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31일 토요일

끝도 없는 긴긴 밤을 살아가는 나의 산하

어제 송년회는 작은 음악회이기도 했다. 「임진강」 「철망 앞에서」와 같은 통일 염원이 담긴 노래는 물론 「로망스」 「슬라바송」(당신의 의미) 「마누라송」(라 트라비아타 中 축배의 노래) 「월량대표아적심」(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하죠) 「라 캄파넬라」(작은 종) 같은 클래식과 팝을 넘나드는 다국적곡들이 선보였다. 내 이름이 호명됐을 때 잠깐 고민하다가 오래전 불렀던 노찾사 1집의 「산하」를 떠올려 최대한 구수하게 부르려 노력했다.

겨울 가고 봄이 오면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길게 누운 이 산하는 여윈 몸을 뒤척이네
피고 지는 네 얼굴에 터질듯한 그 입술에
굵은 비가 몰아치면 혼자 외로이
끝도 없는 긴긴 밤을 살아가는 나의 산하

하얀 고개 검은 고개 넘어가는 아리랑고개
눈물 타령 웃음 타령 휘어 감는 사랑노래
피고 지는 네 얼굴에 터질듯한 그 입술에
굵은 비가 몰아치면 혼자 외로이
끝도 없는 긴긴 밤을 살아가는 나의 산하

붉은산과 흰옷이 그리웠던 망나니 삵의 심정이 느껴진달까. 이 노래를 부를 때 우리 조국 산하에 짙은 동정과 연민의 감정이 배어 나온다. 세계 어디에 있어도 어디에 살아도 우리는 한국인이다. 여기서가 끝이 아님을 기쁨처럼 알아 날마다 또 다른 꿈을 꾸어야겠다.


2022년 12월 22일 목요일

두음법칙 적용

내년 2월에 졸업하는 중3 어머니들이 마지막 국어 지필시험을 치렀다. 시험 범위에는 △남한의 표준어와 북한의 문화어의 차이점 △남북한간 언어 차이가 발생하는 요인 △남북한의 언어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이 포함됐다.

12번과 13번은 두음법칙과 관련한 문항이다. 남한 표준어는 1933년 조선어학회가 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따라 두음법칙을 철저히 적용한다. 반면 북한 문화어에서는 북한정권 수립 당시까지는 두음법칙이 존재했지만, 조선어신철자법(1948)과 조선어철자법(1954)을 통해 두음법칙을 쓰지 않고 한자 원음대로 표기하고 발음한다. 협의를 통해 남북 언어규범이 하나의 방안으로 통일될 때까지는 량심(양심), 력사(역사), 로인(노인), 류행(유행) 등으로 사용할 당위가 없다.

13번에서 북한에서는 ‘여자’를 어떻게 읽고 쓰는지를 물었는데, 어머니 한 분이 ‘에미나이’라고 쓰셔서 나중에 모두가 한바탕 웃기도 했다. 두음법칙의 미적용은 끝말잇기에서 게임종결자로 작용하기도 한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한글맞춤법 통일안이 제정된 1933년 이전의 한용운의 시는 「님의 침묵」(1926)으로, 이후의 백기완·김종률 곡은 「임을 위한 행진곡」(1981)으로 쓰는 것이 문법적으로는 맞는다고 한다. 문학적인 면을 고려하면 「님을 위한 행진곡」도 가능하겠다.


2022년 12월 17일 토요일

통과의례

「막강한 빌런의 등장 → 재난과 시련 → 각성 및 파워업 → 전투 → 극복과 문제해결 → 사후관리 미진 → 빌런의 부활」로 반복되는 서사는 디씨나 마블의 단골 레퍼토리지만… 우리 사회현상이나 현실정치에서도 어느덧 익숙한 장면이 됐다. 이 무한루프에 갇힌 정형적 레파토리를 반드시 깨야만 한다.

2022년 12월 9일 금요일

한그루 소나무… 일송(一松) 김동삼의 삶

헤아려보니 일송 김동삼 선생의 함자를 알게 된 건 2014년 처음으로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을 탐방하면서였다. 1931년 하얼빈에서 피체된 후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37년(4.13)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김동삼 선생의 시신을 만해 한용운 스님이 모셔다 오일장을 치르고 유해를 한강에 뿌리며 서럽게 울 때, 홍안의 문학청년 조지훈 시인도 그 옆에 서서 함께 울었다고 했다.

남만주의 호랑이(南滿猛虎) 김동삼(金東三, 1878~1937) 선생은 1907년 안창호·양기탁·이동휘·이동녕 등이 창건한 비밀결사 신민회에 참여한 후 1911년 만주로 건너간 이래 경학사(사장 이철영), 부민단(초대단장 허혁,  2대단장 이상용), 서로군정서(독판 이상룡), 신흥무관학교(교장 이시영), 무오독립선언(작성자 조소앙), 국민대표회의(의장), 민족유일당촉진회(위원장) 등에서 활약한 독립운동의 거목이지만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지난 4월13일 발족한 일송김동삼선생기념사업회가 첫번째 학술대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잠깐 짬을 내 효창동 백범기념관에 다녀왔는데 이덕일, 김병기, 이시종의 발제에서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이런 일정한 자리(서대문형무소)에서 죽게 되는 것도 과분한 일이다. 독립군이라면 대개 풀밭이나 산 가운데서 죽는 것이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는 한그루 소나무 일송(一松) 김동삼의 유언을 되새겨볼 때 이명박정부에서 법무부장관을 지낸 검사 출신 인사와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인물이 기념사업회장과 토론자로 초빙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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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183
https://sisibibi.blogspot.com/2022/06/blog-post_25.html

일송 김동삼 선생 기리는 첫번째 학술대회 개최
만주의 독립운동 통합을 위한 노력 조명


일송김동삼선생기념사업회(회장 김경한)는 9일(금) 오후 2시, 백범김구기념관 대회의실에서 「일송 김동삼과 민족 통합의 길」을 주제로 첫 학술대회를 열었다.

첫 발제는 ‘일송 김동삼과 국민대표회의’를 주제로 이덕일 소장(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이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6개월간 열린 국민대표회의의 의의를 강조하며, 의장으로 선출된 김동삼의 활약상을 조명했다.

두번째 발제에는 김병기 위원장(대한독립운동총사 편찬위원회)이 ‘만주지역의 민족유일당운동과 김동삼’을 주제로 발표에 나서, 1920년대 중반 이념과 노선을 초월해 전개된 민족유일당 결성 움직임을 소개했다.

마지막 3주제는 이시종 사무차장(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이 대종교 및 서간도에서의 활동과 관련한 ‘일송 김동삼의 역사의식과 독립투쟁’을 발표했다.

이어 김창기 전 편집국장(조선일보), 김민아 과장(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조의행 교수(서울신학대)가 각 주제발표에 대한 토론을 맡았다.

김동삼의 손녀 김복생氏를 포함해 50명의 청중이 함께한 이날 학술대회는 이덕일 역사TV가 유튜브 생중계했다.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1878~1937)은 1911년 만주 망명 이후 1931년 하얼빈에서 체포돼 1937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기까지 ‘만주벌 호랑이’로 불리며 독립투쟁을 주도하면서 민족유일당운동에 힘쓴 인물이다. 지난 4월13일(수) 일송 김동삼을 추앙하고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한 기념사업회가 발족했다.

9일 오후 개최된 일송김동삼선생기념사업회 제1회 학술대회에서 김병기 위원장이 2주제인 ‘만주지역의 민족유일당운동과 김동삼’을 발표하고 있다.


2022년 12월 8일 목요일

만홍시가 晩紅枾歌

흰 책장 만홍감이 고와도 보이는데
막걸리 두어 잔에 자셔도 좋으련만
챙겨가 뵈올 스승은 차마 떨쳐 가셨네


2022년 12월 6일 화요일

문해학습자를 위한 「서울형 읽기 교재」

토요일(12.3) 오전과 오후, 서울지역 문해교육 교·강사 대상의 보수교육에 출석했다. 졸업장을 취득하기 위해 필수적인 ‘학력인정 포트폴리오’ 준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신규기관이나 초임강사에게는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이날 배포 예정이었다가 표지 등의 문제로 맛보기만 선보인 「서울형 성인 문해교육 읽기 교재」가 궁금하다. 시(40편)와 이야기(동화 30편), 설명문(13편)으로 편성된 서울형 교재는 생활 경험과 연관된 학습 제재를 바탕으로 성인문해 학습자의 특성을 고려해 읽기의 유창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개발되었다고 한다. 특히, 3권 설명문에 제시된 소주제 △서울의 궁궐이야기 △서울의 역사이야기 △서울의 음식 골목 △한국의 밥상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탑재됐을지 어서 확인해보고 싶다.

(느린 학습자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문’자‘해’득 능력과 사회적·문화적으로 요청되는 기초생활능력 등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문해교육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이며 국민의 학습기본권으로 접근해야 옳다. 이제 12월 안으로 기말시험을 마치고 중3 졸업사정을 준비해야 한다. 바쁜 와중에도 중심 잃지 않기, 낭만 잃지 않기…

공부도 식후학(食後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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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180

2022년 서울특별시 문해교육 관계자 보수교육 운영
서울특별시문해교육센터 주관, 문해담당자 전문성 강화 프로그램

서울시평생교육진흥원은 12월3일(토) 바비엥2 교육센터(중구 통일로 114)에서 「2022년 서울특별시 문해교육 관계자 보수교육」을 실시했다.

올해 보수교육은 서울특별시문해교육센터(센터장 민병철) 주관으로 △문해교육 교수법 심화 △글읽기·글쓰기 지도론 심화 △수업운영 심화 등 3가지 주제로 진행됐다.

오전 강의는 푸른어머니학교 문종석 교장이 ‘문해교육 학력인정 프로그램 포토폴리오 구성과 실제’를 주제로 강의했다. 문 교장은 점수화 중심의 상대평가를 대체하는 ‘학습과정의 결과물’로써의 진단평가, 형성평가, 총괄평가의 다양한 사례를 접목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오후 강의에는 이화여대 국어문화원 신연수 연구원이 ‘한국어의 어문 규범과 문해교사가 알아야 할 한글 맞춤법’을 제시했다. 신 연구원은 서술어 관련 10가지, 어휘 관련 5가지 맞춤법 예시를 실연하면서 참가자들의 열띤 호응을 끌어냈다.

마침 강의는 전국문해기초교육협의회 김인숙 회장이 나서 묵독보다 음독을 강조하는 ‘읽기의 유창성 향상을 위한 수업 전략’을 발표했다. 김 회장은 문해학습자를 위한 새로운 읽기 교재의 개발 배경과 방향, 특징을 언급하여 「서울형 성인 문해교육 읽기 교재」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했다.

이날 교육에 참여한 70여 명의 일선 문해담당자들은 “이번 보수교육이 학력인정 포트폴리오 구성과 창의적 수업 설계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문해교육 종사자로서 사명감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면서 “앞으로도 생활 밀착형 콘텐츠의 개발과 현장 친화적인 정책의 연구에 힘써주길 바란다”라고 입을 모았다.

문의: 서울특별시 문해교육센터 ☎02-719-6417 

문해학습자를 위한 순수한 「서울형 읽기 교재」는 글의 양이 적고 서울지역 학습자에게 익숙한 생활공간인 ‘서울’을 소재로 접근하여 관심을 유발하도록 개발됐다는 설명이다.


2022년 12월 4일 일요일

소오강호 갑신정변(笑傲江湖 甲申政變)

138년 전인 1884년 12월4일(음력 10월17일) 밤10시. 급진개화파가 우정국(郵政局) 낙성식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켰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은 서양의 문물을 수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입헌군주제 정치 구조를 지향함으로써, 근대 국민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최초의 정치개혁 운동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당시 농민들의 염원이었던 토지소유 문제에 대한 뚜렷한 해결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개혁의지는 근대적이었지만, 일반 백성을 개혁의 주체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추진하여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또한 청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으나 유사시 지원을 하겠다는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밀약 등 일본의 침략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외세에 의존하여 정변을 일으키는 한계를 노출했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보겠다고 일어섰다(1884)가 48시간 만에 실패하고 10년 만(1894)에 자객(홍종우)에게 암살된 후 부관참시까지 당한 혁명가 김옥균은 1895년 일본의 청일전쟁 승리 후 관작을 회복했다. 그리고 1910년 경술국치 두달 전에 대광보국숭록대부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고 충달(忠達) 시호를 받았다. 참으로 소오강호(笑傲江湖)의 실사판 삶이다.

1884년 11월18일, 우정총국은 왕실 약재를 담당하던 전의감(典醫監) 터에서 우체업무를 시작했다. 개국 17일만인 12월4일 저녁, 우정총국 낙성식을 기화로 김옥균·박영효·서재필·서광범·홍영식 등 개화당이 수구당 민씨 외척 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수립할 목적으로 정변을 일으킨다. 하지만 3일 만에 끝이 나면서, 홍영식은 죽고, 나머지는 일본으로 도주했다.

고난도로 어렵게 출제된 적은 없지만, 검정고시를 대비해야 하는 입장에서… △청과 사대관계 청산 △입헌군주제 수립 시도(내각 중심의 정치) △근대적 경찰제 시행 △문벌의 폐지, 인민 평등권의 확립(신분제 철폐)과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지조법(地租法) 개혁 △혜상공국 철폐(자유로운 상업 발전) △재정의 일원화 등을 시도한 갑신정변의 14개조 정령(1884)은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안 12개조(1894), 관민공동회의 헌의 6조(1898)와 비교해 수업해야 한다.

