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8일 화요일

계동길 걷기

조동사의 부정문 만들기①

[편집자 주 : 서울특별시 생활속민주주의학습지원센터가 공모한 「2020년 시민참여 프로그램 지원사업」에 (협)마을대학종로의 ‘기가 막힌 FAKE 뉴스’가 선정되어, 8월27일(목)부터 10월8일(목)까지 5회에 걸쳐 최병현, 변자형, 김수민, 김서중, 윤호창 강사가 주제에 따라 프로그램을 진행하였습니다. 이중 2번째 프로그램인 9월12일(토) 현장답사에 대한 내용을 두 편으로 나누어 송고합니다. 탐방 주제는 「조동사(朝東史)의 부정문(不正文) 만들기」입니다.]

9월12일(토) 오전 10시, 9명의 조동사(朝東史) 순례자가 안국역 3번 출구에 모였다. 안국동(安國洞)은 가회동(嘉會洞), 적선동(積善洞), 서린동(瑞麟洞)과 더불어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동명이 유지되고 있는 몇 안 되는 동네다.

제생원지(濟生院址) 표지석
계동길 입구에 약재를 취급하는 제생원(濟生院)이 있었음을 알리는 표석이 얹혀있다. 본래 제생원이 있는 동네여서 제생동(濟生洞)이라 하였는데 ‘제’와 발음이 유사한 ‘계’를 써서 계생동(桂生洞)으로 바꿔 불렀다. 그러던 것이 1914년 조선총독부의 조선 행정구역 대개편 즈음에 계생동이 기생동(妓生洞)을 연상시킨다는 일각의 주장에 따라 ‘계동’으로 줄여 부르게 되었다.

제생원지 표석 뒤편 옛 휘문중·고등학교 운동장이었던 너른 공간은 현재 현대그룹 빌딩군(群)이 자리하고 있다. 현대빌딩 12층은 2003년 8월 당시 5억 달러 대북송금과 문광부 박지원 장관 150억 비자금에 관련돼 검찰 조사를 받고 나온 후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투신한 것으로 보도된 곳이다.

표석 맞은편 계동길 초입은 한학수옛집이다. 1945년 8월15일 광복 당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된다. 이에 자극받은 우익 인사들이 3일 후인 8월18일 이곳 한학수가옥 사랑채에서 사회민주주의를 강령으로 우익진영 최초의 정당인 고려사회민주당(高麗社會民主黨)을 창당하였다. 
한학수(韓學洙)는 1905년 11월 일본제국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중명전(重眀殿)에서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을 강요할 때 끝까지 저항했던 의정부 참정 한규설(韓圭卨, 1856~1930)의 손자 되는 사람이다. 한학수의 옛집이 그대로 남아 현재는 카페 어니언(onion)으로 운영되고 있다.

해방 후 우익진영 최초의 정당인 고려민주당(高麗民主黨)이 이곳 한학수의 집에서 발기했다.

어니언 카페에서 계동길을 100m쯤 걸어 올라가면 우편에 경우궁지 안내판을 볼 수 있다. 경우궁(慶佑宮)은 조선 23대 순조(純祖)의 생모 수빈박씨(綏嬪朴氏)의 신위를 모셨던 곳이다. 갑신정변(1884) 때에는 고종이 잠시 변(變)을 피하여 경우궁으로 이어(移御)하기도 했다. 경우궁은 현재 궁정동 육상궁(칠궁) 내에 봉안돼 있다.
경우궁을 경운궁과 헷갈려하는 경우가 많다. 경운궁(慶運宮)은 정희왕후 윤씨와 한명회의 야합으로 친동생 잘산대군(성종)에게 왕위를 도둑맞은 월산대군의 개인저택이었다. 1618년 광해군이 계모인 인목왕후(소성대비)를 경운궁에 유폐했을 때는 ‘서궁(西宮)’으로 불렸고, 종국에는 1907년 퇴위당한 고종의 궁호(宮號) 덕수(德壽)를 따라 ‘덕수궁’으로 불리게 된다.

경우궁지 안내판 맞은편은 보헌빌딩이다. 이곳은 본래 일제강점기 마포 거부 임종상이 지은 저택이었는데, 1945년 해방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청사로 사용됐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 등록문화재 제도가 시행된다는 소문이 돈 이후 청사 건물이 헐려버렸다. 보존·관리에 대한 법적 강제성이 없는 등록문화재 제도의 맹점으로 숱한 사적(史跡)이 사라지고 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본부가 있었던 건물이 헐리고 보헌빌딩이 들어서 있다.

