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26일 화요일

세 명의 마리아 - 조마리아, 김마리아, 박마리아의 선택

가톨릭교회는 세례자에게 성덕(聖德)이 뛰어난 성인(聖人)의 이름을 부여하는 것을 장려하여 13세기 이래로 교회법으로 명시하고 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인 마리아는 일반 성인에 대한 공경(恭敬)보다 한 차원 높은 상경(上敬)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때문에 가톨릭교회에 입교하고자 하는 많은 여성 예비신자들이 ‘마리아’ 세례명을 택하고 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도 마리아(瑪利亞)를 세례명이나 이름으로 삼은 여성들이 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조성녀(趙姓女) 마리아(1862~1927)다.
황해도 해주 출신의 조마리아는 1897년 남편 안태훈의 인도로 뮈텔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大義)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어미는 현세에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 후 뤼순감옥에 수감된 안중근 의사에게 사촌동생 안명근을 통해 전했다는 조마리아의 당부인데, 참으로 담대하고 강직한 언사다. 안 의사는 어머니가 보낸 흰색 명주수의를 입고 이듬해 3월 26일 교수형을 받아 31세로 순국했다.
안 의사의 순국 후 조마리아는 연해주로 망명하여 동쪽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쪽 바이칼호수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동포들의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사업을 전개해나갔다.

1920년대 상하이에서는 김구의 모친 곽낙원(郭樂園)과 동기간처럼 지내면서 독립지사들의 어머니 역할을 수행했다. 조마리아는 장남인 안 의사의 동생 성녀, 정근, 공근 3남매도 독립운동가로 키워내면서 ‘안중근의 모친’으로 손색없는 삶을 살다가 1927년 7월 15일 상하이에서 66세로 순국하였다. 유해는 프랑스조계 만국공묘(萬國公墓)의 월남묘지에 안장되었는데, 지금은 개발로 인하여 묘소를 찾아볼 수 없다. 대한민국정부는 2008년 8월 뒤늦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두 번째 마리아는 김진상(金眞常) 마리아(1892~1944)다.
김마리아는 삼촌과 고모들이 모두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한 애국집안 출신이다. 세례명이기도 한 그의 이름 마리아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부친이 지어줬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으나, 대학공부까지 하라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1906년 이화학당에 입학했다가 장로교 계열 연동여학교(정신여고 전신)로 전학하여 졸업하였다. 그 뒤 광주의 수피아여학교(수피아여고 전신)와 모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교육 계몽운동에 힘썼다.

1914년에 도일하여 도쿄여자학원에서 수학하던 김마리아는 1919년 3·1만세운동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2·8독립선언에 참여하다 일경에 붙잡혀 취조를 받았다. 이후 2·8독립선언의 열기를 국내로 전파하고자 ‘2.8독립선언문’ 10여장을 베껴 숨기고 부산항을 통해 귀국하여 교편을 잡았던 광주 지역에 배포하였다. 3·1운동 때에는 황해도 봉산에서 활동했다가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는데, 이때 몸을 상해 평생을 건강문제로 고생하였다.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된 후,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으로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한 혐의로 다시 3년형의 판결을 받고 복역하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 중 동지들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상하이로 망명한 김마리아는 상하이 대한애국부인회 간부와 임시의정원 대의원으로 활약했으며,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와 개조파의 불화에 실망하여 1923년 미국으로 건너가 근화회(槿花會)를 조직하고 항일투쟁을 지속해 나갔다. 1932년 오직 신학만 가르친다는 조건으로 귀국한 김마리아는 원산에 있는 마르다 윌슨신학교에 머물면서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조국광복을 불과 1년 앞둔 1944년 3월 13일 고문으로 얻은 병이 도져 53세로 순국하였다. 결혼을 하지 않은 김마리아의 시신은 그의 유언대로 화장돼 대동강에 뿌려졌다. 대한민국정부는 1962년 유관순과 함께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서울 신대방동 보라매공원에 김마리아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김마리아 같은 여성동지 열 명만 있었던들 대한은 독립이 되었을 것”이라는 안창호의 말은 조국광복을 위해 일생을 바친 김마리아의 위상을 대변해 준다.