①청에 잡혀 간 흥선대원군을 곧 돌아오게 하며, 종래에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②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 ③지조법을 개혁해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한다. ④내시부를 폐지하고 그중에 재능 있는 자만을 등용한다. ⑤전후 간사한 관리와 탐관오리 가운데 현저한 자를 처벌한다. ⑥각 도의 환상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 ⑦규장각을 폐지한다. ⑧급히 순사를 두어 도둑을 방지한다. ⑨혜상공국을 혁파한다. ⑩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와 옥에 갇혀 있는 자는 그 정상을 참작하여 적당히 형을 감한다. ⑪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되,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급히 설치한다. ⑫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통할한다. ⑬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⑭의정부, 6조 외의 모든 불필요한 관청을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이것을 심의 처리하도록 한다.

지금 보아도 상당수가 여전히 유효한 개혁안이다. 급진개화파(문명개화론)와 온건개화파(동도서기론)의 분화, 정변의 최고참 김옥균(34), 막내 행동대원 서재필(피제손·20), 통명전에서 폭약을 터뜨린 궁녀 고대수(顧大嫂·42), 다케조에초(죽첨정·竹添町) 지명을 탄생시킨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와 관련한 에피소드는 시간이 빠듯하여 검정대비 수업시간에는 이야기할 수 없다.

한성순보(漢城旬報)는 박문국이 1883년부터 1884년까지 순 한문으로 발행하였다. 10일 간격으로 발행했는데, 정부의 정책을 홍보하는 관보였다. 갑신정변으로 한성순보가 폐간된 후 그 후신으로 박문국이 1886년에서 1888년까지 국한문혼용체로 한성주보를 발행하였다. 탑골미술관이 있는 서울노인복지센터 자리에 한성주보를 발간한 박문국이 있었다.


2022년 12월 3일 토요일

퇴진이 평화다

똑같은 공무원… 똑같은 행정, 똑같은 경찰, 군대, 외교관, 똑같은 의료인데 불과 반년 여 만에 이렇게나 급전직하 하향 평준화가 될 수 있다니… 내겐 그저 용산막부(冗散幕府)의 막장쇼군일뿐 굥은 통령(統領)도 아니다.
1차(8.6), 2차(8.13), 11차(10.22)에 이어 오늘 17차(12.3) 촛불에 함께했다. 어제밤부터 오늘밤까지 16강 진출, 하얀 첫눈, 문해보수교육, 촛불행진까지 크레센도로 점점 커지는 1타4피의 극적인 여정을 보내는 중…

언론개혁시민연대 최성주 공동대표님과 한 컷. 촛불 현장에서는 예기치 않게 반가운 분을 조우하는 쏠쏠한 재미가 있다. 사진은 김미경 피디님이 찍어주심.

페친 조종주 선생님이 운영하는 촛불다방에서 내어주신 대추생강차로 마음마저 따듯해진다.


2022년 11월 29일 화요일

바보라 불러다오… 노인동맹단 왈우(曰愚) 강우규의 항일투쟁

왈우(曰愚) 강우규(姜宇奎, 1855~1920) 의사는 평남 덕천 사람이다. 함남 홍원에서 한약방과 잡화점을 운영하던 차에 1908년 성재 이동휘(1873~1935)를 만나면서 감화되어 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계몽운동을 펼쳤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1911년 북간도로 망명했다. 1914년 북우(北愚) 계봉우(1880∼1959)가 왈우의 블라디보스토크 집에 2개월간 유숙하며 저술한 「만고의사 안중근전」을 보고 가슴 속에 새기면서 훗날의 의거를 다짐한 것으로 전한다.

1919년 3월26일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된 ‘대한국민 노인동맹단’에 가입해 요하현 지부장으로 활동했다. 40세에서 70세 사이의 노인(당시 기준)들로 구성된 노인동맹단의 임무는 실전에 참여하는 청년 독립투사들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왈우는 3·1운동으로 경질되는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후임으로 오는 총독을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확보한 수류탄을 숨겨 원산부로 반입했다.

1920년 9월2일, 65세의 왈우는 경성부 남대문정거장에서 사이토 마코토 신임총독의 마차에 투척하였는데 수류탄은 마부 앞 7보 떨어진 곳에서 폭발해 37명에게 중경상을 입혔지만 사이토 폭살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의거 직후 혼란한 군중틈을 빠져 나온 왈우는 결연한 의지로 재거사를 계획하였으나, 거사 15일 만인 9월17일 종로구 가회동 장익규의 집에서 조선인 순사 김태석에게 체포되었다. 일제의 법정에서도 꼿꼿한 기개를 보여준 왈우는 결국 사형을 언도 받고 같은해 11월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 (단두대상 유재춘풍 유신무국 기무감상) “단두대 위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 왈우가 순국하며 남긴 사세시(辭世詩)가 옛날같이 쓸쓸하다.

[위]의거 현장인 옛 서울역사 앞에는 2011년 9월2일, 왈우 강우규 의사의 동상이 세워졌다. [아래]국립서울현충원 순국선열 강우규의 묘(독립유공자-40). 정부에서는 왈우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단두대상 유재춘풍 유신무국 기무감상) “단두대 위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

왈우의 남대문역 투탄의거는 3·1운동 이후 감행된 최초의 의열투쟁으로, 독립운동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노인에 의한 폭탄 투척 의거였다. (요즘으로 치면 80세 즈음으로 볼 수 있는) 65세의 노인이 항일운동 최전선에 나선 이유는 바보(愚-어리석을우)라 불러달라(曰-가로왈)는 호(曰愚)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아마도 조선의 청년들에게 ‘망국’이라는 굴레를 씌운 기성세대의 어리석음을 만회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왈우의 의열투쟁정신은 의열단과 한인애국단, 흑색공포단 등으로 이어지며 김익상, 김상옥, 나석주, 박열, 조명하,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원심창과 같은 열혈 조선 청년들의 모범이 되었다.

왈우 강우규 의사의 순국일(11.29)인 오늘 우리 사회의 참어르신을 찾는다. 진영논리에 매몰돼 가짜뉴스를 공유하며 확증편향을 불리는 태극기 할배들이 득실댈 뿐 사회갈등을 보듬고 아픔을 치유해야할 정치권 수뇌(首腦)는 물론 종교계 장상(長上) 중에서도 ‘어른’으로 추앙하고 따를 만한 지혜로운 노인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 현실이 씁쓸하다.

2022년 11월 27일 일요일

다시 꿈꾸는 백년

한자 투성이에다 붙여쓰기를 한 기미독립선언문은 의미 파악은 물론 읽는 것도 쉽지 않다. ― “吾等은玆에我朝鮮의獨立國임과朝鮮人의自主民임을宣言하노라此로써世界萬邦에告하야…”
국한문 혼용의 강건체 문장을 한글로 옮기고 띄어쓰기를 적용하면 그럭저럭 읽기는 가능하지만, 여전히 오등(吾等), 자(玆), 차(此)와 같은 어휘가 독해를 방해한다. ― “오등은 자에 아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딸깍발이 이희승 선생이 국역한 문장은 이해가 쉽다. ―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국에 알리어…”

3·1만세운동 100주년을 앞둔 2018년 9월18일, 서울지하철 3호선 안국역이 독립운동 테마역으로 재탄생하면서 △100년 하늘문 △100년 계단 △100년 기둥 △100년 강물 △100년 헌법 △100년 승강장 △100년 걸상 △3·1운동 청색지도 등이 설치됐다. 특히 19190301–20190301을 26개의 계단으로 잇고 있는 ‘100년 계단’은 한글학자 이희승이 풀어 쓴 3·1독립선언문 2,167자를 자음과 모음으로 분리하여 푸른색 UHPC(초고성능 콘크리트)로 제작해 붙였다. 안국역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우리 시대의 독립과 해방을 생각한다. 3·1만세를 부른 자(순절), 부르지 않은 자(거절), 부르다 만 자(변절)들은 100년의 간극을 넘어 현재도 저마다의 선택을 이어 나간다. 아예 꿈도 꾸지 않을 것인가, 꿈을 꾸었으나 중도에 꺾을 것인가, 아니면 계속 꿈을 꾸며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국에 알리어…” 한 글자를 2칸(리)이나 4칸(우·선) 또는 6칸(는)으로 구성했는데 주사위에 세 핍 기호(⚂)는 블랭크(blank)이다.


2022년 11월 23일 수요일

직지대모 박병선

오늘 중학2단계 사회시간에는 고려청자의 우수성과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술을 공부했다. 늘 그렇듯 문해교과서의 내용을 보충하는 심화 인쇄물을 준비했다. 어머니들은 고려청자의 이름 붙이는 방법을 재미있어하신다. ①맨 앞에 ‘청자’를 나타냄 ②기법을 나타내는 말을 씀 → 상감·양각·음각·투각 등 ③그릇에 표현된 무늬나 모양을 나타내는 말을 씀 → 운학무늬(구름+학), 포도동자무늬(포도+아이) 등 ④그릇의 용도를 씀 → 매병, 정병, 접시, 주전자, 향로, 항아리, 연적 등… 이렇게 하면 △청자 상감 포도동자문 주전자 △청자 양각 죽절문 병 △청자 음각 연화당초문 매병 △청자 투각 칠보문뚜껑 향로 같은 이름이 만들어지는데, 이는 분청사기나 백자의 작명에도 적용된다.

「백운화상초록 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14자의 긴 이름이다. 공민왕 때인 1377년 서원부(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된 「불조직지심체요절」 금속활자본은 독일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보다 78년이 앞선다. 현재 하권 1책(총 38장)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전하고 있다. 이곳 사서로 근무하며 「직지심체요절」(1967)과 외규장각 「의궤」(1975)를 발견해 세상을 놀라게 한 서지학자 故 박병선 박사의 활약상을 소개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파리위원부 청사까지 찾아낸 박병선 박사는 2011년 5월,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가 약탈해간 의궤의 반환을 보고 그해 11월22일(현지시간) 파리에서 영면에 들었다.

올바른 신념과 이를 관철하기 위한 굳은 열정은 외딴 곳에 홀로 서서 눈을 맞는 갈매나무다. 오늘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되찾으려 일생을 헌신한 ‘직지대모’ 박병선 박사(1923~2011)의 기일(한국시간 11.23)이다. 언젠가 동작동 현충원으로 체험학습을 나가게 되면 함께 충혼당(108실 075호)을 찾아 뵙기로 약조했다.

세계기록유산 증서. 유네스코는 2001년 9월4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한 데 이어 2004년 4월28일 ‘직지상’을 제정하였다. 한편, 우왕 때인 1378년 여주 취암사에서 간행된 「직지」 목판본은 상·하권 1책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에 소장돼 있다.


2022년 11월 17일 목요일

을사년스럽다

덕수궁 중명전(重眀殿) 현판은 日(날일)이 들어간 ‘明’ 대신에 目(눈목)이 들어간 ‘眀’을 썼다. 明과 모양이 다른 眀은 朙(밝을명)의 이체자로 ‘밝게 볼 명’으로도 부른다. 朙은 囧(빛날경)과 月(달월)로 구성돼 있는데, 창문에 비친 달을 뜻한다.

重(거듭할중)과 眀(밝을명)이 합쳐진 중명(重眀)은 ‘거듭하여 밝다’는 의미로 주역(周易)의 이괘(離卦)에서 따온 이름이다. 1905년 11월17일,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다’는 이곳 중명전에서 일본제국의 실권자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5조약을 관철하였고 이는 그대로 대한제국에 굴레(勒륵)가 되었다.

이로부터 날씨나 분위기가 스산하고 싸늘한 상태를 늑약(勒約)이 강제된 1905년 을사년(乙巳年)과 분위기가 같다고 해서 을사년스럽다→을씨년스럽다는 신조어가 탄생했다. 117년이 지난 2022년 가을…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2022년 11월 14일 월요일

못다 핀 꽃들을 위로하소서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님들이 공동집전하는 청계광장 ‘용산 이태원 10.29참사 희생자를 위한 추모미사’ 현장에 가지 못하고 유튜브로 미사 참례.

강론을 대신해서 못다 핀 꽃들의 이름이 한 사람씩 호명됐다. 호명은 존재를 부르는 행위이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기억하고 인정해 주는 것이다.

「흑인영가」, 「찔레꽃」은 왜 이리도 서글픈 것인지… “밤의 별같이 우리를 이끄시는 그리스도님, 예리코의 눈먼 이를 치유하신 것처럼 이태원 158위 영령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해원해 주소서.” 

김영식 신부님이 158위 영령들을 호명하고 있다.

찔레꽃 가락은 해방 전후에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데 가사는 누가 만들었는지 분명치 않다. 3절 가사는 1,2절에 비하면 훨씬 관념적이다.


2022년 11월 1일 화요일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난 날

우리들 마음 아픔에 어둔 밤 지새우지만
찾아든 아침 느끼면 다시 세상 속에 있고
눈물이 나는 날에는 창밖을 바라보지만
잃어간 나의 꿈들에 어쩔 줄을 모르네.

