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8일 수요일

王을 낳은 後宮들

청와대 옆 궁정동에는 칠궁(七宮)이 있다. 무슨 궁궐 이름이 아니라 후궁 7人의 신주를 모셔놓은 사당이다. 수많은 후궁 중 王을 낳았기 때문에 특별히 모셔놓았다. 원래는 독립된 7개의 사당이 각기 다른 곳에 있었다. 그러다 융희 2년(1908)에 제사제도를 정비하면서 육상궁에 다른 5개의 사친묘를 합사하여 육궁(六宮)이라 하였는데, 1929년 덕안궁이 옮겨오면서 지금처럼 칠궁(七宮)이 되었다.

칠궁은 △경종의 어머니 희빈장씨의 대빈궁 △영조의 어머니 숙빈최씨의 육상궁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이씨의 선희궁 △순조의 어머니 수빈박씨의 경우궁 △영친왕의 어머니 엄귀비의 덕안궁 △영조의 후궁이자 진종의 어머니인 정빈이씨의 연호궁 △선조의 후궁이면서 원종의 어머니인 인빈김씨의 저경궁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들을 낳은 내명부 여성은 권력을 쥘 수 있었다. 하지만 순조의 모친인 수빈박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들이 王이 되기 전에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조선후기에는 후궁이 낳은 王이 늘어남에 따라 그 모친의 추존논쟁이 빈번해졌다.

최선경의 「왕을 낳은 후궁들」(2007·김영사)은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모친인 폐비윤씨와 공빈김씨도 소개하고 있다. 아들의 성공을 통해서만 그 존재의미가 부여됐던 여성들의 삶을 시기 모함의 궁중암투로만 바라보는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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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궁정동 칠궁에서 「2023 칠궁제」 봉행
매년 10월3째주 화요일에 2개 영역에서 동시 제향

http://www.k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310

「2023 칠궁제(七宮祭)」가 17일 오전 11시,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 칠궁에서 봉행되었다.

칠궁(사적 제149호)은 역대 왕이나 추존된 왕의 모후로서, 종묘에 부묘되지 못한 일곱 후궁(後宮)의 신위를 모신 곳으로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의 숙빈묘(淑嬪廟)에서 비롯했다. 육상묘(毓祥廟), 육상궁(毓祥宮)으로 개칭된 숙빈최씨의 사우(祠宇)에 1908년 저경궁,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 경우궁 등 5개의 묘당을 옮겨 육궁(六宮)이라 하였다. 1929년에는 덕안궁이 옮겨와서 지금처럼 칠궁(七宮)이라 부르게 되었다.

칠궁은 영역 좌측부터 ①저경궁(추존왕 원종의 생모 인빈김씨) ②대빈궁(경종의 생모 희빈장씨) ③선희궁(장조의 생모 영빈이씨) ④경우궁(순조의 생모 수빈박씨) ⑤덕안궁(영친왕의 생모 순헌귀비엄씨) ⑥육상궁(영조의 생모 숙빈최씨) ⑦연호궁(추존왕 진종의 생모 정빈이씨) 순으로 줄지어 있고 이에 따른 행랑과 2채의 재실 등이 배치되어 있다.

이날 제례는 제관들이 봉무할 자리로 나아가는 취위(就位)를 시작으로 △신관례(晨祼禮) △진조례(進俎禮) △초헌례(初獻禮) △아헌례(亞獻禮) △종헌례(終獻禮) △음복례(飮福禮) △철변두(撤籩豆) △송신례(送神禮) 후 축문 불사르는 것을 확인하는 망료(望僚) 순으로 진행됐다.

칠궁은 공간 특성상 한 곳에서 제사를 모실 수 없기 때문에 저경궁 영역의 5개 궁(저경궁·대빈궁·선희궁·경우궁·덕안궁)과 육상궁 영역의 2개 궁(육상궁·연호궁)으로 나누어 동시에 제사를 거행한다. 제향일은 매년 10월 3째주 화요일이다.

