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9일 금요일

한그루 소나무… 일송(一松) 김동삼의 삶

헤아려보니 일송 김동삼 선생의 함자를 알게 된 건 2014년 처음으로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을 탐방하면서였다. 1931년 하얼빈에서 피체된 후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37년(4.13)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김동삼 선생의 시신을 만해 한용운 스님이 모셔다 오일장을 치르고 유해를 한강에 뿌리며 서럽게 울 때, 홍안의 문학청년 조지훈 시인도 그 옆에 서서 함께 울었다고 했다.

남만주의 호랑이(南滿猛虎) 김동삼(金東三, 1878~1937) 선생은 1907년 안창호·양기탁·이동휘·이동녕 등이 창건한 비밀결사 신민회에 참여한 후 1911년 만주로 건너간 이래 경학사(사장 이철영), 부민단(초대단장 허혁,  2대단장 이상용), 서로군정서(독판 이상룡), 신흥무관학교(교장 이시영), 무오독립선언(작성자 조소앙), 국민대표회의(의장), 민족유일당촉진회(위원장) 등에서 활약한 독립운동의 거목이지만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지난 4월13일 발족한 일송김동삼선생기념사업회가 첫번째 학술대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잠깐 짬을 내 효창동 백범기념관에 다녀왔는데 이덕일, 김병기, 이시종의 발제에서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이런 일정한 자리(서대문형무소)에서 죽게 되는 것도 과분한 일이다. 독립군이라면 대개 풀밭이나 산 가운데서 죽는 것이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는 한그루 소나무 일송(一松) 김동삼의 유언을 되새겨볼 때 이명박정부에서 법무부장관을 지낸 검사 출신 인사와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인물이 기념사업회장과 토론자로 초빙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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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 김동삼 선생 기리는 첫번째 학술대회 개최
만주의 독립운동 통합을 위한 노력 조명


일송김동삼선생기념사업회(회장 김경한)는 9일(금) 오후 2시, 백범김구기념관 대회의실에서 「일송 김동삼과 민족 통합의 길」을 주제로 첫 학술대회를 열었다.

첫 발제는 ‘일송 김동삼과 국민대표회의’를 주제로 이덕일 소장(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이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6개월간 열린 국민대표회의의 의의를 강조하며, 의장으로 선출된 김동삼의 활약상을 조명했다.

두번째 발제에는 김병기 위원장(대한독립운동총사 편찬위원회)이 ‘만주지역의 민족유일당운동과 김동삼’을 주제로 발표에 나서, 1920년대 중반 이념과 노선을 초월해 전개된 민족유일당 결성 움직임을 소개했다.

마지막 3주제는 이시종 사무차장(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이 대종교 및 서간도에서의 활동과 관련한 ‘일송 김동삼의 역사의식과 독립투쟁’을 발표했다.

이어 김창기 전 편집국장(조선일보), 김민아 과장(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조의행 교수(서울신학대)가 각 주제발표에 대한 토론을 맡았다.

김동삼의 손녀 김복생氏를 포함해 50명의 청중이 함께한 이날 학술대회는 이덕일 역사TV가 유튜브 생중계했다.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1878~1937)은 1911년 만주 망명 이후 1931년 하얼빈에서 체포돼 1937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기까지 ‘만주벌 호랑이’로 불리며 독립투쟁을 주도하면서 민족유일당운동에 힘쓴 인물이다. 지난 4월13일(수) 일송 김동삼을 추앙하고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한 기념사업회가 발족했다.

9일 오후 개최된 일송김동삼선생기념사업회 제1회 학술대회에서 김병기 위원장이 2주제인 ‘만주지역의 민족유일당운동과 김동삼’을 발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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