“택배가 잘못 오면 반환할 수 있다. 근데 슬픔, 비극이라는 택배는 반환할 데가 없다.” 정호승 시인의 말이다.
푸른하늘 2집(1989) 타이틀곡 「눈물나는 날에는」을 듣는다. 슬픔은 오직 슬픔을 통해서만 위로받는다는 믿음… 허나 다른 이의 슬픔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길은 아득하다.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난 날이다.
천지만물을 한 줄에 꿰어놓고 가이없이 한없이 펄렁펄렁. 하느님, 보시니 마땅합니까?


2022년 10월 21일 금요일

천강에 비친 달

영릉의 원찰 봉미산 신륵사 경내 여강(驪江)변에 있는 강월헌은 보제존자 나옹(1320~1376)의 처소 이름이자 당호였다. 나옹(懶翁)은 지공(指空)선사에게 법을 받아 무학(無學)대사에게 전해주었다. 세 선승의 영정이 신륵사 조사당에 모셔져 있다. 나옹은 양주 회암사에서 밀양 형원사로 가는 도중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했다. 강월헌은 나옹화상의 다비(茶毘) 장소이며, 그 옆의 자그마한 3층석탑은 나옹화상이 입적한 곳이다.

신륵사 강월헌(江月軒) 현판에서 월인천강(月印千江) 네 글자를 떠올렸다. ‘月’은 석가모니를 ‘千江’은 중생(衆生)을 비유한 것이다. 부처가 백억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 교화를 베푸는 것이 마치 달이 천개의 강에 비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천개의 강물에 천개의 달도장… 부처의 가르침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깃드는 것은 달리 말하면 모든 사람에게 불성(佛性)이 있다는 의미가 된다.

세종의 정비 소헌왕후 심씨가 중궁에 책봉된 1418년, 상왕 태종은 며느리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을 역모죄로 처형하고 어머니 안씨와 동생들을 관비로 만들어 외척의 발호를 원천 봉쇄했다. 1446년(세종28) 세종은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에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에게 명하여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설법, 불교의 전래 과정 등을 담은 책을 펴내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한문 불경을 한글로 옮긴 최초의 사례이자 한글로 된 최초의 산문자료인 석보상절(釋譜詳節)이 탄생했다.

1447년(세종29) 세종이 완성된 석보상절을 열람하고 그 내용을 게송처럼 요약해서 찬불가 형식(악장)으로 지은 한글 최초의 시가집이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다. 세종은 숭유의 나라 조선에서 유교경전이 아닌 불교경전부터 한글로 옮긴 셈이다. 세종은 월인천강의 마음을 담아 친정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비극 속에서도 안정적으로 내명부를 이끌고 왕비의 소임을 다한 소헌왕후의 공덕을 극진히 빌었을 것이다. 천강에 비친 달… 월인(月印)의 종교, 월인의 정치, 월인의 교육이 절실한 요즘이다.


2022년 10월 19일 수요일

임금의 밥상

임금은 수라(水剌)를 젓수고, 웃어른은 진지를 잡수며, 상민은 밥을 먹고, 천민은 끼니를 때운다고 한다지. 오늘도 문해반 어머니 몇 분이 선생 대접한다고 거한 양식을 싸 오셨다. 함께 배불리 나누어 먹고도 이만큼이나 남았다.
촉촉한 붕어빵에 검은콩 박은 쑥개떡과 아삭한 단감, 고소한 호두알에 따뜻한 커피까지 더하니 내게는 왕후장상이 부럽지 않은 수라, 진지가 됐다. 늘 배우는 게 더 많은데 정말 잘 가르쳐 드리고 싶다.


2022년 10월 3일 월요일

홍암 나철… 잃어버린 역사의 복원자

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 출신의 홍암(弘巖) 나철(羅喆, 1863~1916.8.15)은 29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승정원 가주서(假注書),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를 지냈다. 나철은 1905년 가쓰라 태프트 밀약(7.29) 이후 포츠머스 조약(9.5)을 앞두고 외부대신 이하영을 찾아가 대한제국 대표로 회담에 참석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회담 참석이 무산되자 메이지 덴노에게 보내는 격문(대한매일신보 1905.11.4)을 통해 ①동양3국의 평화 ②조선의 주권·영토 보존 약속 ③일본인의 경제적 침탈방지 이행을 요구했다.

을사조약(1905.11.17) 후인 1907년 비밀결사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고 전국적으로 200여 동지를 규합했다. 사재를 털고 모금을 벌여 권총 50정을 구입해 을사5적의 처단을 결의, 매국대신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유배형을 받았다. 나철은 국운이 기울어가는 절망스런 상황에서 간절한 독립의 열망을 담아 1909년 1월15일(양력 2월5일) 단군을 국조로 한 단군교(檀君敎)를 중광(重光)하고 이듬해 대종교(大倧敎)로 개칭했다.

만주 독립군의 상당수가 대종교 출신이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2대 국경일이 ①3월1일 독립선언일(삼일절) ②10월3일 건국기원절(개천절)이었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1962년 1월1일(단기 4294년 12월31일)부로 단기(檀紀) 연호를 폐지하고, 공식적으로 서기 연호를 사용했다. 단 하루 사이에 2333년이란 시간이 사라졌다.

창덕궁과 원서공원 사이 창덕궁길에 들어서 금호문(金虎門)을 지나 50m쯤 가면 「개천절 행사 발상지」 표지판을 볼 수 있다. 표지판에는 “1909년 대종교에서 음력 10월 3일을 환웅이 지상에 내려왔다 하여 개천절로 정하고 이곳에서 첫 행사를 치렀다. 1949년 대한민국 정부는 양력 10월 3일을 국경일로 정했다.”라는 설명이 쓰여 있다. 개천절(開天節)은 ‘하늘이 열려 세상을 다스리는 질서’를 기념하는 날이다. ①환웅이 처음 신시(神市)를 연 날이자 ②단군이 처음으로 개국한 날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2022년 8월 22일 월요일

거꾸로 석물

①532년에 비잔티움 황제 유스티니아 1세가 건설한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niscir) 지하궁전의 메두사(Medusa) 머리 기둥  ②청계천 홍수 때 태종 이방원이 계모 신덕왕후 강씨가 묻혔던 정동 정릉에서 가져온 병풍석과 난간석으로 보수한 광통교 석물  ③을사늑약의 장본인 중 하나인 주한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남작의 동상을 받치던 좌대를 복원한 남산 통감관저 터의 판석…

거꾸로 세운 건조물은 대상에 대한 혐오감, 역겨움, 욕, 반감, 옭아맴, ​벽사(辟邪) 등의 낱말과 연결될 터이다. 적어도 축복의 감정과는 거리가 멀다. 많은 사람이 ‘굥’이나 ‘논’민대를 언급하고 있다.


2022년 8월 12일 금요일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우영우

“제 이름은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우영우입니다.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 우영우.”… 요사이 화제가 되고 있는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법무법인 한바다의 인턴 변호사이자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우영우가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쓰는 문장이다. 이 문장에 쓰인 단어들처럼 앞뒤 어느 쪽에서 읽어도 같은 어구·문장·숫자를 돌림문, 회문(回文), 영어로는 팰린드롬(palindrome)이라고 한다. 보통 낱말 사이에 있는 공백은 무시한다.

성인문해 중학 3단계 국어… 지난주에 내드린 ‘거꾸로 읽어도 제대로 읽어도 같은 낱말’을 써오는 창의학습 과제물을 걷었다. 올해 82세(좌·1941), 86세(우·1937년) 되신 어머님 두 분도 훌륭하게 숙제해오셨다. 


2022년 8월 11일 목요일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삶

“디아스포라, 떠도는 자들의 이야기”를 수강신청했다. 코리안 디아스포라와 관련해 (다시)봐야 할 혹은 (앞으로)보고 싶은 시, 소설, 에세이, 희곡과 연극, 영화, 다큐가 한가득이다.

이카이노시집(김시종)
떠도는 땅(김숨) ▲내 어머니 이야기(김은성) ▲바람 목소리(김창생) ▲우토로 여기 살아왔고, 여기서 죽으리라(나카무라 일성) ▲이슬람 정육점(손홍규) ▲파친코(이민진) ▲단순한 진심(조해진) ▲로기완을 만났다(조해진)
야끼니꾸 드래곤(용길이네 곱창집)(정의신)
차별(김지운) ▲항로 - 제주, 조선, 오사카(김지운) ▲우키시마호(김진홍) ▲나는 조선사람입니다(김철민) ▲제주해녀 양씨(신기수→마사키 하라무라) ▲감춰진 손톱자국(오충공)
코리안 디아스포라(김지연) ▲연변으로 간 아이들(김지연) ▲일본의 조선학교(김지연) ▲사할린의 한인들(김지연) ▲경계인의 사색(송두율) ▲미완의 귀향과 그 이후(송두율) ▲서간도 시종기(이은숙) ▲최운산 봉오동의 기억(최성주)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허은)

이중 페친이 넷… 대단한 분들이다.



http://www.jongno-mn.com/news/articleView.html?idxno=2894

문학으로 바라보는 디아스포라의 삶
‘떠도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우리의 시선’


종로구는 지역주민 등을 대상으로 「문학으로 바라보는 이방인들의 삶과 우리의 시선」 2부 “디아스포라, 떠도는 자들의 이야기”의 수강자를 모집한다.

다섯 꼭지의 온라인 ZOOM 강연은 8월23일부터 9월20일까지 매주 화요일 저녁 7시부터 2시간 동안 ‘이방인의 이야기’를 주제로 이어진다. 6회차 종강연은 오프라인 강연이다.

1회차(8.23) 강연은 문학비평가 이숙이 “고려인 디아스포라, 떠도는 자들의 이야기”를 주제로 고려인 강제이주를 다룬 소설 「떠도는 땅」(김숨)을 통해 역사적 재난과 디아스포라의 현재를 들여다본다.

2회차(8.30) 강연에는 영상문학 연구자 최은영이 나선다. 영화 「암살」,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서사를 바탕으로 일제강점기 만주·상해로 추방당한 여성 독립운동가의 궤적을 탐구하는 “항거하는 여성, 총을 들어라”를 이야기한다.

3회차 강연은 김시종 시인의 「이카이노시집(猪飼野詩集)」(1978), 「계기음상(季期陰象)」(1992), 「화석의 여름(化石の夏)」(1998)에 주목하여 일본과 2개의 조선 사이에 포위된 경계인의 윤곽을 살펴보는 “혐오와 연대 사이에서―경계를 넘어” 시간이 꾸려졌다. 유인실 시인이 진행한다.

4회차(9.13)는 만화연구자 김은혜의 안내로 6·25전쟁 이후 실향민이 된 엄마 이복동녀氏의 생애사를 그린 「내 어머니 이야기」(김은성)를 통해 “엄마가 구술하는 전쟁과 분단의 기억”을 살펴본다.

5회차(9.20) 강연은 재일동포 작가 정의신의 희곡 「야끼니꾸 드래곤」의 줄거리를 내용으로 “부유하는 경계인의 삶, 재일한인 극작가의 역사 쓰기”를 탐구한다. 극작가 최정이 고향은 있지만 갈 수가 없어 일본땅에서 살고 있는 재일교포의 삶과 목소리를 보여준다.

작가와의 만남&후속모임으로 마련된 6회차(9.27) 강연 “우리 안의 디아스포라, 공존하는 우리를 위하여”는 오프라인(선착순 20명)과 온라인(ZOOM) 강연을 병행한다. 「이슬람 정육점」 「저녁의 선동가」의 손홍규 소설가가 우리 안의 이주노동자와 다문화가정 이야기를 들려주고, 오윤호 교수가 독서모임에 적용할 수 있는 디아스포라 문학작품 활용 노하우를 전해준다.

오프라인 강연 장소는 어린이청소년국학도서관(종로구 명륜길 26 와룡문화센터 5층)이다. 수강료는 무료이며, 수강을 희망하는 사람은 구글폼(https://forms.gle/tAHDjUZ81LKzq6HV9)을 통해 신청하면 된다.

문의: ☎02-747-8335~6


2022년 8월 9일 화요일

수유리 광복군 합동묘소 17위, 대전현충원 이장

1941~1946년 사이 중국 각 지역(능천, 태행산, 태원 등)에서 치열하게 싸우다 순국(전사, 처형, 자결 등)한 광복군 선열 17위를 국립묘지로 모신다는 소식이다.

대전현충원에는 간도특설대 등에서 활동하며 항일무장세력을 토벌했던 ▲신현준(만주 봉천군관학교, 간도특설대 창설요원, 만주군 상위) ▲김석범(만주 봉천군관학교, 일본육사 53기, 간도특설대 정보반 주임, 만주군 상위) ▲송석하(만주 봉천군관학교, 간도특설대 장교, 만주군 상위) ▲백홍석(일본육사, 일본육군 중좌) 등이 묻혀 있다. 아이러니 한국사다.



http://www.k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127

‘수유리 광복군’ 선열 17위, 대전현충원에 모신다
후손 없는 광복군 선열, 광복 77년 만에 국립묘지로 이장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제77주년 광복절을 맞아 8월 11일(목)부터 14(일)까지 나흘간의 일정으로 수유리 한국광복군 합동묘소에 있는 광복군 선열 17위를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한다고 밝혔다.

광복 직후에는 광복군 선열들을 따로 모실 공간이 없었고, 독립유공자도 아니었기에 조계사 등에 안치했다가, 1961년부터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구 묘소(1957년 작고 후 수유리에 묘역 조성, 1994년 서울현충원 이장) 아래에 묘역을 조성한 뒤 1981년까지 각각 시점을 달리하여 봉분 1기에 17위의 선열을 함께 안장했다.