「2023 칠궁제」


2023년 10월 16일 월요일

환구단 황궁우에서 2023 환구대제 봉행

용문사 가는 길 오른편의 양평 친환경농업박물관에 들렀더니 ‘우리 근·현대 농업사’ 연표에 대한제국의 시작을 떡하니 1896년으로 표기해 전시하더군. #잘좀하자

1896년 2월10일 아관파천했던 고종이 1897년 2월20일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고종은 을미사변 이후 미뤄왔던 왕후의 국장을 치르고, 8월17일 광무(光武) 연호를 채택했다. 10월2일 소공주동 남별궁 터에 건설을 지시했던 환구단이 열흘 만에 완공되자 10월12일 백관을 거느리고 환구단에 나가 천신에 고하고 황제 위(位)에 올랐다.
일제가 환구단을 헐고 1914년 그 자리에 지은 경성철도호텔(현 웨스틴조선호텔)을 보면서 전준이씨 종친들은 무슨 생각을 해야 옳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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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소공동 황궁우에서 「2023 환구대제」 봉행
황제만이 올릴 수 있는 천제(天祭) 재현
http://www.k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309

12일 오전 11시, 「2023 환구대제(圜丘大祭)」가 서울시 중구 소공동 환구단 황궁우에서 봉행되었다.
환구대제는 황제가 하늘에 제를 올리는 제천의례로 상고시대의 제천문화(祭天文化)에서 유래했다. 조선 초 중국 명나라의 압력으로 폐지된 것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재개했으나 일제에 의해 다시 폐지됐다.

126년 전인 1897년 10월12일(음력 9월17일), 고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환구단에 올라 황천상제(皇天上帝)께 천제(天祭)를 올리고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황제로 등극했다. 이는 청, 러시아,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 세계 열강과 대등한 자주독립 국가임을 전 세계에 밝힌 역사적 사건이다.

이날 제례는 제관들이 배위에 나아가 사배하고 각각 봉무할 자리로 나아가는 취위(就位)를 시작으로 △영신례(迎神禮) △신관례(晨祼禮) △진조례(進俎禮) △초헌례(初獻禮) △아헌례(亞獻禮) △종헌례(終獻禮) △분헌례(分獻禮) △음복례(飮福禮) △철변두(撤변豆) △송신례(送神禮)후 황제가 축과 폐를 불사르는 것을 바라보는 망료(望僚) 순으로 진행됐다.
고종황제의 증손이며, 대한제국황실 5대 수장인 이원(李源) 황사손(皇嗣孫)이 황천상제·황지기(皇天上帝·皇地祇)와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등 3위의 제주(祭主)를 맡아 제례를 올렸다.

환구단(圜丘壇, 사적 제157호)은 고종이 황제로서 제천의례를 행하던 곳이다. 1897년 10월, 고종이 옛 남별궁 터에 환구단을 조성했으나, 일제는 1913년 단을 철거하고 1914년 경성철도호텔(현 조선호텔 전신)을 건축했다. 현재는 3층 팔각당인 황궁우(皇穹宇)와 석고(石鼓), 삼문 정도만 남아 있다.

황제만이 제천단(환구단)에 올라 하늘의 상제께 천제(환구대제)를 올릴 수 있으며, 왕은 종묘와 사직에서 제례를 올릴 수 있다. 사직대제와 종묘대제는 광복 후 복원됐고, 환구대제는 2008년에야 복원돼 매년 (사)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주관하여 봉행하고 있다.

12일, 조선시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국가 제례인 환구대제(圜丘大祭)가 서울 중구 환구단(圜丘壇)에서 봉행되고 있다.


2023년 9월 23일 토요일

봄을 기다린 나목(裸木), 박수근

(협)마을대학종로의 ‘소설 속 종로 걸어보기’ 3차시 탐방지로…
▲동대문 실내스케이트장 자리, 동대문아파트, 유가협 한울삶, 창신동 봉제골목과 시장길을 걸으며
▲대한제국의 수사찰 원흥사지, 풍양조씨 조만영 별서지, 안동김씨 김좌근이 중창한 청룡사, 정순왕후의 정업원·동망봉, 숭인동 채석장절개지, 동관왕묘를 둘러보면서
▲미석 박수근, 백남준, 배호, 배정자(다야마 사다코), 김광석, 신정왕후 조씨, 전태일, 임종상, 이수광, 김좌근, 정순왕후 송씨, 한수정후 관우, 박완서의 페르소나 이경의 퇴근길을 고현(考現)했다.
공간이 사라지면 기록이 사라지고, 기록이 사라지면 기억도 사라진다. 적극적으로 감춰지는 망각의 시도나 의도적인 기억의 방치에 저항한다. 암담하고도 불안한 시기일지언정 미치지도, 환장하지도, 취하지도, 놓지도, 포기하지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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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293

봄을 기다린 나목(裸木), 박수근
소설 속 종로 걸어보기③ 박완서 성장소설 「나목」
창신동·숭인동 골목길에서 공간을 기억하다


‘소설 속 종로 걸어보기’ 3차시 탐방지는 창신동과 숭인동이다. 주제소설은 박완서의 데뷔작 「나목」(1970)이다.