세 번째 마리아는 박마리아(1906~1960)다.
강릉 태생으로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고의대(高義大)의 손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박마리아는 어머니가 가정부로 일했던 인연으로 정춘수 목사의 소개를 받아 개성의 감리교 계열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8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배재학당을 설립한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1932년 귀국하여 이화여전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934년 유학 시절에 만났던 이기붕과 결혼하고 조선YWCA 총무로 10년간 활동하면서 일제의 내선일체 지침에 따라 조선YWCA가 일본YWCA에 흡수되는데 일조하였다. 태평양전쟁 즈음에는 김활란, 모윤순, 노천명, 박순천 등과 함께 친일강연에 적극 참여하면서 징병제 등에 협력할 것을 종용하였다. 광복 후에는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와 대한부인회 부회장으로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Franziska Donner)와 가까이 지내면서 그때까지 별 볼일 없던 남편이 대통령비서실장과 서울특별시장 자리에 임명되는데 조력했다. 남편 이기붕이 정치 라이벌 이범석을 제치고 1공화국 2인자로 자리매김하던 무렵 박마리아도 이화여대 문리대학장과 부총장, YWCA 회장 자리에 올랐다.

1957년 박마리아는 장남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켜 정치에 더욱 깊숙이 개입하였다. 1960년 제5대 정·부통령 선거를 통해 이기붕이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4·19혁명이 일어나 자유당 정권이 붕괴하고 이승만은 하야(下野)하였다. 1960년 4월 28일 경무대(景武臺)로 피신해 있던 이기붕, 박마리아, 이강욱 일가는 당시 육군 소위로 복무 중이던 이강석의 권총을 맞아 죽고 이강석 또한 자살하면서 참혹한 종말에 이르고 만다. 그들이 살았던 종로구 평동 166번지 서대문 집터는 1964년부터 사설도서관이 들어서 지금은 4·19혁명 기념도서관으로 운용되고 있다.


현행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마리아, 김마리아, 박마리아… 마리아 이름을 가진 세 여성 모두 3·1운동 전후의 굴곡진 시대를 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조국광복의 길로 한 사람은 친일과 반민주의 길로 들어섰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의 사료에 따르면 약 300만 명이 일제강점 당시 시대정신의 중심축인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300만 명 중 일부는 일제에 부역하는 쪽으로 진로를 바꿨다. 각자의 선택과 삶의 흔적은 기억이 되고 역사로 남았다. 그 선택의 발자국이 복지국가의 건설, 경제민주화의 실현, 분단조국의 통일과 같은 2019년의 시대정신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살피고 고민하는 일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 된다.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

덧붙이는 글 | 한국여성연합신문 크와뉴스(Kwanews)에도 보냈습니다.

2019년 2월 5일 화요일

기해년, 모두가 행복하면 돼지~

설날이다.
많은 사람들이 친지간에 정(情)과 덕담을 나눈다. 나 역시 주로 카톡이나 밴드와 같은 SNS를 통해 덕담을 주고 받았다.
돼지해여서 그런지 많은 문구가 “행복하면 돼지, 부자되면 돼~지, 사랑하면 돼지, 새해엔 다~돼지”였다.

그런데, ‘~하면 돼지’가 올바른 표현일까?
‘되-’는 동사 ‘되다’의 어간이고, ‘돼’는 어간 ‘되-’에 어미 ‘-어’가 결합해 축약된 형태다.
그러므로 ‘돼지’가 아니라 ‘되지’가 적절한 표현이다.
또한 ‘되지’의 부정 표현도 ‘안 돼지’가 아니라 ‘안 되지’가 맞다.


5살 된 조카 아이는 하얀 망토를 한 분홍색 ‘AHN(안)돼지’ 인형을 보여주기도 했다.

십이지(十二支) 중 맨 마지막인 돼지는 고대 부여국(夫餘國)의 사출도(四出道)를 구성했었고, 윷놀이의 한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선량한 사람들 모두의 가정과 공동체에 좋은 일 많은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행복하면 되지”, “사랑하면 되지”

2019년 1월 4일 금요일

알라는 왜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게 했을까?