이후 독립유공자 포상이 이뤄어졌지만, 선열들이 20~30대 젊은 나이에 광복군에 투신, 조국독립을 위해 일제에 맞서 싸우다 전사, 순국한 뒤 후손도 없어 지난 77년간 국립묘지로 이장이 이뤄지지 못했다.

「다시, 대한민국! 영웅을 모십니다」라는 주제로 추진되는 이번 이장은 8월 11일 묘소 개장부터 임시 안치, 국민 추모·참배 기간 운영(12~13일), 합동봉송식 및 합동안장식(14일)의 순으로 진행된다.

먼저, 11일(목)에는 오전부터 서울 수유리 한국광복군 합동묘소를 개장한 뒤, 오후에 서울현충원으로 운구, 현충관에 임시 안치한다. 12일(금)부터 13일(토)에는 국민들이 광복군 선열들을 추모할 수 있도록 온·오프라인을 통해 ‘국민 추모·참배 기간’을 운영한다. 이후, 14일(일) 오전 서울현충원에서 한국광복군 선열 합동 봉송식을 거행한 뒤 국립대전현충원으로 봉송, 오후 대전현충원에서 안장식을 개최한다.

‘수유리 애국선열 묘역 및 광복군 합동묘역’은 서울시 강북구에서 관리해오다 지난 2021년 2월, 국가보훈처에서 국가관리묘역으로 지정, 전담 관리직원 배치와 묘역 개보수, 안내·편의시설 설치 등 국립묘지에 준하는 수준으로 관리하고 있다.

수유리 한국광복군 합동묘소(서울 강북구 수유4동 산127-1)에 안장된 광복군 선열 17명 중 13명은 1941~1946년 사이 중국 각 지역(능천, 태행산, 태원 등)에서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순국(전사, 처형, 자결 등)했고, 다른 4명은 광복 후 국내 등에서 작고했다. 

① 김유신(1991년, 애국장) : 1943년 2월, 중국 태항산 전투에서 전사
② 김찬원(1991년, 애국장) : 1946년, 중국 산서성 태원지구에서 지하공작 중 일본군에 체포, 순국
③ 백정현(1991년, 애국장) : 1944년 4월, 중국 북경감옥에서 탈옥 시도, 실패 후 총살 순국
④ 이해순(1991년, 애국장) : 1945년 8월, 중국 산서성 운성에서 공작활동 중 체포, 순국
⑤ 현이평(1995년, 애국장) : 1941년 1월, 중국에서 한국인의 민족의식 고취 등 활동 중 피살
⑥ 김순근(1990년, 애족장) : 1945년 2월, 일본군에 체포·억류 중 비밀 보전을 위해 자결 순국
⑦ 김성률(1991년, 애족장) : 1943년 9월, 적 후방에서 공작 중 전사
⑧ 김운백(1991년, 애족장) : 1943년 9월, 중국 태항산 전투에서 전사
⑨ 문학준(1991년, 애족장) : 1943년 8월, 중국 하남성 수무현에서 전사
⑩ 안일용(1991년, 애족장) : 1944년 9월, 중국 하남성 수무현에서 순국
⑪ 전일묵(1991년, 애족장) : 1945년 8월, 초모공작 및 항일운동 전개 중 일본군에 체포, 순국
⑫ 정상섭(1991년, 애족장) : 1943년 9월, 중국 태항산 전투에서 전사
⑬ 한  휘(2022년, 애족장 예정) : 중국 태항산 전투에서 전사(추정)
⑭ 이한기(1990년, 애족장) : 1949년 10월 5일 호림부대 소속으로 작전 중 전사
⑮ 이도순(1990년, 애족장) : 1969년 11월 28일, 서울 자택에서 작고
⑯ 동방석(1990년, 애족장) : 1971년 1월 20일, 서울 자택에서 작고
⑰ 조대균(1990년, 애족장) : 사망일자 및 사망장소 미상 


2022년 8월 8일 월요일

빅브라더 유감

성인문해 중학 2단계 사회시간에 ‘경제주체의 경제활동’을 학습하는 참에 작년 1단계 때 살펴본 ‘3권분립’을 엮어 함께 공부했다. 중앙에 정부를 두고 왼편에 국회와 법원, 오른편에 가계와 기업을 배치한 다이어그램을 그려 교안을 준비했다. 공공재(사회간접자본+공공서비스)의 개념과 종류, 공공재를 정부가 생산하는 이유 등을 민영화 이슈와 묶었는데, 70대 어머니 학습자분들이 잘 이해하신다.

국회의 탄핵소추권, 법원의 위헌법률심판제청권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각각 탄핵심판권, 위헌법률심판권을 갖는다. 위헌 결정이 내려지기 위해서는 헌법재판관 6인 이상의 동의가 필요하다. 상상할 수 있는 사고능력, 생각의 자유를 박탈하고 개인의 정신까지 통제하는 빅브라더의 감시체제 독소조항들은 퇴출돼야 한다. 9월15일,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의 공개변론이 중요한 이유다.


2022년 8월 1일 월요일

응시가 존재를 조각한다… 죽산 조봉암 63주기

어제 오전 11시, 망우리공원묘지 내 죽산 조봉암 묘역에서 봉행된 63주기 추모식에 참석했다. 이모세 기념사업회장에 따르면 해마다 추모식 날에는 아주 비가 많이 오거나 아주 덥거나 한다고 한다. 어제도 죽산 선생의 恨이런가. 망우산에 국지성 호우가 쏟아지면서 1시간 넘게 진행된 추모식 내내 비가 흩뿌렸다.

“죽산은 차기 대권을 노리던 이기붕과 박마리아 및 그 추종세력의 음모에 죽었다”며 미국의 영향력이나 이승만의 책임을 방조하는 듯한 신복룡氏의 추도사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본인을 국가유공자회 상임고문이자 국민의힘 중앙당 고문이라고 소개한 장년의 창녕조씨(昌寧曺氏)가 서훈에 대해 “문중의 자책과 자숙이 있어야 한다”며 소속당의 역할은 배제하고 문중의 문제로 몰아가는 듯이 한 발언에도 전혀 동의할 수 없다. 과연 國民の力 인사다운 언변이다. 죽산이 헌정사상 사법살인의 첫 희생자로 숨져갈 때 법무부의 수장이 홍라희, 홍석현의 아버지 홍진기 장관이었다.

특별히 추모식에서 눈에 띈 점은 청년 두 사람이 추도사를 했다는 것인데, 63주기 동안 처음 있는 일이라고 들었다. 죽산의 정신을 미래세대에 잇겠다는 사업회의 비전과 맞닿는 거 같아 보기에 좋았다. 사형장으로 걸어가던 죽산 선생이 서대문형무소 담장 옆에 피어있는 코스모스에 다가가 한참 동안 꽃향기를 맡았다는 일화나 竹山이라는 호, 그리고 집행 직전 “막걸리 한 사발과 담배 한 개비”를 요청했다는 일화에서 묘역을 대나무나 코스모스로 꾸며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망우리 사잇길을 걸을 때 막걸리도 챙겨 한 사발 올려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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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조봉암 63주기 추모식 열려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미래세대에 죽산정신 이어갈 것”


죽산 조봉암(1899~1959) 선생의 63주기 추모식이 7월31일 오전 11시, 망우리 묘역에서 열렸다.

정정현 작가의 사회로 진행된 추모식은 예년과 마찬가지로 죽산이 1959년 7월3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11시에 맞춰 시작했다. 추모식은 △순국선열과 조국통일에 헌신한 분들에 대한 묵념 △죽산 육성(1956년 11월10일 진보당 창당대회) 청취 △환영사 △추도사 △분향 및 헌화 △음식나눔 순으로 엄수됐다.

이모세 회장(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은 인사말을 통해 “죽산의 동지들과 따님 조호정 여사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2011년 사법적인 명예회복은 이루었으나, 아직도 독립유공자 서훈은 이뤄지지 않았다”면서 “민주·인권·평등·평화에 대한 ‘조봉암정신’이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패러다임을 바꿔 청년과 학생들을 위한 문화 콘텐츠 개발 등에 진력해 나아가겠다”고 밝혔다.

이행숙 문화복지정무부시장(인천광역시)은 “어렵고 복잡한 일과 직면할 때마다 죽산의 정신은 인천이 나아가는 길에 등불이 돼 주었다”며 “인천은 대한민국이 지켜야 할 소중한 자산인 죽산의 정신을 널리 알리고 시민의 자긍심을 높이는 일에 앞장서겠다”고 추모했다.

신복룡 전 석좌교수(건국대 정치외교학과)는 추도사 중간에 “죽산은 차기 대권을 노리던 이기붕과 박마리아 및 그 추종세력의 음모에 죽었다”고 전제한 뒤 “죽산에 대한 서훈은 굴곡진 현대사를 바로잡는 역할을 한다. 쉽지는 않겠지만 불가능하지 않으니, 죽산 해원(解寃)의 마지막 작업으로 독립유공자 서훈을 다시 신청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 교수는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서훈심사위원·위원장(2009~2021)을 지냈다.

청년들의 추도사도 이어졌다. 조은주 청년활동가는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서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잘 살 수 있는 세상, 억압과 부패를 혁신하여 진정한 자유와 평화 속에서 인간다운 생활이 보장되는 복지국가”를 역설한 죽산의 진보당 결당대회 개회사를 인용하며 서두를 열었다. 조 활동가는 “목숨을 잃을 각오로 위험한 일터에 내몰린 청년, 사회복지 사각지대에서 고독사하거나 자살하는 청년들을 보면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강조하며 복지사회 건설을 위해 혁신정치와 경제정의 실천을 주장했던 죽산의 사상과 철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면서 “의(義)로움과 이(利)로움을 조화롭게 추구한 죽산의 궤적을 더 많은 청년시민과 되새기고 확대하며 꿋꿋하게 걸어가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윤준수 학생(전북대 정치외교학과)은 “혹자는 불만을 표시하지만, 죽산이 이승만 정권의 장관직 제의를 수락하지 않았다면 농지개혁법은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며 죽산의 내각 참여를 ‘신의 한 수’로 칭송했다.

죽산 조봉암(1899~1959) 63주기 추모식이 7월31일(日) 오전 11시, 서울 망우리공원묘지에서 열렸다.

추모식 말미에 발언에 나선 전현수 교수(경북대 사학과)는 “경북대 아시아연구소는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2019년부터 진보당 혁신계 형사사건 기록을 연구하고 있는데 진보당 조봉암 관련 서류는 1만6천장 정도의 방대한 사료로 구성돼 있다”면서 “위대한 항일독립투사이자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인 죽산은 제헌헌법을 기초하고, 농지개혁법을 제정해 실천에 옮겼다. 사회주의가 스탈린 전체주의로 흐르자 민주적 사회주의로 사상적 대전환을 시도해 진보당을 만들었다. 한국사회의 발전과 민주화, 통일에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진보당과 조봉암을 연구해 재조명하고 후세에 전승하겠다”고 전했다.

정치권에선 김교흥(민주당/인천 서구갑) 국회의원이 추모식에 참석했고, 이재명(민주당/인천 계양을), 박찬대(민주당/인천 연수갑), 심상정(정의당/경기 고양갑) 국회의원이 조화를 보내 죽산의 뜻을 기렸다. 김교흥 의원은 “죽산 선생은 제헌의회 때 인천 을구 출신으로 지역구 대선배시다. 지금처럼 민생파탄에 국가가 위기 속에 있는 시점에 죽산의 정신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며 “역사의 질곡을 바로 잡는 서훈이 이뤄져야 한다. 청년들에게 시대정신을 제대로 심어주는 의미 있는 추모식이 됐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추모식은 100명 내외 참석자의 분향 및 헌화로 마무리됐다.

죽산 조봉암 선생은 1899년 강화군 선원면 금월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강화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눈을 떴다. 이후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으로 유학을 다녀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일제 치하에서 7년간 복역했다. 이때 죽산은 일제의 고문과 감방에서의 동상으로 가운데 세 손가락의 첫 번째 마디를 잃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에도 일제 헌병대의 요시찰 인물에 대한 예비검속에 걸려 정치범으로 구속됐다가 해방 이후 석방됐다.

1946년 5월 박헌영과 결별, 사상전향하여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하고 남북협상 노선을 걸었다. 1948년 5월10일 인천을구(현재 부평·계양·서구) 제헌의원으로 당선돼 헌법기초의원, 초대 농림부장관에 이어 제2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농림부 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강제로 땅을 뺏는 게 아니라, 지주에게 농지채권을 주는 방식으로 토지개혁을 시행했으며, 지금의 농업협동조합을 만들기도 했다.

죽산은 1952년 8월 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낙선하고, 1956년 ‘평화통일과 사회민주주의’를 노선으로 3대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30%가 넘게 얻은 지지율(=216만표)을 토대로 같은 해 11월 진보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1958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와 간첩죄로 체포돼 1심에서 징역 5년, 2·3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59년 7월31일 오전 11시, 재심 요청에도 불구하고 교수형으로 서거했다. 2011년 대한민국 법원은 재심을 통해 죽산 조봉암 선생의 간첩죄 등을 52년 만에 무죄로 선고했다.

죽산의 묘비는 뒷면에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백비(白碑)다. 유족들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아 완전한 명예회복이 실현되면 비를 새로 세울 계획이라고 한다.