10일(日) 오전 10시30분. 첫 포스트는 6호선 동묘앞역 6번출구에서 직진 70m 지점이다. 이곳은 소설에서 화가로 등장하는 옥희도의 실제 모델인 박수근의 창신동 집터이다. 박수근은 6·25전쟁 동안 미8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려주고 모은 돈으로 창신동에 방 둘, 마루 하나가 딸린 18평 한옥을 장만했다. 그리곤 1952년부터 1963년까지 11년간 거주하면서 자신의 대표작들을 구상했다. 집터 벽면 계량기 옆 홈통에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쓴 ‘박수근 화백 사시던 집’이라는 세로글씨가 보인다.

9월10일 오전, 2023년 「종로구 주민소통 공모사업」 ‘소설 속 종로 걸어보기’ 참가자들이 6호선 동묘앞역 6번출구 앞에서 일정을 체크하고 있다.

경로를 거슬러 다시 6번출구 앞 시즌빌딩으로 이동한다. 복합플라자 시즌빌딩 자리는 1964년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아이스링크인 ‘동대문 실내스케이트장’이 개장한 곳이다. 수지를 맞추기 위해 여름철에는 로라장(롤러스케이트장)이나 식용얼음을 제조하는 공장으로 변신하며 운영하다가 1990년대 중반 문을 닫았다.

시즌빌딩 오른편은 1967년 완공되어 현존하는 서울시 아파트 중 두 번째로 오래된 동대문아파트다. 방 2개에 욕실 1개가 딸린 9평짜리 좁은 아파트지만 한때 이주일, 백일섭 등 연예인들이 거주해 ‘연예인 아파트’로 불리기도 했다. 지하 1층, 지상 6층에 중정(中庭)이 있는 ㅁ자형 건물배치가 특이하다.

동묘앞역 7번출구에서 8번출구 방면으로 길을 건너 백남준기념관으로 향한다. 백남준이 1937년부터 1950년까지 살았던 3천평 규모의 대규모 저택은 오래전에 헐렸지만, 쪼개진 필지 중 하나에 주민공동체와 서울시립미술관이 각각 카페와 기념관을 운영하며 공존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직물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부친 백낙승에 대해 백남준은 ‘친일파’와 ‘외화획득’이라는 양가감정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1998년 독일 괴테 인스티투트(Goethe Institut)가 비독일인 예술인사의 공로를 인정하는 괴테메달을 수상했다. 명성과는 별개로 유창한 일어에 비해 어눌한 우리말, 18세에 유학을 나가면서 6·25전쟁을 회피했다는 비판 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창신동 두산아파트를 지나면 지봉로5길 낙산냉면 앞이다. 1946년부터 1955년까지 가수 배호가 살던 집터다. 배호는 1942년 중국 산둥성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한국광복군 출신이다. 1967년 배상태가 작곡한 「돌아가는 삼각지」로 스타덤에 올랐으나 지병인 신장염이 도져 1971년 29세로 숨을 거뒀다.

9월10일 오전, 2023년 「종로구 주민소통 공모사업」 ‘소설 속 종로 걸어보기’ 참가자들이 창신동 백남준기념관을 둘러보고 있다.