앞쪽으로 40m쯤 걸으면 북촌문화센터가 나온다. 구한 말 탁지부(현 기획재정부) 재무관을 지낸 인물의 이름을 따서 ‘민형기가옥’으로 부르던 곳인데, 민형기의 며느리 이규숙을 지칭하여 ‘계동마님댁’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21년경 대궐 목수가 창덕궁 후원의 연경당(演慶堂)을 본떠 지었다고 전한다. 내외담이 보이지만, 실제는 툇마루가 사랑채와 안채를 이어주고 있다. 가옥은 2006년 3월 등록문화재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계동마님 이규숙은 1935년까지 이곳에서 살다가 옆 동네인 재동으로 이사를 나갔다.


최소아과의원이 있던 자리
지척에 보이는 2층짜리 붉은 벽돌건물은 1963년부터 2017년까지 54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최소아과의원 자리이다. 2018년 최익순 원장이 작고한 후 옷가게를 거쳐 지금은 이잌 와인바가 들어서 있다.

이잌 맞은편에 승문원지 석판이 보인다. 조선시대 외교에 관한 문서를 담당한 승문원(承文院)은 시대별로 여러 터를 옮겨 다니다가 정조 때 지금의 원위치로 회귀했다.

방향을 바꿔 창덕궁1길 언덕을 올라간다. 언덕 좌우편으로 카페와 음식점들이 늘어서 있다. 잔소리약국과 원조부대찌개가 영업하는 건물은 당진 출신 심우섭(沈友燮, 1890~1946)의 집이 있던 곳이다. 휘문의숙을 1회로 졸업한 그는 매일신보 기자로 근무하면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과 자주 면담하였고, 태평양전쟁 전시동원을 선전하는 일에 앞장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심우섭의 동생인 감리교 목사 심명섭도 친일파로 분류돼 있다. 이들은 「상록수」의 작가 심대섭(심훈)의 형들이다. 형제가 추구했던 ‘그날’은 이리도 달랐다.

한성부동산, 利밥 건물은 고양 출신 홍증식(洪增植, 1895~?)의 집터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영업국장을 역임했고, 1925년 고려공산청년회 활동으로 체포된 전력이 있다. 해방 후 월북하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선전부장을 지냈다.

왼쪽부터 여운형 집터, 홍증식 집터, 심우섭 집터

대리석 단층의 안동칼국수 건물은 몽양 여운형의 계동집이었다. 중국 시절부터 무려 12번의 테러를 당한 여운형은 명륜동 정무묵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다. 1947년 7월19일 오후, 성북동에서 재미 조선사정협의회장 김용중을 만난 뒤 옷을 갈아입기 위해 계동집으로 향하던 여운형은 혜화동 로터리에서 평북 출신 한지근의 흉탄을 맞고 운명한다. 몽양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좌우합작운동을 좌절되고 시국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으로 급선회하게 된다.
8월3일 영결식날, 1936년 당시 점령국을 대표하여 베를린올림픽에 나서는 것을 꺼려했을 때 여운형의 독려에 힘입어 출전, 결국 올림픽 챔피언의 영예를 안은 손기정이 여운형의 관을 운구했다. 손기정과 관련된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는 폐간되고 여운형은 사장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서울한옥지원센터
여흥민씨삼방파종중이 있는 계동2길을 지나서 왼편으로 꺾어 들어가 서울한옥지원센터, 북촌마을서재, 작은쉼터갤러리를 한꺼번에 둘러본다. 2015년 9월 문을 연 서울한옥지원센터는 문화재수리기능자로 구성된 한옥장인들이 한옥 대중화와 한옥산업 활성화를 목표로 한옥응급센터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자비손한의원을 경유, 다시 계동길에 접어들어 계동피자 왼편 북촌로6길로 진입하면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6호 소목장 심용식의 청원산방(清圓山房)을 만날 수 있다.
재동초등학교 북쪽 담장을 면한 곳은 식민사학의 태두 이병도(李丙燾, 1896~1989)의 집터이자 진단학회가 출범한 터전이다. 한때 철거 위기에 처했으나 인간문화재인 대목장 정영진의 손을 거쳐 지금은 한옥 부티크 호텔 락고재(樂古齋)로 재탄생했다. 일제에 부역했던 이들에게 진단(震檀), ‘벼락 박달나무’는 어떤 의미였을까를 더듬어보는 엄숙한 공간이다.

북촌로6길을 돌아 나와 계동길에 재진입하여 걸어 올라가면 고깃집 중경삼림(重慶森林) 맞은편 골목 끝에 원파선생구거(圓坡先生舊居)가 보인다. 김성수의 백부(伯父)이자 양부(養父)인 원파 김기중의 옛집이다. 김기중은 경영난에 빠진 중앙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차례로 인수하여 김성수에게 운영을 맡겼다.