2022년 7월 29일 금요일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희망도 많다

7월27일, 정전협정 69주기를 맞아 전쟁반대, 평화선언 대회에 선보인 극단 ‘경험과상상’의 뮤지컬 「갈 수 없는 고향」은 바깥 이야기의 1인칭 주인공인 잠순이 할머니가 전지적 작가 시점의 안쪽 세 소녀의 지난날을 회상하는 액자식 구성, 교차 편집으로 리얼리티를 더했다. 한 마을에서 나고 자란 잠순, 경희, (마을)언니는 흰 쌀밥도 먹고 돈도 많이 벌고 좋은 구경도 할 수 있다는 꾐에 속아 군인들을 따라 고향을 떠난다. 소녀들은 트럭에 배에 다시 트럭에 배에 실려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이동한다. 혼인을 앞둔 막둥이가 잠순이 언니도 못가본 시집을 자기가 간다고 미안하다고 혼자 펑펑 서럽게 울더라는 (꿈속) 엄니의 말…

지옥 같은 더딘 시간이 흐른 1945년 8월, 마침내 일본이 패망한다. 셋은 홋카이도에 있는 미쓰비시 군수공장에서 일하다 왔노라고 미리 말을 맞췄다. 소녀들은 밥을 얻어먹고 아무 데나 쓰러져 자면서 천신만고 끝에 그리운 고향땅으로 돌아온다. 잠순이는 집에 오는 길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엄니의 신신당부를 기억하여 도정면 산새리 구장님 땅콩밭 지나서 첫번째 집 앞까지 온다. 기쁨도 잠시, 잠순이는 담장문 너머로 엄니, 아부지, 동생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광경을 바라만 보다가 더럽혀진 몸으로 차마 가족들의 얼굴을 볼 수 없어 발길을 돌린다. 이런 애달픈 상황은 경희와 언니도 마찬가지다. 멀리 가서 맘 편히 살자. 일본 남자 만나서 잘살고 있다고, 미국 남자 만나서 멀리 떠났다고 하자. 조선은 지긋지긋하다고, 엄니 아부지 보고 싶지도 않다고…

결국 세 소녀는 언니의 제안을 따라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들, 낯선 말, 낯선 눈빛에 둘러싸여 서로 의지하며 웅크리고 살아간다. 경희가 죽고 언니도 따라 죽고, 혼자 남은 잠순이 할머니는 인자 부엌에서 도마질하는 엄니 뒷모습, 마당 한켠에서 작두질하던 아부지 얼굴도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흩어지고 사라진 세월. 다시 태어난다면 엄니, 아부지, 동생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고운 치마저고리 입고 족두리 쓰고 연지 곤지 찍어 보는 게 할머니의 소원이다. 타이틀곡 「갈 수 없는 고향」(한돌 사·곡)의 제목과 노랫말에 공명하며 진도아리랑 한 구절을 읊조린다.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희망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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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민주평화통일민족위원회, 광화문서 「7.27 평화선언대회」 개최
경험과상상, 뮤지컬 「갈 수 없는 고향」 공연

자주민주평화통일민족위원회(이하 민족위)는 정전협정 69주기인 7월27일(수) 오후 6시, 광화문 미대사관 우편 인도(5호선 광화문역 2번출구)에서 1, 2부로 나누어 「7.27 평화선언 대회」를 개최했다.

먼저 1부 순서에는 극단 ‘경험과상상’이 뮤지컬 「갈 수 없는 고향」을 선보였다. 이 작품은 바깥 이야기의 1인칭 주인공인 잠순이 할머니가 전지적 작가 시점의 안쪽 세 소녀의 지난날을 회상하는 액자식 기법으로 구성됐다.

한 마을에서 나고 자란 세 소녀 잠순, 경희, (마을)언니는 흰 쌀밥도 먹고 돈도 많이 벌고 좋은 구경도 할 수 있다는 꾐에 속아 군인들을 따라 고향을 떠나면서 지옥과도 같은 시간을 맞닥뜨린다. 세월은 흘러 1945년 8월, 마침내 일본이 패망하고 소녀들은 그리운 고향 조선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잠순이는 더럽혀진 몸으로 도저히 가족들의 얼굴을 볼 수 없어 담장문 너머로 엄니, 아부지, 동생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광경을 지켜만 보다가 발길을 돌린다. 이런 애달픈 상황은 경희와 언니도 마찬가지다. 결국 세 소녀는 언니의 제안을 따라 먼 타국에서 서로 의지하며 숨죽여 살아간다. 경희와 언니를 먼저 떠나보낸 잠순이 할머니는 다시 태어난다면 엄니, 아부지, 동생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고운 치마저고리 입고 족두리 쓰고 연지 곤지 찍어 보는 게 소원이다.

잠순이 할머니는 “전쟁은 절대로 안 돼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평화를 해야 됩니다. 그럴려면 전쟁할라고 지랄하는 놈들(미국·일본·윤석열)하고 싸워야지. 또 통일을 해야 외세가 간섭을 못하고 전쟁의 근원이 사라집니다. 자주를 해야 평화가 오고 통일을 해야 평화가 옵니다.”라면서 “독립운동했던 선조들이 만들고 싶었던 나라, 우리가 만들어야지요. 이제 다 왔어요. 그러니까 우리 조금만 더 고생합시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주제의식이 집약된 할머니의 대사에 관객들은 큰 호응의 목소리와 박수로 화답했다. 뮤지컬은 9명의 배우가 함께 부르는 ‘아리랑’ ‘뱃놀이’ ‘진도아리랑’으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27일 저녁, 광화문역 2번출구 인도에서 극단 ‘경험과상상’ 배우들이 뮤지컬 「갈 수 없는 고향」을 열연하고 있다. (사진=민족위 구산하)

2부는 사회자(민족위 김성일)의 안내에 따라 “전쟁을 반대한다!” “평화를 지키자!” 구호를 함께 외치는 것으로 시작했다. 발언에 나선 백자 상임운영대표(민족위)는 “현재 전쟁 가능성이 큰 이유는 미국과 일본과 윤석열 때문이다. 남북이 합의한 공동선언을 이행하고, 시민들이 행동에 나서면 전쟁을 막고 평화를 가져오고 통일도 할 수 있다”며 “(윤석열) 퇴진이 평화다”라고 강조했다.

윤미향 국회의원은 일본정부가 화해치유재단에 10억엔을 출연하는 것으로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을 선언했던 2015년 12월 28일의 굴욕적인 한일위안부합의를 소환했다. 윤 의원은 “국가책임 인정도 사죄도 배상도 아닌 2015합의를 복원하려는 시도에 왜 ‘아니오’라고 하지 못하나”라면서 “전세계 1억인 평화선언으로 한반도에 정전, 휴전이 아닌 평화와 통일이 온다는 확신을 갖고 포기하지 말고 동행해 나가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세번째 발언자로 나선 민소원 학생(한국대학생진보연합)은 “이제는 이 긴 전쟁을 끝내야 한다. 전쟁의 끝맺음은 무력을 통한 폭력적인 방법이 아니라 서로 대화를 통해 맞춰가는 평화로운 방법이어야 한다”라고 전제한 후 “전임자들이 북과 합의한 내용을 무시하면서 선제타격을 외치고 한미연합군사훈련을 강화하는 전쟁광 윤석열을 퇴진시켜야 한다. 저희 대학생들도 앞장서서 우리의 평화, 미래를 위해 행동할테니 여러분들도 함께해 달라”라고 역설하여 함께한 사람들의 박수를 이끌어냈다.

정전협정 69주기를 맞아 펼쳐진 이날 「7.27 평화선언 대회」는 백자 상임운영대표(민족위), 김은진 교수(원광대로스쿨), 류성 대표(극단 경험과상상)가 ‘전쟁반대 평화선언문’을 낭독하면서 성료했다.

자주민주평화통일민족위원회는 지난 4월부터 시작한 7.27 평화선언 운동에 이날까지 48개 단체와 852명이 참여했다고 발표했다. 민족위는 8월 한미연합군사훈련이 끝날 때까지 「윤석열 퇴진이 평화다! 전쟁반대 평화선언」 운동을 계속해 나갈 예정이다. (후원: 우리 1005-604-265463)

류성(좌), 김은진(중), 백자(우) 자주민주평화통일민족위원회 공동대표가 「7.27 평화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가쓰라 다로의 조선 공략

초대 필리핀 총독을 지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미합중국 육군 장관은 1905년 7월 말 아시아 순방에 나섰다. 태프트는 가쓰라 다로(桂太郞) 일본제국 총리 겸 외상을 예방하고 이틀째인 1905년 7월29일 각서를 주고받았다. 각서의 골자는 ①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공격 의사가 없고 미국의 지배를 확인한다 ②일·미·영 3국은 동아시아의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동맹관계를 유지한다 ③미국은 러일전쟁의 원인이 된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다. 요컨대 일본은 미국 영향권의 필리핀에 관심이 없고, 미국은 일본의 조선 보호령화에 이의가 없다는 것이다.

1904년 2월8일 발발한 러일전쟁의 승리가 일본쪽으로 기울어진 상황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혹여라도 필리핀에까지 이르는 것을 원치 않았던 미국은 필리핀이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음을 일본측에 분명히 각인시키고 싶었다. 그런데 태프트는 협약(pact)이나 협정(agreement)이 아닌 각서·비망록(memorandum) 형식을 취했다. 이는 1882년 5월22일 조인한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조의 ‘불공경모(不公輕侮)’ 문구가 껄끄러웠기 때문일 수 있다. 불공경모는 대조선국(조선)과 대아미리가합중국(미국)은 제3국으로부터 공정하지 못한 대우를 받거나 모욕받았을 때 서로 문제 해결을 알선하며 돕는다는 뜻이다. 영국 역시 일찌감치 영일동맹(1902.1.30)과 제2차 영일동맹(1905.8.12)을 맺으면서 유라시아대륙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는 데 일본을 활용했다.

가쓰라 다로는 일본제국 제11대 내각총리대신 재임 시 태프트와 밀약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고, ‘다케시마’라는 이름으로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는 내용의 시마네縣 고시 제40호를 발표(1905.2.22)했으며,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주선으로 뉴햄프셔州 포츠머스에서 러시아제국과 강화조약(1905.9.5)을 체결해 대한제국에 대한 우월권을 공인받고 북위 50° 이남의 사할린섬을 할양받았다. 그리고 을사늑약(1905.11.17)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한국통감부를 설치해 식민 지배의 포석을 깔았다. 제13대 총리 재임 때는 사법권을 박탈하는 기유각서(1909.7.12)와 의병 토벌(1909.9.1~10.30)을 거쳐 마침내 대한제국을 병탄(1910.8.29)하기에 이른다. 대한제국의 국권 피탈 과정에는 언제나 가쓰라 다로(계태랑)의 이름이 있었다.

우리가 역사 시간에 배운 대로 가쓰라-태프트 밀약(密約)으로 부르든 보수 인사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각서·비망록으로 깎아내리든 가쓰라와 태프트의 만남 이후의 우리 역사는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흘러갔다. 오랜 고립에서 벗어나 신흥 강자로 떠오른 일본은 아세아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승리하고 대한제국을 차지했다. 영국과 미국은 일본을 이용해 더 위험하다고 판단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했다. 이것이 1894년에서 1910년 사이 구한말을 둘러싼 문법이었다. 우리는 2022년 오늘의 시대정신에 맞도록 문법을 개정할 수 있을까.

2022년 7월 24일 일요일

가네코 후미코 지사 96주기 추도

유토피아(utopia)의 u가 ‘없다’인 것처럼 아나키(anarchy)의 a 역시 ‘없다’는 뜻이다. 때문에 각각 ‘장소가 없다’, ‘지배가 없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아나키즘은 왜곡된 번역 ‘무정부주의’가 아닌 ‘무권력주의’ ‘무강권주의’로 보아야 자연스럽다.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은 일찌기 아나키를 민중이 직접 세우는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질서(Anarchy is Order=Ⓐ)라고 주장했다. 아나키스트는 블랙 컬러를 선호하여 흑도회(黑濤會), 흑풍회(黑風會), 흑우연맹(黑友聯盟), 흑전사(黑戰社), 흑색공포단(BTP, Black Terrorist Party) 같은 조직 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어제는 문경에서 가네코 후미코 지사 96주기 추도식과 워크숍에 함께했다. 지역 분위기는 지역신문의 취재조차 없을 정도로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1923년과 1926년 사이 대역사건과 괴사진사건으로 내각이 교체될 만큼 일본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던 21살, 20살짜리 아나키스트에 주목할 만큼 우리 사회의 역사의식은 두텁지 않다. 가네코의 추도식임에도 불구하고 워크숍 발제 중 가네코 지사에 대한 온전한 논의는 전무했다. 질의응답 시간에 이 문제를 꺼내고 싶었는데, 김미령 대표(자립지지공동체)님이 가네코 후미코의 제삿날에 남편(박열) 얘기만 해서 되겠느냐는 뼈 때리는 발언을 해주셔서 속이 시원했다.

박열의사기념관 우성민 학예사님 애쓰셨다. 무엇보다 60명 추모단을 이끌어주신 바우 손병주 회장님, 묵묵히 뒷받침해주신 이은영 사모님께 감사의 말씀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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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의사 부인, 가네코 후미코 지사 96주기 추도식 봉행
문경 박열의사기념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연구현황과 과제」 워크숍 개최

가네코 후미코(박문자, 1903~1926) 지사 96주기 추도식 및 워크숍이 7월23일(土) 오전과 오후, 경북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 박열의사기념공원 내 묘역과 기념관에서 열렸다.