1902년 대한제국 황실은 내탕금을 내 조선 전체의 사찰을 총괄하는 수사찰로 대본산원흥사(大本山元興寺)를 창건했다. 1912년에 불교의 중심이 4대문 안 각황사(현 조계사의 전신)로 옮겨가면서 1916년 원흥사 자리에 창신공립보통학교가 문을 열었다. 1970년 당시 창신국민학교는 무려 122학급 1만166명의 학생수를 기록했다. 가수 배호, 이장희, 김광석과 이종찬 광복회장(23대)이 창신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창신초 교문에서 왼편 골목길을 따라 걸어 창신동장난감도서관을 지나니 바로 안양암(安養庵) 대문이 나타난다. 대웅전의 주불은 아미타불이고 덧집 형태의 관음전에는 높이 3.53m의 마애관음보살을 모셔두었다. 안양암 대문 좌측의 철제문 안쪽 공간에는 5개의 비석이 있다. 이 중 ‘南無阿彌陀佛(나무아미타불)’이라고 음각된 비석의 왼쪽 면에 삼화부인회 고문 裵貞子(배정자)의 이름이 보인다.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딸로 알려진 배정자(다야마 사다코, 1870~1952)는 그 악질적인 친일 밀정활동으로 광복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기도 했다. 딸 현송자가 좌옹 윤치호의 사촌동생 윤치오(중추원 부찬의)의 셋째 부인이다.

안양암에서 얕은 비탈의 창신5길을 오르면 대구에서 상경한 가객 김광석이 15년간 거주(1975~1990)하며 음악에 대한 열정을 불사른 작은 집이 나온다. 좌측 계단과 붙어 있는 이 집은 집터를 알리는 세모꼴 동판이 철거돼 쉽게 가늠할 수 없다. ‘국가유공자의 집 김수영’이란 부친의 문패로 겨우 확인할 수 있다.

창신5길을 200여m 내려오다가 창신길과 만나는 시 사거리에서 가마치통닭(창신점)까지 창신골목시장을 이동한다. 이곳 창신길 651번지 일대는 효명세자빈 신정왕후 조대비의 친정 별장이 있어서 ‘조만영 별서지’로 기억되는 곳이다. 조대비는 철종 사후 흥선군의 차남 이명복을 남편 익종(문조)의 양자로 삼아 익성군으로 봉해 왕위에 올리고 수렴청정하다가 흥선대원군에게 국정을 넘긴 인물이다. 지난 6월25일 진행한 ‘소설 속 종로 걸어보기’ 1차시의 주제소설 「운현궁의 봄」의 주요인물인데 또 이렇게 연결된다.

창신2길 방면 U자로 길을 돌면 ‘한울삶’(한 울타리의 삶) 현판을 단 한옥에 다다른다. 1986년 8월12일에 발족한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현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유족들이 사무공간 겸 생활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공간이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산화해 간 130여 열사의 영정이 함께하고 있다. ‘전정권’에서는 문무일 검찰총장이 한울삶을 방문해 “지난 검찰의 잘못된 부분에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자식을 먼저 보낸 유가협 어머님, 아버님들은 지금도 양심수 석방과 민주유공자법 제정촉구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한울삶 북쪽 50m 전방에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바꿔내고자 자기 몸을 불사른 아름다운 청년의 정신을 기리는 전태일재단이 자리하고 있다.

9월10일 오전, (협)마을대학종로가 진행하는 2023년 「종로구 주민소통 공모사업」 ‘소설 속 종로 걸어보기’ 참가자들이 유가협의 터전 ‘한울삶’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이들을 고현하고 있다.

소규모 봉제공장이 밀집해있는 창신동 647번지 일대는 노찾사 2집의 「사계」 노랫말처럼 드르륵드르륵 “미싱은 잘도 돌아”가고 샘플과 완제품을 운반하는 오토바이가 종횡한다. 창신·숭인 도시재생사업으로 2018년 문을 연 이음피움 봉제역사관은 5년 만인 2023년 2월말 운영이 종료됐다. 국내 최초 봉제역사관이 문을 닫은 이유는 그동안 서울시 예산으로 위탁업체가 운영해왔는데 초기 예상과 달리 이용객 수가 적어 서울시의 민간위탁 종합성과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아 계약이 연장되지 못해 폐관의 수순에 들어간 것이라고 한다.

봉제골목 위쪽 창신동 641번지 공영주차장 인근에는 일제와 영합해 고리대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임종상의 호화저택이 있었다. 전쟁과 산업화, 도시화 과정에서 서울 달동네로 밀려든 가난한 사람들이 정착해 판자촌을 형성했던 모습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탐방단은 낙산성곽길 아래 창신동 골목길을 800여m 걸어 ‘비를 가리는 집’ 비우당(庇雨堂)에 이르렀다. 실학의 선구자 이수광은 낙산 동쪽 상산의 한 줄기인 지봉(芝峯) 아래에 외가쪽 5대조 할아버지인 하정 류관의 낡은 집을 고쳐 살며 백과사전 「지봉유설」을 저술했다. 단출한 비우당 삼간집 뒤로는 단종비 정순왕후가 명주를 담갔더니 자주색 물이 들었다고 전하는 ‘자주동샘’이 있다.

