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20일 월요일

영월 장릉의 ㄱ자형 참도, 세호 없는 망주석

세조 3년(1457) 영월 관풍헌에 거처하던 노산군(魯山君)이 유배 4개월 만에 16세로 세상을 떠나자,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시신을 거두어 현재의 자리에 가매장하였다. 사후 59년이 지난 중종 11년(1516)에야 봉분을 갖추었다. 이후 숙종 7년(1681)에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추봉하고, 숙종 24년(1698)에 묘호를 단종(端宗)으로 복위, 추존하면서 노산군묘를 능제에 맞게 다시 조성하고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장릉의 진입공간에는 여타 조선왕릉과 다르게 단종의 충신들을 위한 건축물이 있다. 노산군의 시신을 거두어 묘를 만든 엄흥도의 정려각(旌閭閣), 노산군묘을 찾아 제를 올린 영월군수 박충원(朴忠元)의 뜻을 기린 낙촌비각(駱村碑閣),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종친, 신하, 환관, 궁녀, 노비 등 268人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藏版屋)과 이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배식단(配食壇)이 있다.

신로(神路)와 어로(御路)는 지형에 맞게 조성하여 ㄱ자로 꺾여 있다. 그 밖에 장명등, 망주석, 문석인, 석수 등은 정종의 후릉(厚陵)의 능제에 따라 작게 조성하였으며, 무석인은 생략하였다.

사적 제196호 영월 장릉(寧越 莊陵)

영월 장릉은 처음부터 왕릉으로 택지된 곳에 조성한 능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적인 조선왕릉의 구조와 다른 점이 많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參道, 左신로+右어로)는 일자형으로 조성되지만, 영월 장릉은 ㄱ자형으로 꺾여 있다.

능침에는 추존왕릉 제도에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능침 주변의 석양과 석호도 한 쌍만 조성했다. 무력으로 폐위된 왕이기 때문에 다른 왕릉과 달리 무인석이 없다. 또한 봉분 좌우에 세우는 망주석(望柱石)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세호(細虎)가 없다.

박충원 낙촌비(朴忠元 駱村碑)는 영월군수이던 낙촌 박충원이 노산묘를 찾은 사연을 기록한 기적비이다. 엄흥도 정려각(嚴興道 旌閭閣)은 영조 2년(1726)에 어명으로 세운 비각으로, 엄홍도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각이다. 1970년 장릉 경내로 옮겨 세웠다.

장판옥(藏版屋)은 충신위(忠信位) 32인, 조사위(朝使位) 186인, 환관군노위(宦官軍奴位) 44인, 여인위(女人位) 6인 등 총 268인의 합동 위패를 모셔놓은 곳이다. 정조 15년(1791)에 건립했다. 배식단(配食壇)은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 조사, 환자군노, 여인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매년 단종제향과 함께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 1440~1521)의 사릉(思陵)에 있는 소나무들은 하나같이 가지를 동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이는 왕후가 남편이 있는 영월 쪽을 바라보기 때문이라 하여 1999년 4월9일 남양주 사릉의 소나무 하나를 영월 장릉에 옮겨 심고, 정령송(精靈松)이라 명명했다. 정순왕후 사후 478년 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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