추도식은 지역 내 정관계인사와 지역주민, (사)국민문화연구소 회원, 한터역사문화연구회(네이버밴드) 멤버들이 함께한 가운데 약력보고, 추도사, 헌화와 분향 순으로 1시간가량 진행됐다. 특히 추도사에는 일본 야마나시(山梨)현의 가네코 후미코 연구회장인 사토 노부코(佐藤信子)氏가 전해온 연대의 인사말이 대독돼 의미를 더했다.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지사 96주기 추도식이 7월23일(토) 10시30분, 박열의사기념공원 안에 모신 지사의 묘소 앞에서 봉행됐다.

가네코 후미코 지사는 1903년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 출신으로, 당시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무적자(無籍者)여서 소학교에도 입학하지 못했다. 이후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충북 청원군 부용면(현 세종시 부강면) 고모집으로 거처를 옮긴 후 부강심상소학교에 적을 두고 약 7년 동안 학대받으며 부엌데기를 했다. 가네코는 1919년 부강 3·1만세운동을 목격하면서 “권력에 대한 반역적 기운이 일기 시작했으며, 조선 쪽에서 전개하고 있는 독립운동을 생각할 때 남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감격이 가슴에 용솟음쳤다”라고 기록했다.

1919년 4월 일본으로 돌아간 가네코는 관계자와 교류하고 각종 문헌을 읽으면서 아나키스트가 되었고, 1922년 도쿄에 유학 중이던 문경 출신의 박열을 만나 동거를 하며, 민중을 억압하고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는 천황제에 대한 투쟁 활동을 이어나갔다. 1923년 9월1일, 간토대지진 발생 이틀 후, 일제의 한인 단속에 부부는 불령사(不逞社) 회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취조 과정에서 박열의 폭탄 입수 계획이 알려지자 일제는 이를 천황 암살을 도모한 대역사건으로 규정하고 사형을 선고했는데, 10일 만에 이례적으로 ‘천황의 은사’라며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부부는 서로 다른 지역의 형무소로 이감됐다. 3개월 후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의 아이를 밴 채 우쓰노미야(宇都宮) 형무소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하지만 동지들의 사인규명과 시신인도 요구가 묵살되어 타살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박열의 형 박정식이 제수씨의 유골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일제는 문제가 있는 유골이라 잘못돼서는 안 된다면서 유골을 소포로 상주경찰서로 보냈다. 가네코의 유골은 남편의 고향인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에서 8㎞ 북쪽의 팔영리 산중턱에 묻혀 방치돼 오다가 2003년 지금의 자리로 이장되었다. 정부는 사후 92년이 지난 2018년 가네코 후미코 지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했다. 일본인으로는 후세 다쓰지(2004년 애족장)에 이어 2번째 서훈이다. 남편 박열 의사에게는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박열-가네코 후미코는 유일한 한일 부부 서훈자이기도 하다.

박열의사기념관 1, 2층에 전시된 초등학생들의 기록화. 박열-가네코 후미코가 조선의 옷을 입고 일제 검사·판사를 상대로 법정 투쟁하는 모습을 어린 학생들이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연구현황과 과제」 워크숍은 이날 오후 1시부터 3시50분까지 박열의사기념관 2층 강의실에서 1, 2부로 나뉘어 진행됐다.

워크숍의 첫 순서는 김창덕 이사(국민문화연구소)가 「‘흑도’ ‘후토이 센징’ ‘현사회’와 동지들」을 주제로 박열-가네코 후미코 부부가 16개월 동안 발간한 3가지 제호에 총 6호에 이르는 잡지에 대한 발제로 시작했다.
김 이사에 따르면 잡지 ‘黑濤’의 제호는 아나키즘의 언어라 할 수 있는 에스페란토어 ‘LA NIGRA OND’가 병기되어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은 절대자유를 강조한 아나키즘의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흑도 폐간 후 발행한 ‘후토이 센징’(담대한 선인)은 검열 당국이 ‘후테이 센징’(不逞鮮人, 못된 조선놈)의 사용을 불허하여 엇비슷한 발음의 월간 잡지로 발간한 것이다. ‘흑도’와 달리 볼셰비즘에 대한 비판을 담았고, 박열의 아나키즘 예술론도 엿볼 수 있다. ‘후토이 센징’마저 과격하다는 이유로 금지되자 제호를 바꿔 3, 4호를 발간한 ‘現社會’는 당시 일제가 안고 있던 각종 모순을 비판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고발하고 독립운동과 아나키즘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다. 박열-가네코 후미코 부부가 발간한 총 6호에 이르는 잡지의 기사 투고자나 광고 참여자에는 1920년대 초 일본의 거의 모든 아나키즘 운동, 마르크시즘 운동 계열의 인물 및 단체가 포함되어 있다.

7월23일(토) 오후, 한국아니키즘학회장을 지낸 김창덕 이사(국민문화연구소)가 「‘흑도’ ‘후토이 센징’ ‘현사회’와 동지들」을 주제로 발제하고 있다.

두 번째 발제에서 성주현 교수(1923제노사이드연구소)는 「해방 후 박열과 재일한인사회」를 고찰했다. 21세의 젊은 나이에 투옥된 박열은 22년 2개월이라는 수감기록을 세우면서 1945년 10월27일, 44세의 중년이 되어 홋카이도 변방의 아키다(秋田)형무소를 출소했다. 이후 신조선건설동맹(건동) 초대위원장,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거류민단)과 후신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민단)의 초대단장을 역임하면서 재일한인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46년 12월, 이승만은 미국 방문길과 귀로에 도쿄를 방문, 박열을 만나 향후 진로를 상의하였고, 박열은 이승만 계열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는 정치노선을 택했다. 이는 이강훈, 원심창 등 단독정부 수립에 미온적이거나 반대하는 그룹의 배제와 이탈을 가져왔다.
또한, 군국주의의 복멸과 천황제 타도를 주장한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의 김천해와 달리 박열은 천황제 인정과 일본 내정 불간섭을 천명하여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로서의 위상에 어긋나는 행보를 보여주었다. 해방 후부터 1949년 영구 귀국까지 5년간 박열의 재일한인사회 활동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마지막 세 번째 발제는 신진희 학예연구사(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가 「박열 연구에 대한 회고와 전망」을 주제로 발표를 이어갔다. 주 내용은 1920년대 초반 일본과 조선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뉴스메이커 박열의 생애사, 사상사, 독립운동사 연구를 더듬어 정리한 것이다. 발제문에 아나키즘과 독립운동 분야를 나누어 서술하였지만 둘 사이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 발제 제목과 달리 연구 전망이 담기지 않아 아쉽다는 현장의 목소리가 있었다.

전반부의 3개 발제에 따른 후반부 지정토론 시간은 김명섭 교수(단국대)가 좌장 사회를 맡았다. 조동범 교수(중앙대), 김인덕 교수(청암대), 강윤정 교수(안동대)가 지정토론에 나섰고, 이어 질의응답 시간으로 워크숍을 마쳤다.

한편, 이날 추모식·워크샵은 문경 박열의사기념관 우성민 학예사가 실무를 맡고, 역사나그네 손병주 회장(성남역사문화답사회)이 60명 규모의 추모단을 이끌면서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위] 문경시 마성면 샘골길 44 박열의사기념관 전경  [아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묘역

2022년 7월 15일 금요일

원팀 원스피릿으로

을지로는 서울시청에서 한양공고에 이르는 대략 2.74㎞의 거리를 말한다. 1984년 완전개통한 지하철 2호선(을지로 순환선)이 지나간다. 1914년 일제의 경성부 구역 획정 때는 황금정(黃金町)으로 불렸다. 구한말부터 화교들이 차이나타운 상권을 형성한 곳이어서 광복 후인 1946년 일본식 동명을 개정할 때 그 기를 누르려고 중국의 상극인 고수(高隋)전쟁의 영웅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의 성씨를 따와 을지로로 명명했다는 썰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대민의료기관인 혜민서(惠民署)가 자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의원과 약방이 클러스터를 형성한 구리개길(구리 빛이 나는 고개) 권역이기도 하다. 혜민서 옛터라는 공간에 착안해 과자점(혜민당)과 가배점(커피한약방) 콘셉트로 1940년대 지어진 건물을 리모델링한 주인장의 선견에 감탄한다.

점심나절에 AOK 장김은희, 정연진, 정에스더, 최성주 선생님이 명동 한여연에 내방해 주셨다. 동강나루터에서 국물 진한 참게메기매운탕과 바삭한 새우굴튀김에 막걸리 한잔씩 하고 나와, 골목길 커피한약방에서 한약 빛깔의 가배를 복용했다. 시간은 짧았지만 강렬한 얘기들… 1923년 1월 상하이 국민대표대회는 러시아·만주 계열의 창조파, 국내·미주계의 개조파, 김구·이동녕 등의 고수파로 갈리면서 통합에 실패하고, 1932년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가 나올 때까지 임시정부는 쇠락을 거듭했다. 적폐와 독재, 부조리라는 거악과 맞서기 위해 원팀 원스피릿으로 나아가야 하는 평화통일 사회단체와 시민조직이 교훈을 얻었으면 좋겠다. 


2022년 7월 8일 금요일

산파 박자혜

탑골공원 건너편으로 삼일대로를 걷다가 남인사마당의 「박자혜 산파 터」 표석 앞에 멈춰 섰다. 산파(産婆, Midwife)는 산모(産母)의 출산을 돕는 여성을 가리키는데, 어떤 일이 이루어지도록 주선하고 돕는 사람을 비유하는 의미로 확대되었다. 소크라테스는 문답을 통해 사람들이 무지를 자각하고 새로운 사상을 낳게 만드는 산파술을 즐겨 사용했다.

3·1만세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더라면 독립운동하는 남편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박자혜 선생은 덴노 치하의 태평천하 황국(皇國)에서 순탄한 신민(臣民)의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미래를 낳는 산모는 많지만, 미래를 낳게 하는 산파는 드물다. 박자혜 선생의 삶은 부조리한 현실을 대면하고 각성한 뜨거운 신념(조국애)이 개인과 사회를 변혁하는 데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변신하며 영달을 추구하는 꺼삐딴 이인국이나 미스터 방삼복은 소설 속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조국광복을 낳는데 일조한 산파 박자혜 선생의 자비로운(慈) 은혜(惠)에 부끄럽지 않게끔 고민하고 실천하는 일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다.



[패관잡록(稗官雜錄)](29) 산파 박자혜
미래를 낳는 산모, 미래를 낳게 하는 산파의 삶


한국여성연합신문 | 변자형 기자 | 승인 2022.07.08 19:18
http://www.k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108

종로구 인사동 남인사마당 한쪽에 「박자혜 산파 터」 표석이 있다. 대한간호협회(회장 신경림)가 간호역사뿌리찾기 사업을 추진하면서 2020년 1월22일 종로구청과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에 신청한 표석 설치 件을 서울시 문화재위원회 표석분과가 심의하여 같은 해 8월26일 지금의 위치에 표석을 설치했다.

표석에는 “박자혜(1895∼1943) 간호사가 산파를 개원한 곳이다. 박자혜는 3·1운동 때 간호사들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한 후 단재 신채호 선생과 결혼했다. 서울로 돌아와 산파로 활동하며 나석주 열사의 의거(1926년)를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을 펼쳤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1928년 12월12일자 동아일보의 「신채호 부인 방문기」 기사는 “냉돌(冷突)에 기장(飢膓) 쥐고 모슬(母膝)에 양아제읍(兩兒啼泣)”이라는 제목으로 ‘三旬에 九食으로 三母子 겨우 연명’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가운데 홀로 어린아이 형제를 거느리고 저주된 운명에서 하염없는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애처로운 젊은 부인이 있다. 시내 인사동 69번지 앞거리를 지내노라면 ‘산파(産婆) 박자혜(朴慈惠)’라고 쓴 낡은 간판이 주인의 가긍함을 말하는 듯이 붙어 있어서 추운 날 저녁 병에 음산한 기분을 자아내니 이 집이 조선 사람으로서는 거개 다 아는 풍운아 신채호 가정이다.
간판은 비록 산파의 직업이 있는 것을 말하나 기실은 아모 쓸데가 없는 물건으로 요사이에는 그도 운수가 같은지 산파가 원채 많은 관계인지 10달이 가야 한 사람의 손님도 찾는 일이 없어서 돈을 벌어보기는커녕 간판 붙여놓는 것이 도리어 남부끄러울 지경임으로 자연 그의 아궁지에는 불 때는 날이 한 달이면 사오일이 될까 말까 하야 말과 같은 삼순구식의 참상을 맛보고 있으면서도 주린 배를 움켜잡고 하루라도 빨리 가장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박자혜 여사는 밤이나 낮이나 대련형무소가 있는 북쪽 하늘을 바라볼 뿐이라 한다.”

1928년 12월12일(수)자 동아일보 5면에 관련 내용과 함께 박자혜 여사와 산파 문패 사진이 게재돼 있다.