원각사와 명신초등학교를 경유해 낙산길을 돌아 동망산길 골목으로 내려오면 청룡사(靑龍寺) 지붕이 보이기 시작한다. 단청 없는 우화루(雨花樓)는 열일곱 군부인 송씨가 영월(寧越)로 유배 가는 열여섯 노산군과 마지막 밤을 보냈다는 전각이다. 하염없이 ‘비꽃(雨花)이 내리는 누각’이란 이름이 ‘편안히(寧) 넘어가(越)’지 못하고 꺾여버린 두 사람의 삶을 예고하는 것 같아 애련하다. 청룡사 옆 정업원(淨業院)은 왕가나 사대부가 여인들이 출가하여 머물던 사찰로 전해진다. 단종비 송씨가 깨끗하게 불도를 닦으며(淨業) 동망(東望)했던 서러움의 구기(舊基, 옛 자취가 남아 있는 빈터) 승방이다.

숭인동 좁은 계단의 경사진 골목길을 내려와 6호선 라인의 이면도로인 지봉로12가길을 걷는다. 채석장 절개지 아래로 대한불교 법화종 법왕사(法旺寺)의 불사 등 공사가 한창이다. 영조 47년(1771)에 임금이 친히 동망봉(東望峰)이라는 글자를 써서 바위에 새기게 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근처 지역이 채석장으로 쓰이면서 바위가 깨어져 나가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창신동에 살았던 박수근은 이 채석장 풍경에서 영감을 얻어 화강암 질감과도 같은 그의 유채화 덧칠 기법을 고안했는지도 모른다.

답사를 시작한 지 어느덧 2시간 30분이 넘어 1시 가까이 되었다. 상춘원(귀족회관) 터와 강경대기념관 터는 다음 기회에 둘러보기로 하고, 동묘앞 3번출구 황학동 벼룩시장 길로 들어섰다.

숭인동 채석장 절개지 위쪽이 동망봉 자리이다. 2015년 12월 수립된 채석장 명소화 사업계획은 2023년 4월 이후 사실상 중단된 상태이다.

동관왕묘(보물 제142호)는 서울의 동쪽에 있는 관우의 묘(사당)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임진왜란 이후인 1599년, 명나라 신종 만력제가 현액(縣額)과 비용을 보내와 조선 조정에서 1601년(선조34)에 완성했다. 동묘 정전은 정(丁)자와 일(一)자가 합쳐진 공(工)자의 앞뒤로 긴 직사각형 형태이다. 내부는 앞쪽이 제례를 위한 전실이고, 뒤쪽이 관우와 부장들의 조각상을 둔 본실이다. ‘顯靈昭德義烈武安聖帝廟(현령소덕의열무안성제묘)’라고 쓰인 현판이 2개인데, 오른쪽 것은 1908년(융희2) 북묘가 동묘에 합사되면서 가져온 현판으로 추정된다. 정전은 전면을 제외한 나머지 3면이 벽돌로 둘린 퓨전한 양식을 하고 있다.

숙종이 능행 후 귀궁하면서 동묘에 들른 것이 선례가 된 이래 역대 임금이 배알하는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한수정후(漢守亭候) 관우 운장은 400여 년 전 조선땅에 들어와 군신으로 관왕으로 관제로 올려지며 왕실과 민간의 추앙을 받았다. 지금도 중국집에 가면 관우의 그림이나 조각상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동묘 인근 서울다솜관광고등학교 자리는 노비로 강등된 정순왕후를 가엾게 여긴 동네 아낙들이 조정의 눈을 피해 먹을거리를 건네주는 등 금남의 채소시장을 열어 정순왕후를 돌보았던 여인시장(女人市場)이 있던 곳이다. 여기서 종로58길 남단 청계천변은 정순왕후가 단종을 떠나보내면서 마지막으로 이별을 한 ‘영영 건넌 다리’ 영도교(永渡橋)로 이어진다.

9월10일 오후, 2023년 「종로구 주민소통 공모사업」 ‘소설 속 종로 걸어보기’ 탐방단이 숭인동 동관왕묘를 둘러본 후 펼침막을 들고 기념 촬영하고 있다.

