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25일 토요일

그대들의 조국은 안녕하신가?

경술국치를 당한 그해 10월, 만해 한용운은 대륙으로 넘어갔고, 1911년 만주 동북삼성(東北三省)에서 김동삼을 만나게 된다. 일송 김동삼은 만주벌판 말을 달리던 무장투쟁의 지도자로서 무오독립선언과 민족유일당촉진회를 주도했다. 일송은 경학사, 신흥학교, 부민단, 백서농장, 서로군정서 참모장 활동을 거쳐,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듯이 독립운동계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그러나 1931년 하얼빈에서 일경에 피체돼 조선으로 송환된 후 경성감옥에서 복역 중 1937년 4월13일, 만 59세로 옥중 순국하며 불굴의 삶을 마감한다.

만주지역 독립운동진영에서 ‘통합의 화신(化身)’, ‘만주벌 호랑이’라 불리며 일생을 조국의 독립에 헌신한 일송이었지만, 서슬 퍼런 식민치하의 공포 분위기 속에서 누구도 선뜻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주검을 수습해 가지 않았다. 이때 만해 스님이 나서서 일송의 시신을 심우장으로 모셔와 5일장을 지내며 극락왕생을 발원했다. 5일장을 치르면서 다녀간 조문객은 고작 20여 명뿐. 만해는 영결식에서 방성대곡했다. 만해가 일생에서 눈물을 흘린 것은 이때 한 번뿐이었다고 전한다.

오후 1시, 성북동 尋牛莊에서 극단 더늠의 창작뮤지컬 「심우」를 관람했다. 뮤지컬은 만해가 재혼해 얻은 딸 영숙의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된다. 딸자식이 일제의 교육을 받는 것을 단연히 거부하는 아버지를 모셨기에 영숙은 보통학교에 다니는 대신 심우장의 화초와 나무를 벗삼아 소일하는 홈스쿨러다. 속을 알 수 없는 괴팍한 아버지를 ‘땡중’이라 호칭하기도 하지만, 「나룻배와 행인」 「차라리」를 낭송하며 관객에 자랑하기도 한다.

1937년 음력 3월, 영숙은 제자들이 전하는 일송의 부음을 듣고 크게 상심하는 아버지가 걱정스럽다. 일송의 장례를 치르면서 만해가 제자들에게 묻는다. “몇 명이나 왔더냐?” 1937년 당시 일송의 마지막을 지켜본 이는 20여 명에 불과했고, 85년이 지난 2022년 오늘 공연엔 60여 명이 함께했다. 그렇담 100년이 되는 시점엔 몇이나 동참하며 기억할까?

오후 3시에 경운동 천도교대교당에서 「김지하 시인 추모문화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며칠 전부터 듣고 있었지만 숙고할 것도 없이 성북동 심우장을 택했다. 김지하의 변신 혹은 변절이 없었다면 표절 시비는 크게 불거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1937년 당시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끌려가고, 2022년 당년엔 국가보안법에 걸리면 잡혀가는 역사가 재현되고 있다. 신천(信天) 함석헌 선생이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하고 읊은 것처럼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사회운동에 매진한다는 분들께 감히 여쭌다. “한 살 터울의 만해와 일송이 보여준 뜨거운 同志愛를 당신들은 가졌는가?”

빙허 현진건의 단편 「고향」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신민요 가사가 후퇴하는 민주주의, 민영화로 치닫는 경제정책, 분단조국의 고착화 등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당금의 현실과 겹친다. “볏섬이나 나는 전토는 신작로가 되고요/ 말마디나 하는 친구는 감옥소로 가고요/ 담뱃대나 떠는 노인은 공동묘지 가고요/ 인물이나 좋은 계집은 유곽으로 가고요”

극 중 만해가 “그대들의 조국은 안녕하신가?”라며 앞줄 관객에게 물었고, 그분은 “잘 나가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난 속으로 조아렸다. “후손들이 못나서 먹구름이 몰려오는데도 방비를 못하고 있습니다.”

만해의 또다른 대사가 먹먹함을 준다. “목 놓아 울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미친 듯이 웃어라. 그도 아니면 가만히 묵념이라도 해라.” 하 수상한 시절이어도 만해 스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잃어버린 소를 찾아나서야(심우) 한다.

http://www.k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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