박자혜 선생은 1895년 을미사변이 있던 해 12월11일 수유리에서 태어나 한성부에서 성장했다. 어린 나이에 애기나인으로 입궐해 궁중생활을 하다가 1910년 국권피탈로 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로 격하되면서 1911년 출궁했다. 이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기예과에서 공부하고 1914년 조산부양성소에 들어가 산파면허를 취득했다. 1916년경부터 조선총독부의원 산부인과에서 간호부로 근무하던 선생은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병원에 부상자가 줄을 잇는 상황을 맞닥뜨리면서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4명의 동료와 함께 간우회(看友會)를 결성, 3월10일에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동맹파업을 주도했다. 일경은 선생을 ‘악질적인 여자’ ‘과격하고 언변이 능한 자’로 규정했다. 병원장의 신병인도로 풀려난 선생은 바로 북경으로 넘어가 회문대학(연경대학) 의예과 재학 중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중매로 15살 연상(25세-40세)의 신채호를 만나 1920년 혼인했다.

부부이자 동지로써 독립운동을 함께하던 두 사람은 여느 독립운동가처럼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박자혜 선생은 경제적 곤궁을 드러내지 않은 채 “조선의 아이를 이역에서 키우고 싶지 않다”는 뜻을 남편에게 전하고, 1922년 두 살 큰아이(수범)를 데리고 작은아이(두범)를 임신한 몸으로 귀국했다. 그리고 종로구 조선극장 뒷골목에 ‘産婆 朴慈惠’ 간판을 걸고 전문 조산부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아이를 키우고, 중국과 국내의 연락을 중개하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26년 국내에 밀파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한 나석주 의사의 의거도 박자혜 선생의 경성길 안내에 힘입은 바가 크다.

1936년, 일경에 체포(1929)돼 10년형을 언도받고 뤼순감옥에서 복역 중이인 남편 신채호가 투옥 8년 만에 쓰러졌다는 급전을 받은 선생은 급히 뤼순으로 향했으나, 신채호는 이미 의식을 잃은 뒤였다. 결국 신채호는 1936년 2월21일, 57세에 옥중 순국하며 찬란한 불굴의 삶을 마감했다. 남편의 만기 출소만 기다리던 박자혜 선생에게는 천붕(天崩),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과 슬픔, 설움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조산원 벌이도 시원치 않아 선생의 삶은 더욱 곤궁하던 차에 큰아들 수범은 만주로 떠나보내고, 열다섯 작은아들 두범은 영양실조와 폐결핵으로 잃고 말았다. 가족을 모두 잃은 선생은 힘겨운 삶을 이어가다가 유일한 희망인 조국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43년 10월16일 단칸 셋방에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유해는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졌고, 2008년에야 남편 신채호의 고향인 충북 청원 고령신씨 선산에 합폄(유골 없는 합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박자혜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자혜 산파 터에서 불과 800m 거리 중학동에 주한일본대사관이 있고, 율곡로2길을 사이에 둔 수송동에 2011년 세운 평화의 소녀상이 있다. 매주 수요일 평화의 소녀상을 둘러싸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 문제를 알리는 단체와 그에 맞서는 보수세력 간 대치가 반복되고 있다. 청산하지 못한 일제 잔재와 이제 그 자리를 상당수 대체한 또다른 외세와 또 그 외세에 편승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기회주의자의 행태가 뭉쳐져 우리 사회의 통합과 진보를 가로막고 있다. 미래를 낳는 산모는 많지만, 미래를 낳게 하는 산파는 드물다. 조국광복을 낳는데 일조한 박자혜 산파의 자비로운(慈) 은혜(惠)에 부끄럽지 않은 후손으로 살아가기 위해 고민하고 실천하는 일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다.

종로구 인사동 남인사마당에 설치된 박자혜 산파 터(朴慈惠 産婆址) 표지석


2022년 7월 3일 일요일

마차공소의 어제와 오늘

영월군 북면 마차공소(磨磋公所)에서 주일미사에 참례했다. 이번 7월부터 매월 첫째주에 원주교구 영월성당에서 신부님(김진형 세자요한)이 나오셔서 4시 미사를 집전하는 일정이 잡혔는데, 운 좋게 날짜를 맞추게 됐다. 가톨릭교회에서 공소(公所)는 공적인 사무를 처리하는 장소라는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본당(本堂)보다 작은 규모의 교회 단위를 가리킨다. 공소에는 사제가 상주하지 않기에 공소회장을 중심으로 미사를 대신한 공소예절이 거행된다. 요컨대 공소예절은 성찬의 전례가 빠진 미사 형식이다.

북면 마차리의 영월광업소(마차탄광)는 1935년에 문을 연 영월탄전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전력주식회사가 건설한 영월발전소의 연료원을 공급하기 위해 개발됐다. 영월광업소는 48개 철탑이 받쳐주는 가공삭도(架空索道)를 통해 12㎞ 떨어진 영월화력발전소로 석탄을 운반하며 전성기(1952년 전후 7천명 직원)를 구가했다.

영월 마차공소 전경

영월 마차공소 내부

광산의 호황과 함께 인구가 증가하며 신자수가 100여 명에 이르자 ‘원주교구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대화성당의 故이영섭(프란치스코) 신부가 마차공소를 짓기 시작하여, 1962년(10.16)에 축성식을 가졌다. 이후 대한석탄공사로부터 지금의 자리를 기증받아 현 공소 건물과 사제관 등을 새로 지었다. 1965년(9.8)에는 영월본당에서 독립해 원주교구 내 14번째이자 교구 설정 후 1번째인 마차본당으로 승격하고, 마차6리2반 1107-1번지에 새 성전을 신축했다(주보 한국순교복자 79위). 하지만 사양길로 접어든 탄광산업을 따라 인구가 줄고 신자수도 급감하면서 불과 3년 뒤인 1968년(7.17)에 1대 본당신부 재임 중 다시 영월본당 관할 공소로 격하되었고 오늘까지 그때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요컨대 마차공소(마차리 1107-4)는 영월 마차탄광촌의 흥망성쇠를 모두 지켜본 셈이다.

미사 후 23년 동안 마차공소의 공소회장를 맡아온 신대식(다니엘) 선생님 댁에서 사모님이 내어주신 체리차를 마셨다. 신 회장님은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회원이다. 號를 東天으로 하여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다. [상] 동천 선생님이 쓴 서산대사의 禪詩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하] 「하늘새」 작품 하나를 선물로 주셨다. 고고한 鶴의 자태가 절묘하다.


2022년 7월 1일 금요일

쿼드? 오커스? 5아이즈? 그게 뭐지.

2015년 개봉한 007 시리즈의 24번째 영화 「스펙터 Spectre」(2015)의 한 장면. C(맥스 덴비)라 불리는 영국의 신임 합동정보국장이 도쿄에서 개최된 세계통합안보회의에서 주요 9개국의 첩보를 무제한으로 쓰기 위해 9개국 첩보기관을 잇는 실시간 정보공유 네트워크인 나인아이즈를 개설하는 투표를 진행한 결과 찬성 8, 반대 1(남아공)로 부결된다. 영화에서는 영국, 미국, 독일, 일본, 남아프리카공화국, 이탈리아, 스페인, 중국, 프랑스가 나인아이즈(Nine Eyes) 9개국이다. 2015년 당시 각본이나 제작 측에서 내세운 이 국가들은 서방세계가 생각하는 일반적 중견국을 포함한다. 여기엔 오스트레일리아(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인도 정도가 빠져 있다.

현실세계에서는 영미권 5개국 간의 군사동맹 및 정보네트워크인 파이브 아이즈(Five Eyes)가 존재한다. 이는 상호 첩보동맹을 맺고 있는 앵글로색슨系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나, 뉴질랜드, 영국, 미국 5개국(AUS/CAN/NZ/UK/US EYES ONLY)을 이르는 말이다. 미국(NSA)은 영국(GCHQ), 오스트레일리아(ASD), 캐나다(CSE), 뉴질랜드(GCSB)를 제외한 그 어떤 나라도 완전한 우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 국가의 신호정보 수집 및 분석 네트워크를 통틀어 에셜론(ECHELON)이라 한다.

007 시리즈 「Spectre」(2015)의 한 장면. “나인아이즈(Nine Eyes)의 회원국들은 공유된 정보 데이터를 통해 세계를 장악할 수 있을 겁니다.” 현실에서는 미영캐호뉴 5개의 눈(Five Eyes)이 전세계의 사적 통신망까지 들여다보는 에셜론(Echelon)을 운용하고 있다.

아메리칸 국뽕영화 「탑건: 매버릭 Top Gun: Maverick」(2021)은 전작 「탑건 Top Gun」(1986)에 이어 자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세력을 용납하지 않는 슈퍼파워로서의 의지를 표출한다. 도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인 1986년 「탑건」이 개봉하자 예년보다 2만명 많은 하이틴과 이대남이 군에 자원입대했고, 이중 1만6천명이 해군에 지원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1964~1975) 초반 해군 전투기조종사의 저숙련으로 공대공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바, 이를 개선하기 위해 해군 전투기조종사 학교(US Navy Fighter Weapons School)를 설립(1969)하고 ‘탑건’으로 불리는 SFTI 프로그램(Navy Strike Fighter Tactics Instructor Program, 미해군 타격 전투기 전술 강사 프로그램)을 운용했다. 엄호와 유인 등 윙맨(Wingman)의 역할을 강조한 팀플레이 전술을 중시한 결과 SFTI 프로그램 전 북베트남의 미그(MiG)機에 대한 미 해군의 살상률은 2.42대1에서 12.5대1로 증가했다. 군산복합체(軍産複合體, MIC: Military–Industrial Complex)라고 하지 않던가. 최고의 국뽕 항공액션 엔터테인먼트에 전폭적인 지원을 쏟아부으면서 펜타곤과 해군성은 다시 한번 젋은이들의 군입대 러시를 기대하고 있다.

톰 크루즈는 「Top Gun」(1986)에서 입었던 재킷을 35년이 지난 「Top Gun: Maverick」(2021)에서도 그대로 입고 등장한다. 톰 크루즈가 걸친 항공점퍼 등짝에 미국기와 일본기, 타이완기가 선명하게 패치로 부착돼 있다.

파이브 아이즈(Five Eyes)에서 3개국만 추린 미·영·호 3자 안보협의체 오커스(AUKUS: Australia, the United Kingdom and the United States), 미·일·인·호 4자 안보대화 쿼드(QUAD, Quadrilateral Security Dialogue), 舊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 창설한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중국의 新실크로드 전략인 일대일로(一带一路, OBOR: One Belt One Road)에 대항하기 위한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 Indo-Pacific Economic Framework) 등 미국이 주도하는 對중국, 對러시아 포위·압박체는 화려하고 폭넓은 스쿼드를 자랑한다.

주요 플레이어 국가들은 자국의 안보와 이익을 위해 Route(길)와 Resouce(자원)를 확보하려 부단히 움직인다. 길과 거점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장악·연결하고 있는가, 얼마나 전략자원이 있는 곳에 접근·통제하는가에 따라 국가가 취하는 행동은 달라진다. 우리가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인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Status of Forces Agreement),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General Security of Military Information Agreement), 한미 실무협의체(ROK-US Working Group)에도 지정학과 국익에 입각해 주요 현안을 분석하는 냉철함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미국에 끌려다니며 독자적인 대응권을 상실한 상태로는 다시금 우리 강토를 주전장(主戰場, The Main Battleground)으로 내주는 최악의 디스토피아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패권국가 미국의 우리땅 군사기지화를 90여년 전 일제의 병참기지화로 연결지을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여전히 지평‘線’에 심취해 안주하면서 입체‘面’을 보지 못하는 굥本夫丈에게는 바이 기대할 바가 없다는 것이 답답한 한계상황이다.


2022년 6월 29일 수요일

기록되어 있다

28일(화) 어제 #종로마을N 제4기 기자아카데미 4회차 강좌는 하동훈 사진작가가 잡힐 듯 또는 안 잡힐 듯한 이미지의 감성을 들려주었다. 단순히 사진 잘 찍는 스킬을 나열할 것으로 예상했던 나는 크게 한 방 먹었다. 「곁에서 바라보기」라는 주제로 △잘 찍은 사진(?) △이미지 퀄리티(빛) & 내용(대상과 프레임) △관점 △시점 △초점으로 이어가는 하동훈 작가의 말하기(telling)와 보여주기(showing)는 한 편의 인문학 강의를 연상케 했다.

아래 사진은 하동훈이 2013년에 1년간 서아프리카의 부르키나 파소(Burkina Faso)에 머물며 그네들의 평범한 일상을 담고 있을 때, 자동차정비소에서 일하는 한 아이가 고장난 카메라로 하 작가를 찍어주겠다며 장난치던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이 작품은 아프리카인사이트가 공모한 「내가 만난 아프리카」展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아이의 해맑은 미소에서 가난, 기아, 질병, 고통, 전쟁 같은 고정된 부정적 관념은 쉬이 연결되지 않는다.

문학과 마찬가지로 사진을 대할 때에도 표현론이 어쩌니 반영론, 효용론이 어떻느니 하는 것들은 한낱 언어의 사변에 그치게 된다. ♬느낌 그대로를 말하고 생각한 그 길로 움직이면 되는 것𝅗𝅥 

기자학교 수강생은 다음 시간까지 「내가 사랑하는 것」을 주제로 10장 내외의 사진을 제출해야 한다. 다음주에는 강좌를 마치고 한잔하기로 했다. 오징어 데치고 전 부치는 소리가 추임새 되는 22년 장마, 종로거리 천장 낮은 허름한 주점에서 서로 작가가 되고 독자가 되어 술잔을 기울일 게다. 