1914년 일제는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동부 숭신방(崇信坊)과 인창방(仁昌坊)에서 머리글자를 조합해 숭인동(崇仁洞)을, 가운데 글자를 합성해 창신동(昌信洞)이라는 엉뚱한 지명을 만들었다. 이름이 사라지면 공간이 사라지고, 공간이 사라지면 기억도 사라진다. 그래서 오늘과 같이 특정 사건을 만들거나 사건에 휩쓸린 공간을 기억하기 위한 걸음이 요구되는 것이다.

주제소설 「나목」에서 주인공 이경은 동화백화점 미군PX에서 중앙우체국을 지나 을지로입구로 해서 종로네거리 화신백화점 있던 종각 쪽을 거쳐 계동집으로 퇴근하는 동선을 보여준다. 이 코스는 소설가 구보가 이동했던 길로 지난 2차시(7월23일)에서 우리가 이미 한 차례 고현(考現)을 거쳤다. 그래서 오늘은 창신동과 숭인동 골목을 걸었다. 말라서 죽어버린 고목(枯木)이 아니라, 다만 잎이 떨어져 가지만 앙상한 나목(裸木)은 새봄의 찬란함을 예고할 수 있다.

2023년 「종로구 주민소통 공모사업」 ‘소설 속 종로 걸어보기’ 마지막 4차시는 10월22일, 혜화동과 명륜동을 탐방한다.


2023년 9월 20일 수요일

조선의 범들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1878~1908) 향년 30세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1878~1937) 향년 58세
백두산 호랑이 홍범도(1868~1943) 향년 75세

「작은 땅의 야수들」… Beasts of a Little Land
@BNCORTEMADERA


2023년 9월 5일 화요일

간토학살과 박열-가네코 후미코의 반천황제 투쟁

지난 금요일(9월1일) 문경에서 열린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과 대역사건」 학술회의 일정에 동행했다. 주최 격인 박열의사기념사업회 소위 윗분들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이날로 100주기를 맞은 간토학살이 논의의 중요한 축임에도 행사에서는 학살희생자를 위한 묵념이나 애국가 제창이 식순에서 제외돼 의식있는 일반 참가자들의 반감과 항의를 불러왔다. 기념관에 전시된 자료에도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 표기하고 있어 일반의 오해를 사고 대중에 대한 확장성을 스스로 막아서고 있다.

유토피아(utopia)의 u가 ‘없다’인 것처럼 아나키(anarchy)의 a 역시 ‘없다’는 뜻이다. 때문에 각각 ‘장소가 없다’, ‘지배가 없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아나키즘은 왜곡된 번역 ‘무정부주의’가 아닌 진정한 자유와 평등의 연대와 공동체를 지향하는 ‘무권력주의’ ‘무강권주의’로 보아야 자연스럽다.

재해로 죽었는데도 ‘학살’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이상하다며 사과를 거부하는 日本정부나 세월호, 이태원, 오송, 내성천 등지의 일은 ‘사고’일 뿐이라며 책임을 부정하는 韩国정부나 피차일반 도긴개긴. 우리 시대의 불령한인(不逞韓人)으로 살아야 하는 걸까. 함께하며 바른 소리를 내어주신 모든 분께 고마운 마음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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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289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과 대역사건」 학술회의 열려
간토대학살과 박열-가네코 후미코의 반천황제 투쟁 짚어


박열의사기념사업회(이사장 박인원)는 1일(금), 간토학살 100주기를 맞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과 대역사건」을 주제로 한·일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프로그램은 오전에 문경시 마성면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 여사 묘소를 참배하는 것으로 일정을 시작했다.

가네코 후미코는 남편 박열과 함께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부정하고, 아나키즘(무강권주의) 사상을 전파하였다. 그러던 중 1923년 간토대지진 직후 체포되어 1924년 2월15일 ‘천황폭살’, 이른바 ‘대역사건’으로 기소되었다. 재판과정에서 가네코는 일제의 탄압정책을 비판하고 조선 독립운동을 옹호하였다. 1926년 사형선고를 받고 바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지만 1926년 7월23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

헌화를 마친 참가자들은 기념공원 내 박열의사기념관을 찾아 일제 사법부의 갖은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은 박열-가네코 후미코 부부의 투쟁정신을 살펴보고 박열의사생가지를 돌아봤다.