이슬람교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슬람교의 경전인 쿠란(Quran)에는 먹을 수 없는 음식에 대해 자세히 설명돼 있다. 돼지고기, 죽은 고기, 동물의 피와 그 피로 만든 음식, 그리고 유일신 알라(Allāh)의 이름으로 기도문을 외우지 않고 도축한 것들은 하람(Haram)이라 하여 금기사항으로 규정해 놓았다.
반면 양, 소, 염소, 낙타 등의 초식동물을 알라의 이름으로 도축한 것들은 할랄(Halal)이라 하여 허용되는 음식이 된다.

그렇다면 알라는 왜 돼지만을 특별히 언급하여 먹지 말라고 명했을까?
이에 대하여 돼지가 보유한 기생충이 인간의 몸에 해롭다든가, 높은 온도의 사막기후에 돼지고기가 쉽게 상하여 식중독에 걸릴 위험이 크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있다.
또한 털로 몸을 보호하거나 땀을 흘려 체온조절을 할 수 없는 돼지가 외부의 습기를 이용하기 위해 물기가 있는 진흙 속을 뒹구는 습성을 불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덥고 척박한 건조기후 지역에서는 물을 많이 필요로 하는 돼지보다는 양, 염소와 같이 풀만 먹어도 인간에게 우유와 고기, 가죽을 제공하는 동물을 사육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어서 사회적 관습으로 굳어졌고 이러한 흐름이 종교적 금기로 명문화되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생태학적으로 돼지 사육이 가능한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들은 이슬람 문화권의 외곽선을 이루고 있다. 돼지고기를 일종의 소울 푸드(soul food)로 생각하는 중국에서 이슬람교의 지위는 미미하다. 요컨대 이슬람교의 지리적 한계는 돼지 사육이 적합한 지역과 고온건조하여 돼지 사육이 어려운 지역의 경계선에 갇혀 있다.

돼지에 대한 금기는 19세기 중반 인도에서 충돌을 불러왔다.
1857년 5월 델리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에 고용된 인도인 용병 세포이(Sepoy)들이 영국에 대항하여 무력 항쟁을 일으킨 것이다. 그해 1월 “새로 보급된 신식총의 탄약통이 녹슬지 않도록 소기름과 돼지기름을 바른 종이로 포장해 놓았는데, 그 종이를 입으로 끊어야 사용할 수 있다”는 통보가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소를 신성시하는 힌두교도와 돼지를 금기시하는 이슬람교도로 구성된 세포이의 항쟁(1857~1858)은 당시 영국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던 상인들과 도시 빈민, 농민들이 동조 가세하여 인도 각지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무굴제국을 해체하고 빅토리아(Victoria) 여왕이 새로운 인도제국의 황제를 겸직하며 이른바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위세를 이어갔다.

2018년 10월 16일 화요일

망우리 사잇길 걷기

10월 2일(화) 오전에도 나홀로 트레킹… 제46차 트레킹이다.
경의중앙선 양원역 2번출구로 나와 왼편에 중랑캠핑숲을 두고 망우로 87길을 걷다가 동부제일병원 앞 횡단보도를 건넜다. 망우리 공원 축구장 옆에 13도 창의군탑이 있다.


창의문(彰義門)의 창의(彰義)는 의로움을 드러낸다는 뜻이고, 창의군(倡義軍)의 창의(倡義)는 국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킨다는 의미다.
13도 창의군(十三道倡義軍)은 말 그대로 대한제국 13개 도의 의병 1만여 명이 결진한 항일의병 사상 가장 큰 규모의 연합 의병군이었다. 중학교 역사 교과서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13도 창의군이 서울진공작전을 벌여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했다는 표현은 바로 이곳 망우리 일대를 가리키는 것이다.
1991년 동아일보가 망우리공원 입구에 13도 창의군탑을 건립하였다.



사색의 길 삼거리에서 해발 282m의 망우산(忘憂山) 정상까지 올라가봤다. 망우산은 서울시 망우동과 면목동, 경기도 구리시에 걸쳐있다.


2018년 10월 11일 목요일

서오릉 역사문화트레킹

10월 9일 화요일 한글날 오후, 나홀로 떠나는 47차 역사문화트레킹의 탐방지는 고양시 덕양구의 서오릉이다.
3호선 홍제역 2번출구로 나와 중앙차로 버스정류장(13029)에서 702A 버스를 타고 서오릉입구(35124)에서 하차하면 고려분재연구원 뒤쪽으로 주차장과 매표소가 나온다.