시선과 교감

하동훈 작가는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의 「연금술사」(1988)를 꼽았다. 하 작가는 이 책에 자주 등장하는 아랍어 마크툽(Maktub)을 왼팔뚝에 문신했다. 「연금술사」 100쪽에는 ‘그건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이미 씌어있는 말이다’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이다’라는 의미로 해석돼 있다.


2022년 6월 25일 토요일

그대들의 조국은 안녕하신가?

경술국치를 당한 그해 10월, 만해 한용운은 대륙으로 넘어갔고, 1911년 만주 동북삼성(東北三省)에서 김동삼을 만나게 된다. 일송 김동삼은 만주벌판 말을 달리던 무장투쟁의 지도자로서 무오독립선언과 민족유일당촉진회를 주도했다. 일송은 경학사, 신흥학교, 부민단, 백서농장, 서로군정서 참모장 활동을 거쳐,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듯이 독립운동계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그러나 1931년 하얼빈에서 일경에 피체돼 조선으로 송환된 후 경성감옥에서 복역 중 1937년 4월13일, 만 59세로 옥중 순국하며 불굴의 삶을 마감한다.

만주지역 독립운동진영에서 ‘통합의 화신(化身)’, ‘만주벌 호랑이’라 불리며 일생을 조국의 독립에 헌신한 일송이었지만, 서슬 퍼런 식민치하의 공포 분위기 속에서 누구도 선뜻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주검을 수습해 가지 않았다. 이때 만해 스님이 나서서 일송의 시신을 심우장으로 모셔와 5일장을 지내며 극락왕생을 발원했다. 5일장을 치르면서 다녀간 조문객은 고작 20여 명뿐. 만해는 영결식에서 방성대곡했다. 만해가 일생에서 눈물을 흘린 것은 이때 한 번뿐이었다고 전한다.

오후 1시, 성북동 尋牛莊에서 극단 더늠의 창작뮤지컬 「심우」를 관람했다. 뮤지컬은 만해가 재혼해 얻은 딸 영숙의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된다. 딸자식이 일제의 교육을 받는 것을 단연히 거부하는 아버지를 모셨기에 영숙은 보통학교에 다니는 대신 심우장의 화초와 나무를 벗삼아 소일하는 홈스쿨러다. 속을 알 수 없는 괴팍한 아버지를 ‘땡중’이라 호칭하기도 하지만, 「나룻배와 행인」 「차라리」를 낭송하며 관객에 자랑하기도 한다.

1937년 음력 3월, 영숙은 제자들이 전하는 일송의 부음을 듣고 크게 상심하는 아버지가 걱정스럽다. 일송의 장례를 치르면서 만해가 제자들에게 묻는다. “몇 명이나 왔더냐?” 1937년 당시 일송의 마지막을 지켜본 이는 20여 명에 불과했고, 85년이 지난 2022년 오늘 공연엔 60여 명이 함께했다. 그렇담 100년이 되는 시점엔 몇이나 동참하며 기억할까?

오후 3시에 경운동 천도교대교당에서 「김지하 시인 추모문화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며칠 전부터 듣고 있었지만 숙고할 것도 없이 성북동 심우장을 택했다. 김지하의 변신 혹은 변절이 없었다면 표절 시비는 크게 불거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1937년 당시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끌려가고, 2022년 당년엔 국가보안법에 걸리면 잡혀가는 역사가 재현되고 있다. 신천(信天) 함석헌 선생이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하고 읊은 것처럼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사회운동에 매진한다는 분들께 감히 여쭌다. “한 살 터울의 만해와 일송이 보여준 뜨거운 同志愛를 당신들은 가졌는가?”

빙허 현진건의 단편 「고향」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신민요 가사가 후퇴하는 민주주의, 민영화로 치닫는 경제정책, 분단조국의 고착화 등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당금의 현실과 겹친다. “볏섬이나 나는 전토는 신작로가 되고요/ 말마디나 하는 친구는 감옥소로 가고요/ 담뱃대나 떠는 노인은 공동묘지 가고요/ 인물이나 좋은 계집은 유곽으로 가고요”

극 중 만해가 “그대들의 조국은 안녕하신가?”라며 앞줄 관객에게 물었고, 그분은 “잘 나가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난 속으로 조아렸다. “후손들이 못나서 먹구름이 몰려오는데도 방비를 못하고 있습니다.”

만해의 또다른 대사가 먹먹함을 준다. “목 놓아 울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미친 듯이 웃어라. 그도 아니면 가만히 묵념이라도 해라.” 하 수상한 시절이어도 만해 스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잃어버린 소를 찾아나서야(심우) 한다.

http://www.k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103


2022년 6월 23일 목요일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

‘장마’는 고어에 ‘댱마ㅎ’라고 했으니, ‘댱’은 ‘길다(長)’는 뜻이고, ‘마ㅎ’는 ‘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글자 그대로 ‘긴 비’라는 뜻이겠다.

윤흥길의 중편 「장마」는 6·25전쟁기의 장마철을 시간적 배경으로 국민학교 3학년 아이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국군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한 아들(외삼촌)을 둔 외할머니와 인민군으로 참전했으나 소식이 없는 아들(삼촌)을 둔 친할머니의 갈등은 장마와 더불어 시작되고 장마가 끝날 무렵 화해로 해소된다.

‘온 세상을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는’ 장마는 가족사의 오랜 불행을 상징하며, 나아가 우리 민족에 닥친 전쟁의 비극적 상황이 계속되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소설의 끝문장은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로 과거형이다. 더 많은 깨친 사람들이 지혜롭고 영험한 구렁이로 化하면 이다지도 지긋지긋한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파탄 없이 융화로 인도해나갈 수 있을까.


2022년 6월 21일 화요일

서도소리 배뱅이굿 직관

지난 토요일(18일) 오후, 서도소리 배뱅이굿을 처음 직관했다. 故 이은관 명인을 사사한 운보 김경배 예능보유자가 1인 다역을 소화한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찾아가는 문화재 공연」이 남양주시 수동 멀티스포츠센터에서 열렸다. 운니동 팔도강산국악예술단 몇 분이 찬조공연에 나서게 되어 따라가 일일사진사 역할을 수행했다.

배뱅이굿의 줄거리는 탁발 나온 상좌중과 사랑에 빠진 정승댁 무남독녀 배뱅이가 상사병을 앓다 죽자 부모가 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팔도의 무당을 불러 모아 굿을 하는데 건달 청년이 가짜 무당행세로 횡재한다는 내용이다. 배뱅이굿을 완창할 경우 2시간이 넘게 소요되는데, 굿에 나오는 노래만 해도 36곡이란다. 기억해야 할 것은 배뱅이굿은 굿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도의 판소리(북 반주)처럼 소리꾼이 장구 반주에 맞춰 배뱅이 이야기를 서도의 기본 창법을 바탕으로 민요와 무가, 재담 등을 섞어 해학적으로 엮어낸다. 나이를 먹어가는 것인지 우리 가락이 점점 정답고 흥겨워진다.



서도소리 배뱅이굿이 왔구나, 왔소이다!
남양주 수동면 물골안공동체 주민들 열띤 호응

한국여성연합신문 | 변자형 기자 | 승인 2022.06.21 11:33
http://www.k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095

팔도강산국악예술단이 함께한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찾아가는 문화재 공연」이 성황리에 종료됐다.

팔도강산국악예술단(단장 이춘화)은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배뱅이굿 예능보유자 김경배가 주최하고 ㈔배뱅이굿보존회가 주관하여 남양주시 수동 멀티스포츠센터에서 개최한 「찾아가는 문화재 공연」이 18일(土)일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고 밝혔다.

공연에는 배뱅이굿 예능보유자와 이수자, 전수장학생 등 출연진과 찬조 출연진이 무대에 올라 배뱅이굿 중 △둥둥타령(배뱅이의 출산과 성장) △사랑타령(배뱅이와 상좌중의 만남과 사랑) △어머니의 곡(배뱅이의 죽음) 등을 열창했다. 또한, △내 이름은 배뱅이 △불쌍한 배뱅이 등의 창작곡(양진희 사, 김경배 곡)을 더해 서사의 완성도를 높였다. 출연진은 번갈아 무대에 올라 △상여소리 △무당소리 △태평가 △난봉가 △풍구타령 △뱃노래 등을 선보였다.

이날 공연장을 찾은 수동면 물골안 공동체(회장 이희원) 주민 100여 명은 서도의 기본 음악 어법을 바탕으로 민요와 무가, 재담 등을 버무린 배뱅이굿 특유의 구성진 노랫가락에 손뼉을 치며 호응했다.

한 주민(70대·여)은 “배뱅이가 죽는 장면이 너무 슬펐지만, 어렸을 때 봤던 일도 기억나고 재미있었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이번 공연은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원장 이경훈)과 한국문화재재단(이사장 최영창)이 주최, 운영하여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들이 기량을 펼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국가무형문화재 공개행사’와 무형문화유산의 대중화 및 전승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한 전승자의 자유로운 기획을 지원하는 ‘전승자 주관 전승활동 기획행사’의 하나로 펼쳐졌다.

한편, ‘서도소리’란 황해도 지방이나 평안도 지방에서 불리어 온 노래를 아울러서 부르는 이름이다. 이날 공연된 서도소리 배뱅이굿의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서울 장안의 최정승이 명산대찰을 찾아가 정성껏 빌어서 겨우 얻은 무남독녀 배뱅이가 탁발을 나온 상좌중과 눈이 맞아 사랑을 하게 되는데, 다시 온다고 약속하고 떠나간 상좌중이 돌아오지 않자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된다. 이에 최정승 내외는 각도의 무당을 불러 죽은 딸자식의 넋이나 듣자고 굿을 하게 되는데, 마침 평안도 건달이 주막집에 들렀다가 주모에게 배뱅이네 집 내력을 듣고 굿판에 들어가 배뱅이가 살아 돌아온 것처럼 꾸민다. 여기서 “왔구나, 왔소이다.”라는 널리 알려진 대목이 나온다. 

18일, 팔도강산국악예술단은 「서도소리 배뱅이굿」 공연에 상여소리와 부채춤 등으로 무대에 올랐다.

18일(土) 오후,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찾아가는 문화재 공연」 출연진이 관객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2022년 6월 20일 월요일

영월 장릉의 ㄱ자형 참도, 세호 없는 망주석

세조 3년(1457) 영월 관풍헌에 거처하던 노산군(魯山君)이 유배 4개월 만에 16세로 세상을 떠나자,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시신을 거두어 현재의 자리에 가매장하였다. 사후 59년이 지난 중종 11년(1516)에야 봉분을 갖추었다. 이후 숙종 7년(1681)에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추봉하고, 숙종 24년(1698)에 묘호를 단종(端宗)으로 복위, 추존하면서 노산군묘를 능제에 맞게 다시 조성하고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장릉의 진입공간에는 여타 조선왕릉과 다르게 단종의 충신들을 위한 건축물이 있다. 노산군의 시신을 거두어 묘를 만든 엄흥도의 정려각(旌閭閣), 노산군묘을 찾아 제를 올린 영월군수 박충원(朴忠元)의 뜻을 기린 낙촌비각(駱村碑閣),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종친, 신하, 환관, 궁녀, 노비 등 268人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藏版屋)과 이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배식단(配食壇)이 있다.

신로(神路)와 어로(御路)는 지형에 맞게 조성하여 ㄱ자로 꺾여 있다. 그 밖에 장명등, 망주석, 문석인, 석수 등은 정종의 후릉(厚陵)의 능제에 따라 작게 조성하였으며, 무석인은 생략하였다.

사적 제196호 영월 장릉(寧越 莊陵)

영월 장릉은 처음부터 왕릉으로 택지된 곳에 조성한 능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적인 조선왕릉의 구조와 다른 점이 많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參道, 左신로+右어로)는 일자형으로 조성되지만, 영월 장릉은 ㄱ자형으로 꺾여 있다.

능침에는 추존왕릉 제도에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능침 주변의 석양과 석호도 한 쌍만 조성했다. 무력으로 폐위된 왕이기 때문에 다른 왕릉과 달리 무인석이 없다. 또한 봉분 좌우에 세우는 망주석(望柱石)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세호(細虎)가 없다.

박충원 낙촌비(朴忠元 駱村碑)는 영월군수이던 낙촌 박충원이 노산묘를 찾은 사연을 기록한 기적비이다. 엄흥도 정려각(嚴興道 旌閭閣)은 영조 2년(1726)에 어명으로 세운 비각으로, 엄홍도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각이다. 1970년 장릉 경내로 옮겨 세웠다.

장판옥(藏版屋)은 충신위(忠信位) 32인, 조사위(朝使位) 186인, 환관군노위(宦官軍奴位) 44인, 여인위(女人位) 6인 등 총 268인의 합동 위패를 모셔놓은 곳이다. 정조 15년(1791)에 건립했다. 배식단(配食壇)은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 조사, 환자군노, 여인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매년 단종제향과 함께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 1440~1521)의 사릉(思陵)에 있는 소나무들은 하나같이 가지를 동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이는 왕후가 남편이 있는 영월 쪽을 바라보기 때문이라 하여 1999년 4월9일 남양주 사릉의 소나무 하나를 영월 장릉에 옮겨 심고, 정령송(精靈松)이라 명명했다. 정순왕후 사후 478년 만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