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을 내어 별내면 덕송리의 흥국사에 올라갔다.
신라 제26대 진평왕 21년(599)에 세속5계로 유명한 원광법사가 수락산(水落山) 기슭에 수락사(水落寺)를 창건하였다. 그후 조선조에 들어와 선조가 왕위에 오른 이듬해(1568)에 생부인 덕흥대원군의 원당(願堂)으로 삼으면서 흥덕사(興德寺)로 사액하고 크게 충수하였기에 민간에서는 일명 ‘덕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인조 4년(1626)에 흥국사(興國寺)로 변칭되었고, 정조 14년(1790)에는 승풍(僧風)을 정화하고 승려를 감독하던 오규정소(五糾正所)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으나, 긴 역사만큼이나 소실과 중수를 반복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 봉선사의 말사로 되어 있는데, 연륜에 비해 경내가 협소하고 국보 같은 문화재도 없어 부침이 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석가모니를 큰 영웅(大雄)으로 모신 불단(佛壇)이 대웅전인데, 흥국사는 대웅보전(大雄寶殿)으로 격을 높여부르고 있다. 정면3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 다포양식으로 사찰건물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잡상이 5개나 올려져 있다.(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6호)
코앞으로 다가와서인지 수능대박을 기원하는 펼침막도 걸려 있었다.
영산전(靈山殿)은 석가모니의 설법장인 영산회상(靈山會上圖)에서 유래한 전각인데, 특이하게도 단청(丹靑)이 칠해지지 않은 공포(栱包)가 많이 보였다.
작은 규모의 범종각(梵鐘閣)에는 법고(法鼓)·운판(雲板)·목어(木魚)·범종(梵鐘)의 불구사물(佛具四物)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석가불(釋迦佛)이 유일불인 소승불교와 달리 대승불교에서는 수많은 부처와 보살의 존재를 믿게 되어 삼천불(三千佛) 사상까지 생겨나서 많은 불보살들은 각기 별개의 불보살전을 갖게 되었다. 작은 불상들 앞에 기복동전과 일종의 문댐돌도 보인다.
신라 제26대 진평왕 21년(599)에 세속5계로 유명한 원광법사가 수락산(水落山) 기슭에 수락사(水落寺)를 창건하였다. 그후 조선조에 들어와 선조가 왕위에 오른 이듬해(1568)에 생부인 덕흥대원군의 원당(願堂)으로 삼으면서 흥덕사(興德寺)로 사액하고 크게 충수하였기에 민간에서는 일명 ‘덕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인조 4년(1626)에 흥국사(興國寺)로 변칭되었고, 정조 14년(1790)에는 승풍(僧風)을 정화하고 승려를 감독하던 오규정소(五糾正所)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으나, 긴 역사만큼이나 소실과 중수를 반복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 봉선사의 말사로 되어 있는데, 연륜에 비해 경내가 협소하고 국보 같은 문화재도 없어 부침이 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석가모니를 큰 영웅(大雄)으로 모신 불단(佛壇)이 대웅전인데, 흥국사는 대웅보전(大雄寶殿)으로 격을 높여부르고 있다. 정면3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 다포양식으로 사찰건물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잡상이 5개나 올려져 있다.(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6호)
코앞으로 다가와서인지 수능대박을 기원하는 펼침막도 걸려 있었다.
영산전(靈山殿)은 석가모니의 설법장인 영산회상(靈山會上圖)에서 유래한 전각인데, 특이하게도 단청(丹靑)이 칠해지지 않은 공포(栱包)가 많이 보였다.
작은 규모의 범종각(梵鐘閣)에는 법고(法鼓)·운판(雲板)·목어(木魚)·범종(梵鐘)의 불구사물(佛具四物)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석가불(釋迦佛)이 유일불인 소승불교와 달리 대승불교에서는 수많은 부처와 보살의 존재를 믿게 되어 삼천불(三千佛) 사상까지 생겨나서 많은 불보살들은 각기 별개의 불보살전을 갖게 되었다. 작은 불상들 앞에 기복동전과 일종의 문댐돌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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