짱구식당 맞은편 대동세무고등학교 진입로 오른편엔 김성수옛집이 있다. 인촌 김성수(金性洙, 1891~1955)는 1915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넘겨받아 교장을 지냈고, 1919년 10월에 경성방직을 설립했다. 이듬해인 1920년에는 양기탁·유근·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1932년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를 인수했다. 1930년대 김성수는 실력양성론에 따른 자치운동을 지지했는데 해방 후에는 제2대 부통령을 역임하는 등 교육자·언론인·기업인·정치인으로 회자됐다. 김성수의 이름은 2005년경부터 이런저런 친일명단에 수록되는데, 2017년 4월 대법원은 그의 친일 행위를 확정했다. 이후 2018년 2월 국무회의에서 건국공로훈장 복장(현재의 대통령장) 서훈 취소가 의결됐다.

계산(桂山) 정상의 대동세무고등학교 운동장 자리에는 1950년대까지 일제강점기에 왕실 살림을 관장한 이왕직 장관(궁내부대신) 관사가 있었고, 민영환의 후손들이 거주했다는 사실이 민병진(민영환의 손자)의 구술을 통해 밝혀졌다.

청전 이상범을 사사한 제당 배렴(裵濂, 1911~1968)이 1959년부터 말년까지 살던 배렴가옥은 1926년 무렵 지었다고 추정된다.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바깥채가 서로 마주 보는 큰 ㅁ자형 한옥으로 등록문화재 제85호에 올라있다. 배렴 이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상민속학자로 알려진 석남 송석하(宋錫夏, 1904~1948)가 살았다고 해서 ‘송석하가옥’으로도 불린다.

배렴가옥에서 2시 방향 30m 지점은 한용운옛집이다. 승려이자 시인,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이 1918년 9월 월간지 「유심」을 창간하고 제3호까지 발행한 유심사지(惟心社址)이기도 하다. 한옥게스트하우스 만해당, 유심당을 거쳐 지금은 일반 가정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골목 안쪽에 자그마한 조계종 격외사(格外寺) 도량이 앉아 있다. 근방에서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아름답고 특색있는 한옥군(群)을 볼 수 있다.

2013년에 복원된 석정보름우물
계동4길 진입로에 석정보름우물이 있다. 정조 임금 때 천민 망나니의 딸이 언감생심, 병조판서의 서자를 사모하여 상사병을 앓다가 종국엔 도령을 해친 후 시신을 우물에 유기하고 자신도 뒤따라 투신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부터 우물물이 15일 동안은 맑고, 15일 동안은 흐려져서 ‘보름우물’이라 불렀다 한다. 보름우물은 차고 맛이 좋아 궁에서도 길어갔던 조선시대 소문난 명천(名泉)이었다.
또한 보름우물은 초창기 한국 천주교 역사와도 관련이 깊다. 1794년 청(清)에서 입국한 최초의 외국인 사제 주문모(야고보, 1752∼1801) 신부가 1801년 새남터에서 순교하기 전까지 계동 최인길(마티아, 1765∼1795) 집에 은거하면서 조선땅 첫 미사를 봉헌했고, 이 우물물로 세례를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요컨대 보름우물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성수이자 포교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천주교 박해 당시 많은 순교자가 발생하자 보름우물이 핏빛을 띠고 물맛이 써져서 한동안 사람들이 먹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계동길과 창덕궁길이 만나는 곳에 중앙고등학교 정문이 보인다. 1919년 1월에 와세다대학교 유학생 송계백이 이광수가 작성한 「2.8독립선언서」 초안을 들고 선언서를 인쇄할 수 있는 활자와 운동자금을 구하기 위해 중앙고보 교사로 근무중인 보성고보 선배 현상윤을 찾아 중앙고보 숙직실을 찾아오면서 3.1만세운동의 서막이 열리게 된다.

중앙고는 원조 한류드라마 「겨울연가」에서 강준상(배용준 분)이 다니던 학교로 등장하는데, 인근의 정유진(최지우 분)네 집터와 더불어 고하길과 북촌3경 일대가 겨울연가 촬영지여서 욘사마와 지우히메를 추억하는 일본 관광객이 꼭 찾는 명소로 오랜기간 유명세를 치렀다.

창덕궁길 서쪽 가회동 5-7번지 양지바른 언덕은 지도에 ‘일민문화기념관’으로 표시된 곳이다. 일민 김상만(金相万, 1910~1994)은 김성수의 장남이자 김병관의 부친이다. 재단은 김상만의 유지를 따라 일민문화상(구 일민예술상), 일민미술관을 운영하며 문화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1994년 설립됐다고 한다. 재단 대문에 2008년 작고한 ‘金炳琯’ 이름의 문패가 걸려 있다.

탐방은 북촌로를 지나 가회동으로 이어진다. (2편에 계속…)

덧붙이는 글 | 이 포스트는 종로마을N에도 실렸습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