9월1일(금) 오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과 대역사건」 학술회의에 참석한 일본인 6명(앞줄)이 가네코 후미코 묘소에서 참배하고 있다.

9월1일(금) 오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과 대역사건」 학술회의에 참석한 일본인 6명(앞줄)이 가네코 후미코 묘소에서 참배하고 있다.

오후 1시30분부터 문경관광호텔 무궁화홀에서 열린 학술회의는 박인권 이사장의 개회사와 이용수 경북북부보훈지청장, 이종찬 광복회장(영상), 이문창 선생의 축사를 시작으로 총 3부로 나눠 이어졌다.

우성민 학예연구사의 사회로 진행된 주제발표 순서에는 한·일 양국에서 각각 2명의 발표자가 동시대에 일어난 ‘조선인 학살’과 박열-가네코 후미코의 ‘대역사건’ 간 관계를 조명했다.

첫 발표에 나선 성주현 교수(청암대학교)는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 언론에 비친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주제로 관동대지진 직후의 조선인 학살과 관련 재판, 진상규명에 대한 언론보도를 살폈다. 성 교수는 ‘조선인 폭동설’ 등의 유언비어 전파와 자경단의 학살 양상을 유추할 수 있는 보도 사례도 제시하였다.

이어진 발표에서 김명섭 교수(단국대학교)는 ‘1923년 간토 조선인대학살과 박열사건’을 고찰했다. 대지진으로 인한 공포와 혼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일본당국의 재일한인 학살과 검속 와중에 검거된 박열-가네코 후미코는 폭탄투척계획이 누설돼 대역죄를 적용받았으나, 이를 회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반천황제 투쟁을 벌여나갔음을 강조했다.

세 번째 주제발표에선 가메다 히로시(일본사회문학회)가 ‘1922년 시나노가와 조선인 학살사건과 박열-가네코 후미코. 일제에 대한 투쟁의 시작’에서 천황을 정점으로 한 폭력장치가 피지배민과 피지배지역을 억압했다고 지적하며, 박열-가네코 후미코의 삶은 지금도 계속되는 ‘편견과 차별’에 항거하는 생활양식으로 우뚝 서 있다고 밝혔다.

마지막 주제발표에 나선 구리하라 야스시(도호쿠예술공과대학)는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의 역사적 배경과 가네코 후미코의 사상’을 통해 한국병합(1910)과 러시아출병(1918)의 경험이 홉스적 세계관을 현실화하면서 학살의 배경을 형성했다고 진단했다. 이에 대해 가네코 후미코는 아나키즘과 니힐리즘, 센티멘탈리즘을 뿌리 삼아 다시 없는 ‘지금’을 사는 것으로 대항한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1일 오후, 문경관광호텔 무궁화홀에서 열린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과 대역사건」 학술회의에 참석한 발표자와 토론자들. 왼쪽부터 이양희, 김창덕, 강정훈, 김병기, 성주현, 김명섭, 가메다 히로시, 구리하라 야스시氏

주제발표에 이어진 종합토론은 김병기 편찬위원장(대한독립투쟁총사)이 좌장을 맡아 진행하였고, 세 명의 패널이 차례로 토론에 나섰다.

먼저 강정훈 교수(경상국립대학교)가 1923년 조선인 학살 당시 유언비어가 생성·유포되어 선동·살육으로 이어지는 정황들을 확보·발굴할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으로 서두를 열었다. 이어서 김창덕 이사(국민문화연구소)가 박열 의사의 폭탄 반입 성공 여부를 질문했다. 마지막으로 이양희 교수(충남대학교)는 조선인학살의 역사적 배경 간 연계와 확장을 언급하면서 재향군인회 중심의 자경단에 대한 일본군의 영향을 질의했다.

이날 학술회의에는 국민문화연구소 회원, 한터역사문화연구소 회원, 일본인 연구자 등 60여 명이 함께했다. 박열의사기념관 우성민 학예연구사는 “이번 학술회의는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학살과 박열-가네코 후미코 대역사건에 대해 한일 양국 시민이 서로 의견을 밝히고 공유하며 향후 교류 방안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컸다.”고 전했다.

9월1일(금) 오후, 문경관광호텔 무궁화홀에서 열린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과 대역사건」 학술회의 참석자들이 단체촬영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