명릉(明陵)은 19대 숙종(肅宗, 1661~1720)과 1계비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 1667~1701), 2계비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 1687~1757)의 능이다. 정자각 뒤편 언덕이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이며, 왼쪽 높은 언덕이 인원왕후의 단릉으로 조성되어 전체적으로 동원이강릉 형식이다.
숙종 27년(1701)에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숙종이 능을 조성하면서 인현왕후 능침 오른편 자리를 비우는 허우제도를 시행하여 자신의 능자리를 미리 만들어놓았고, 숙종 45년(1720)에 숙종이 경덕궁 융복전에서 60세로 승하한 후 쌍릉의 형태가 되었다. 영조 33년(1757)에 창덕궁 영모당에서 대왕대비 인원왕후가 71세로 세상을 떠나자 영조가 명릉 서쪽 언덕에 모셨다.
명릉의 향로와 어로 양 옆에는 신하들이 다니는 변로(邊路)를 낮게 깔아 놓아 전체적으로 ‘변로-향로-어로-변로’의 4개 길로 조성된 독특함이 있다.


수경원은 21대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추존 장조)의 생모인 영빈 이씨(暎嬪 李氏, 1696~1764)의 원이다. 숙종 27년(1701)에 입궁하여 궁녀생활을 하다가 영조 6년에 영빈(暎嬪)으로 책봉되었다. 영빈 이씨는 영조의 총애를 받아 1남(사도세자) 6녀를 두었다.
사도세자가 죽은 2년 뒤인 영조 40년(1764)에 경희궁 양덕당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나자 양주 연희궁 대야동(현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대학교)에 의열묘(義烈墓)로 조성되었고, 1970년 9월 8일에 서오릉 경내로 이장됐다.
정조 12년(1788)에 묘호를 선희묘(宣禧墓)로 고쳤는데, 대한제국 선포 후인 광무 3년(1899)에 사도세자가 장조의황제로 추존되자 황제의 어머니로 높이고, 지금처럼 원호를 수경원(綏慶園)이라 하였다.


익릉(翼陵)은 19대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 金氏)의 단릉이다. 인경왕후는 ‘사씨남정기’를 지은 서포 김만중의 형 김만기(金萬基)의 딸로 11세에 세자빈이 되었고 숙종이 즉위하면서 14세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두 공주만 낳고 20세에 천연두로 경덕궁 회상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익릉의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의 향로와 어로는 독특하게도 경사지 지형에 맞춰 계단식으로 조성되었다. 맞배지붕의 정자각(丁字閣)은 지붕이 건물 바깥으로 이어진 형태인 익랑(翼廊)이 딸려 옆 전면으로 1칸 늘어난 전면 5칸, 측면 5칸으로 세워져 서오릉 경내의 다른 정자각보다 웅장하게 보인다.


4번째 방문지는 인성대군 초장지(仁城大君 初葬地)이다. 이분(李糞, 1461~1463)은 8대 예종(睿宗)과 정비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3살 어린 나이에 풍질로 세상을 떠났다. 세조는 어린 손자에게 효소(孝昭)라는 시호를 내리고, 인성군(仁城君)으로 추봉하였고, 9대 성종이 다시 인성대군으로 추봉하였다.
처음에는 백부 의경세자의 의묘(懿墓) 근처에 묘를 조성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서삼릉(西三陵) 경내 왕자·왕녀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서오릉(西五陵) 경내의 묘터에는 조성당시에 만든 문석인(文石人), 상석(床石), 표석(表石)이 남아 있으나, 옮겨간 서삼릉 경내 왕자·왕녀 묘역의 인성대군묘 앞에는 ‘仁城大君之墓’라 새겨진 묘비만 세워져 있다.


창릉(昌陵)은 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동원이강릉으로 서오릉 영역 내에서 최초로 조성된 능이다. 세조와 문정왕후 윤씨의 차남인 해양대군(예종)은 12살 위의 의경세자(추존 덕종)가 20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병환 중인 세조의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즉위 1년 2개월 만에 경복궁 자미당에서 형처럼 20세로 세상을 떠났다.
안순왕후는 한백륜의 딸로 예종의 정비 장순왕후 한씨가 왕세자빈 지위에서 요절하고 나중에 예종이 임금이 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정자각에서 볼 때 왼쪽 언덕이 예종, 오른쪽 언덕이 안순왕후의 능침이다.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은 조선 왕릉에서 유일하게 귀면 형태의 나어두(羅魚頭)가 아니라 북고리로 조각되어 있다.


