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5일 화요일

간토학살과 박열-가네코 후미코의 반천황제 투쟁

지난 금요일(9월1일) 문경에서 열린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과 대역사건」 학술회의 일정에 동행했다. 주최 격인 박열의사기념사업회 소위 윗분들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이날로 100주기를 맞은 간토학살이 논의의 중요한 축임에도 행사에서는 학살희생자를 위한 묵념이나 애국가 제창이 식순에서 제외돼 의식있는 일반 참가자들의 반감과 항의를 불러왔다. 기념관에 전시된 자료에도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 표기하고 있어 일반의 오해를 사고 대중에 대한 확장성을 스스로 막아서고 있다.

유토피아(utopia)의 u가 ‘없다’인 것처럼 아나키(anarchy)의 a 역시 ‘없다’는 뜻이다. 때문에 각각 ‘장소가 없다’, ‘지배가 없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아나키즘은 왜곡된 번역 ‘무정부주의’가 아닌 진정한 자유와 평등의 연대와 공동체를 지향하는 ‘무권력주의’ ‘무강권주의’로 보아야 자연스럽다.

재해로 죽었는데도 ‘학살’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이상하다며 사과를 거부하는 日本정부나 세월호, 이태원, 오송, 내성천 등지의 일은 ‘사고’일 뿐이라며 책임을 부정하는 韩国정부나 피차일반 도긴개긴. 우리 시대의 불령한인(不逞韓人)으로 살아야 하는 걸까. 함께하며 바른 소리를 내어주신 모든 분께 고마운 마음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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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289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과 대역사건」 학술회의 열려
간토대학살과 박열-가네코 후미코의 반천황제 투쟁 짚어


박열의사기념사업회(이사장 박인원)는 1일(금), 간토학살 100주기를 맞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과 대역사건」을 주제로 한·일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프로그램은 오전에 문경시 마성면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 여사 묘소를 참배하는 것으로 일정을 시작했다.

가네코 후미코는 남편 박열과 함께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부정하고, 아나키즘(무강권주의) 사상을 전파하였다. 그러던 중 1923년 간토대지진 직후 체포되어 1924년 2월15일 ‘천황폭살’, 이른바 ‘대역사건’으로 기소되었다. 재판과정에서 가네코는 일제의 탄압정책을 비판하고 조선 독립운동을 옹호하였다. 1926년 사형선고를 받고 바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지만 1926년 7월23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

헌화를 마친 참가자들은 기념공원 내 박열의사기념관을 찾아 일제 사법부의 갖은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은 박열-가네코 후미코 부부의 투쟁정신을 살펴보고 박열의사생가지를 돌아봤다.

9월1일(금) 오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과 대역사건」 학술회의에 참석한 일본인 6명(앞줄)이 가네코 후미코 묘소에서 참배하고 있다.

9월1일(금) 오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과 대역사건」 학술회의에 참석한 일본인 6명(앞줄)이 가네코 후미코 묘소에서 참배하고 있다.

오후 1시30분부터 문경관광호텔 무궁화홀에서 열린 학술회의는 박인권 이사장의 개회사와 이용수 경북북부보훈지청장, 이종찬 광복회장(영상), 이문창 선생의 축사를 시작으로 총 3부로 나눠 이어졌다.

우성민 학예연구사의 사회로 진행된 주제발표 순서에는 한·일 양국에서 각각 2명의 발표자가 동시대에 일어난 ‘조선인 학살’과 박열-가네코 후미코의 ‘대역사건’ 간 관계를 조명했다.

첫 발표에 나선 성주현 교수(청암대학교)는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 언론에 비친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주제로 관동대지진 직후의 조선인 학살과 관련 재판, 진상규명에 대한 언론보도를 살폈다. 성 교수는 ‘조선인 폭동설’ 등의 유언비어 전파와 자경단의 학살 양상을 유추할 수 있는 보도 사례도 제시하였다.

이어진 발표에서 김명섭 교수(단국대학교)는 ‘1923년 간토 조선인대학살과 박열사건’을 고찰했다. 대지진으로 인한 공포와 혼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일본당국의 재일한인 학살과 검속 와중에 검거된 박열-가네코 후미코는 폭탄투척계획이 누설돼 대역죄를 적용받았으나, 이를 회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반천황제 투쟁을 벌여나갔음을 강조했다.

세 번째 주제발표에선 가메다 히로시(일본사회문학회)가 ‘1922년 시나노가와 조선인 학살사건과 박열-가네코 후미코. 일제에 대한 투쟁의 시작’에서 천황을 정점으로 한 폭력장치가 피지배민과 피지배지역을 억압했다고 지적하며, 박열-가네코 후미코의 삶은 지금도 계속되는 ‘편견과 차별’에 항거하는 생활양식으로 우뚝 서 있다고 밝혔다.

마지막 주제발표에 나선 구리하라 야스시(도호쿠예술공과대학)는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의 역사적 배경과 가네코 후미코의 사상’을 통해 한국병합(1910)과 러시아출병(1918)의 경험이 홉스적 세계관을 현실화하면서 학살의 배경을 형성했다고 진단했다. 이에 대해 가네코 후미코는 아나키즘과 니힐리즘, 센티멘탈리즘을 뿌리 삼아 다시 없는 ‘지금’을 사는 것으로 대항한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1일 오후, 문경관광호텔 무궁화홀에서 열린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과 대역사건」 학술회의에 참석한 발표자와 토론자들. 왼쪽부터 이양희, 김창덕, 강정훈, 김병기, 성주현, 김명섭, 가메다 히로시, 구리하라 야스시氏

주제발표에 이어진 종합토론은 김병기 편찬위원장(대한독립투쟁총사)이 좌장을 맡아 진행하였고, 세 명의 패널이 차례로 토론에 나섰다.

먼저 강정훈 교수(경상국립대학교)가 1923년 조선인 학살 당시 유언비어가 생성·유포되어 선동·살육으로 이어지는 정황들을 확보·발굴할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으로 서두를 열었다. 이어서 김창덕 이사(국민문화연구소)가 박열 의사의 폭탄 반입 성공 여부를 질문했다. 마지막으로 이양희 교수(충남대학교)는 조선인학살의 역사적 배경 간 연계와 확장을 언급하면서 재향군인회 중심의 자경단에 대한 일본군의 영향을 질의했다.

이날 학술회의에는 국민문화연구소 회원, 한터역사문화연구소 회원, 일본인 연구자 등 60여 명이 함께했다. 박열의사기념관 우성민 학예연구사는 “이번 학술회의는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학살과 박열-가네코 후미코 대역사건에 대해 한일 양국 시민이 서로 의견을 밝히고 공유하며 향후 교류 방안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컸다.”고 전했다.

9월1일(금) 오후, 문경관광호텔 무궁화홀에서 열린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과 대역사건」 학술회의 참석자들이 단체촬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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