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4일 일요일

소오강호 갑신정변(笑傲江湖 甲申政變)

138년 전인 1884년 12월4일(음력 10월17일) 밤10시. 급진개화파가 우정국(郵政局) 낙성식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켰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은 서양의 문물을 수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입헌군주제 정치 구조를 지향함으로써, 근대 국민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최초의 정치개혁 운동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당시 농민들의 염원이었던 토지소유 문제에 대한 뚜렷한 해결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개혁의지는 근대적이었지만, 일반 백성을 개혁의 주체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추진하여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또한 청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으나 유사시 지원을 하겠다는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밀약 등 일본의 침략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외세에 의존하여 정변을 일으키는 한계를 노출했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보겠다고 일어섰다(1884)가 48시간 만에 실패하고 10년 만(1894)에 자객(홍종우)에게 암살된 후 부관참시까지 당한 혁명가 김옥균은 1895년 일본의 청일전쟁 승리 후 관작을 회복했다. 그리고 1910년 경술국치 두달 전에 대광보국숭록대부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고 충달(忠達) 시호를 받았다. 참으로 소오강호(笑傲江湖)의 실사판 삶이다.

1884년 11월18일, 우정총국은 왕실 약재를 담당하던 전의감(典醫監) 터에서 우체업무를 시작했다. 개국 17일만인 12월4일 저녁, 우정총국 낙성식을 기화로 김옥균·박영효·서재필·서광범·홍영식 등 개화당이 수구당 민씨 외척 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수립할 목적으로 정변을 일으킨다. 하지만 3일 만에 끝이 나면서, 홍영식은 죽고, 나머지는 일본으로 도주했다.

고난도로 어렵게 출제된 적은 없지만, 검정고시를 대비해야 하는 입장에서… △청과 사대관계 청산 △입헌군주제 수립 시도(내각 중심의 정치) △근대적 경찰제 시행 △문벌의 폐지, 인민 평등권의 확립(신분제 철폐)과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지조법(地租法) 개혁 △혜상공국 철폐(자유로운 상업 발전) △재정의 일원화 등을 시도한 갑신정변의 14개조 정령(1884)은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안 12개조(1894), 관민공동회의 헌의 6조(1898)와 비교해 수업해야 한다.

①청에 잡혀 간 흥선대원군을 곧 돌아오게 하며, 종래에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②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 ③지조법을 개혁해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한다. ④내시부를 폐지하고 그중에 재능 있는 자만을 등용한다. ⑤전후 간사한 관리와 탐관오리 가운데 현저한 자를 처벌한다. ⑥각 도의 환상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 ⑦규장각을 폐지한다. ⑧급히 순사를 두어 도둑을 방지한다. ⑨혜상공국을 혁파한다. ⑩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와 옥에 갇혀 있는 자는 그 정상을 참작하여 적당히 형을 감한다. ⑪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되,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급히 설치한다. ⑫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통할한다. ⑬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⑭의정부, 6조 외의 모든 불필요한 관청을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이것을 심의 처리하도록 한다.

지금 보아도 상당수가 여전히 유효한 개혁안이다. 급진개화파(문명개화론)와 온건개화파(동도서기론)의 분화, 정변의 최고참 김옥균(34), 막내 행동대원 서재필(피제손·20), 통명전에서 폭약을 터뜨린 궁녀 고대수(顧大嫂·42), 다케조에초(죽첨정·竹添町) 지명을 탄생시킨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와 관련한 에피소드는 시간이 빠듯하여 검정대비 수업시간에는 이야기할 수 없다.

한성순보(漢城旬報)는 박문국이 1883년부터 1884년까지 순 한문으로 발행하였다. 10일 간격으로 발행했는데, 정부의 정책을 홍보하는 관보였다. 갑신정변으로 한성순보가 폐간된 후 그 후신으로 박문국이 1886년에서 1888년까지 국한문혼용체로 한성주보를 발행하였다. 탑골미술관이 있는 서울노인복지센터 자리에 한성주보를 발간한 박문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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