 조를 이루고 있다.
아차산의 보루들은 삼국시대 고구려가 만든 것으로, 475년 고구려(장수왕 63년)가 한강 유역에 진출한 후 551년 신라와 백제에 의해 물러날 때까지 사용되었다. 삼국시대 한강 유역은 백제와 신라에게는 중국과 교류할 수 있는 교통로로서 매우 중요하였고, 4세기 중반 이후부터 남진정책을 펼치던 고구려에게도 한강 남쪽 공략을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만 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특히, 아차산의 보루군은 백제 한성기(漢城期)의 도성(都城)인 풍납토성과 한강 건너 남쪽지역이 한눈에 조망되는 곳에 있어, 한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관계에 있었던 당시의 고구려와 백제의 긴장된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차산에 산재한 약 20여개의 보루들은 각각의 위치에 따른 저마다의 기능이 있다. 가장 북쪽의 수락산 보루에서는 남쪽의 아차산 일대가 잘 보이며, 임진강 유역으로부터 양주분지, 중랑천, 한강 유역에 이르는 고대 교통로를 감시하기에 적당하다. 망우산 보루에서는 북쪽 의정부에 이르는 길목까지 볼 수 있고, 용마산 보루들은 중랑천 일대를 방어하기에 적당하며, 아차산 줄기의 보루들은 왕숙천변을 방어하기에 유리하다. 한강변의 낮은 구릉에도 지금은 사라졌지만, 구의동보루와 자양동보루가 있어 아차산 일대와 한강변 평지를 조망할 수 있었다.
이렇듯 아차산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여 시작되는 곡류부가 끝나는 지점에 있어 고구려는 서쪽의 중랑천과 동쪽의 왕숙천, 한강과 그 건너편의 풍납토성 및 몽촌토성 등 한성 백제의 중심지를 조망할 수 있었다. 또한 이곳을 통해 한강 남쪽과 남한강을 따라 한반도 남부로 진출할 수 있는 지리적 잇점도 있었다.


아차산(阿且山)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조선 경종 때 유명한 점쟁이 홍계관의 일화에서 비롯된다. 혹세무민한다는 조정의 오해로 쥐 2마리가 든 상자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맞추라는 테스트를 받는데, 쥐 3마리라 답했다가 아차산 형장에서 목이 달아날 찰라에 막 태어난 새끼까지 3마리가 맞았음을 인지한 임금이 급히 형을 멈추라는 전령을 보냈는데, 간발의 차이로 망나니의 칼에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때 전령이 ‘아차’ 하고 외쳤던 것이 아차산의 유래라는 것이다.


간만에 신나게 폼나게 달렸더니 삭신이 쑤시더군.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이 음악~
♬ 어얼씨구 저절씨구 너를 안고 내가 내가 돌아간다 황진이 황진이 황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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