홍릉(弘陵)은 21대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 서씨의 능이다. 정성왕후는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로 13세인 1704년(숙종30)에 숙종과 숙빈 최씨 소생의 연잉군(영조)과 가례를 올려 달성군부인에 봉해졌다. 1721년(경종1)에 영인군이 세제로 봉해짐에 따라 정성왕후도 세제빈이 되었고, 1724년에 영인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정성왕후는 가장 오랫동안 중전 자리에 있었으나 결국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고, 66세 되는 해인 1757년(영조33)에 창덕궁 관리합에서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부왕 숙종의 예를 따라 대행왕비의 능을 조성하면서 훗날 정성왕후와 함께 묻히기 위하여 능의 오른쪽 자리를 비워두는 우허제(右虛制)를 시행하여 쌍릉 형태로 만들려 하였다. 그래서 정자각에서 바라볼 때 홍릉의 왼쪽이 비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훗날 영조는 동구릉 경내의 원릉에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와 쌍릉으로 모셔졌다.
참고로,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洪陵)은 대한제국 1대 고종태황제와 명성태황후 민씨의 능이다.


대빈묘(大嬪墓)는 19대 숙종의 후궁이자 20대 경종의 어머니 옥산부대빈 장희빈의 묘다. 장옥정(1659~1701)은 19대 숙종대의 대왕대비였던 장렬왕후 조씨(16대 인조의 계비)를 모시는 궁녀로 입궁하여, 숙종의 총애를 받아 숙원(내명부 종4품)을 거쳐 소의(정2품)의 품계였던 1688년(숙종14)에 숙종의 첫 아들 윤(경종)을 낳아 희빈에 올랐다. 왕자 윤을 원자(元子)로 책봉하려는 숙종의 뜻에 서인세력이 반발하여 1689년(숙종15) 기사환국이 일어나 송시열 등이 유배·사사되고 남인이 집권하였다. 숙종은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하고 희빈을 3번째 왕비로 책봉하였다.
1694년(숙종20)에 숙빈 최씨 독살사건 등으로 갑술환국이 발생하여 서인이 정권을 되찾으면서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희빈 장씨는 1701년(숙종27) 취선당에서 인현왕후를 무고하고 저주(무고의 옥)한 죄로 43세에 죽임을 당해 양주 인장리(현 구리시 인창동)에 묻혔다가 묘소 자리가 불길하다 하여 1719년(숙종45)에 광주 진해촌(현 광주시 오포읍 문형리)으로 이장되었다. 이후 1969년 6월 서오릉 경내로 다시 이장되었다.
아들 경종이 임금이 된 후 1722년(경종2) 왕의 사친으로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되고, 사당의 이름은 대빈궁, 묘소의 이름을 대빈묘라 하였다. 대빈묘는 후궁 묘제의 형식에 맞게 조성되었는데, 1723년에 세운 묘표에 ‘有明朝鮮國玉山府大嬪張氏之墓(유명조선국 옥산부대빈장씨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한편 희빈 장씨의 라이벌인 숙빈 최씨의 소령원(昭寧園)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있다.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서포 김만중(1637~1692)이 <남정기(南征記)>를 통해 명나라 땅 금릉 순천부를 배경으로 유연수(숙종), 사정옥(인현왕후), 교채란(장희빈) 등을 등장시켜 풍간(諷諫)소설로 풍자한 바 있다.


