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2021.9.26) 오랜만에 TV쇼 진품명품(1292회)을 시청했다. 소개된 작품 중 마지막 3번째 의뢰품인 만해 한용운(1879~1944)의 「님의 沈默」 초간본이 가장 흥미로웠다.
이날 등장한 의뢰품은 1926년 회동서관에서 출간한 초판본이었다. 1933년 조선어학회가 제정한 한글맞춤법통일안 이전에 나온 초판본에서는 긔룬(그리운), 숭(흉), 새암(샘) 같은 고향 충청도 방언과 ‘알ㅅ수업서요’와 같은 한용운 특유의 시어를 확인할 수 있다. 1934년에 발행된 재판본부터는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맞춰 방언이나 개인적인 시어들이 수정되었기에 초간본 어조의 참맛은 많이 잃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나온 초판본 시집은 당시 300부 정도 제작됐는데 지금은 10~20권 정도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돼 희소성을 더하고 있다(최종 감정가 8천만원).
시집은 창작동기를 밝힌 ‘군말’로 시작하여 후기격인 ‘讀者에게’로 끝맺고 있다. 첫 시는 ‘님의 침묵’이고 마지막 시는 ‘사랑의 끝판’이다. 특히, 처음 접하는 ‘군말’의 내용이 새로웠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긔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치니의 님은 이태리다.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긔루어서 이 시를 쓴다.”
김영복 서예·고서 감정위원은 작품 해설 중에 한용운 스님이 입적할 때까지 11년을 살았던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이 남향을 하면 조선총독부와 마주 보게 되는 까닭에 일부러 북향으로 지었다는 일화를 소개했는데… 실상 심우장에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지형 자체가 북사면이어서 남향으로 집을 짓기가 여의치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님의 불굴의 의지와 지사적 풍모가 훼손될 일은 없다.
레이첼 카슨은 봄의 침묵을, 폴 사이먼은 소리의 침묵을, 토머스 해리스는 양들의 침묵을, 폴 데이비스는 우주의 침묵을, 엔도 슈샤쿠는 하느님의 침묵을 그리고 한용운은 님의 침묵을…
스님은 종교적인 절대자로, 일제에 빼앗긴 조국으로, 사랑하는 여인으로 님을 형상화했다. 님의 부재 상황과 그로 인한 슬픔은 해방 70년이 훌쩍 넘도록 해소되지 않고 있다. 허나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붓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다.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붉은색 표지의 「님의 침묵」 초판본(大正15년 5월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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