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 30일 목요일

책을 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런 외국 만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책이 가득 꽂힌 서재 앞에서 한 남자가 술잔을 든 채 여인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이 책들에는 한때 내가 되고자 했던 모습들이 담겨 있어요”라고.

‘신유목민’ 시대라 부피가 많이 나가는 책이 이동에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이 남자의 말은 맞습니다.
처음에는 큰 포부를 지녔다가 차츰 현실과 타협하면서 샐러리맨 등으로 작아진 그 사람의 영혼의 궤적이 그 서재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누군가의 집으로 초대받아 가면 뭐부터 살핍니까. 예의는 아닐지 몰라도 저는 집주인이 눈치채지 못하게 그 집에 책이 어느 정도 있는지, 그리고 어떤 장르의 책이 많은지를 살핍니다.
아무리 책을 읽지 않는 집이라 해도 어느 한구석에는 책이 놓여 있게 마련입니다.
별도의 서재를 갖출 공간이 없는 가정이라도 소파 옆의 테이블이나 침대머리맡에는 한두 권의 책이 놓여 있게 마련입니다.

얼마전 일본에서는 목욕 중에도 읽을 수 있도록 비닐로 만든 물에 젖지 않는 책이 등장했다고 합니다.
최근 급증하는 반신욕 애호가를 겨냥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 책은 물에 젖어도 찢기지 않고, 책장이 들러붙지 않는 게 특징이랍니다.
반신욕 애호가를 대상으로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내는 출판사의 기획력도 경이롭지만, 출판사가 그런 시도를 할 수 있는 일본사회의 ‘독서습관’이 더욱 놀랍습니다.
지하철에서건 목욕탕에서건 책을 읽는 많은 일본인들. 이들의 ‘책 사랑’이 아니라면, 이런 ‘시장’이 없었다면, 출판사가 이런 ‘목욕탕 문고’를 만들어볼 시도조차 못했을테니까요.

요즘 지하철을 타보면, 책을 펴고 있는 사람들이 전보다 많이 줄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냥 눈만 감고 있는 경우도 많고, 무가지를 들추거나 핸드폰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책을 펴들고 있는 사람은 눈에 띠게 줄었습니다.

지하철에서든 약속장소에서든, 혼자 있을 때 책을 펴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보면 왠지 기분이 좋아집니다.

우리 TV는 책에 너무 인색합니다.
아무리 영상매체라 해도 읽기 문화를 진작해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가 이뤄지고 있는 마당에 의도적으로 서재를 꾸며 보여줘야 할 판에 많은 사람이 넋을 놓고 보는 드라마에서조차 책을 보여주는 예가 드뭅니다.
그나마 책을 소품으로 이용하는 프로그램으로는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 정도인 것 같습니다.

불황이라지만 세계 10위권 출판 강국의 지위는 그대로이고, 신간 종수도 예년에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책을 내는 사람은 여전히 많은데 책을 사서 읽는 사람이 적어졌다는 말이겠지요. 책을 내려고 애쓰기에 앞서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는 게 지식인이 아닐까 합니다.

지하철 전동차에서 볼 수 있는 문구입니다.


책이 없다면
신도 침묵을 지키고,
정의는 잠자며,
자연과학은 정지되고,
철학도 문학도 말이 없을 것이다.

- 토마스 바트린 -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