서오릉의 경릉(敬陵)은 추존 덕종과 소혜왕후 한씨의 동원이강릉이다. 1453년(단종1) 계유정난 2년 후 결국 왕위에 오른 세조(수양대군)는 장남을  의경세자로 책봉하였다. 의경세자(1438~1457)는  20세에 세자 신분으로 요절하였는데, 죽기 전에 늘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혼령에 시달렸다는 얘기가 전해오기도 한다.
7대 세조 다음으로 의경세자의 동생이 8대 임금(예종)이 되었고, 예종 다음에는 의경세자의 차남인 잘산대군이 당시의 정치적 타협 속에 형 월산대군을 제치고 9대 임금(성종)이 되었다. 성종은 즉위 후 아버지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어머니 소혜왕후를 인수대비로 존호를 올렸다.
일반적으로 정자각에서 바라봤을 때 왼쪽(서쪽)에 왕, 오른쪽(동쪽)에 왕비를 모시지만, 경릉은 반대로 오른쪽에 왕, 왼쪽에 왕비를 모셨다. 세상을 떠날 당시 덕종은 세자의 신분, 소혜왕후는 대왕대비의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오른쪽 덕종의 무덤은 의묘(懿墓)로 조성되었기에 석물이 간소한데 반하여 소혜황후는 봉분을 난간석으로 두르는 등 능(陵)의 석물을 갖추고 있다.
참고로 동구릉에도 경릉이 있는데, 동구릉의 경릉(景陵)은 24대 헌종과 정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를 모시고 있다.


순창원(順昌園)은 조선 제13대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장남인 순회세자(順懷世子, 1551~1563) 이부(李暊)와 공희빈 윤씨(恭懷嬪 尹氏, ?~1592)의 합장원이다.
순회세자는 7세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3세에 요절하여 의경세자의 경릉(敬陵) 근처에 묘를 조성하였다. 공회빈은 윤옥(尹玉)의 딸로 1562년 왕세자빈이 되었다. 이듬해 순회세자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덕빈(德嬪)의 칭호를 받았고, 선조 25년(1592)에 43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준비하는 도중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궁궐 후원에 가매장(假埋葬) 되었는데, 이듬해 선조가 시신을 찾으려 했으나 결국 찾지 못하여 빈 재궁(梓宮)이 안장되었다. 고종이 1870년에 순회묘(順懷墓)를 순창원(順昌園)으로 추숭(追崇)하였다.

서오릉(西五陵)은 이름은 서5릉이지만 능 5개소, 원 2개소, 묘 1개소, 초장지 1개소 등 모두 9군데를 탐방할 수 있다. 매표를 하고 동입서출의 원칙에 따라 명릉, 수경원, 익릉, 인성대군 초장지, 창릉, 홍릉, 대빈묘, 경릉, 순창원 순으로 돌아보면 좋다. 특히 19대 숙종 임금과 관련된 곳이 많다. 숙종과 숙종의 왕비들인 인경왕후, 인현왕후, 희빈장씨(20대 경종 생모), 인원왕후와 숙종의 며느리들인 정성왕후(21대 영조 원비), 영빈이씨(사도세자 생모)의 무덤이 모여있다. 서오릉은 경내가 넓어서 제대로 탐방하려면 최소 3시간은 소요된다.

2018년 10월 2일 화요일

일절(一切) vs 일체(一切)

‘일절’과 ‘일체’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표기는 같지만 발음과 뜻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절(一切)은 (부정의 뜻으로) 전혀, 절대로, never의 뜻이다. ‘사생활에 일절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 ‘부당한 청탁은 일절 통하지 않는다.’와 같이 사용한다.
반면 일체(一切)는 모든 것, 전부, all의 의미다. ‘재산 일체를 대학에 기부했다.’, ‘필요한 스펙은 일체 갖추었다.’와 같이 사용한다.

양귀자 작가의 연작소설 <원미동 사람들>에는 일절(一切)과 일체(一切)의 용법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나온다.


싱싱 청과물의 주인 사내는 이제 막 이사 와서 동네 형편은 전혀 모르는 듯했다. 무작정 과일전만 벌였으면 혹시 괜찮았을 것을 눈치도 없이 ‘부식 일절 가게 안에 있음’ 이란 종이쪽지를 붙여 놓고 파, 콩나물, 두부, 상추, 양파 따위의 부식 ‘일절’이 아닌 ‘일체’를 팔기 시작하였다. 참 답답한 노릇이었다. 김포 슈퍼와 형제 슈퍼의 딱 가운데 지점에서, 그것도 결사적인 고객 확보로 바늘 끝처럼 날카로운 두 가게 앞에 버젓이 ‘부식 일절’ 운운한 쪽지를 매달아 놓았으니 무사할 리가 없었다.


이처럼 한자 切은(는) 쓰임에 따라 ‘끊을 절’, 또는 ‘모두 체’로 읽는다.


덧붙이는 글 | 이 포스트는 크와뉴스(http://www.kwanews.com/)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