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29일 화요일

바보라 불러다오… 노인동맹단 왈우(曰愚) 강우규의 항일투쟁

왈우(曰愚) 강우규(姜宇奎, 1855~1920) 의사는 평남 덕천 사람이다. 함남 홍원에서 한약방과 잡화점을 운영하던 차에 1908년 성재 이동휘(1873~1935)를 만나면서 감화되어 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계몽운동을 펼쳤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1911년 북간도로 망명했다. 1914년 북우(北愚) 계봉우(1880∼1959)가 왈우의 블라디보스토크 집에 2개월간 유숙하며 저술한 「만고의사 안중근전」을 보고 가슴 속에 새기면서 훗날의 의거를 다짐한 것으로 전한다.

1919년 3월26일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된 ‘대한국민 노인동맹단’에 가입해 요하현 지부장으로 활동했다. 40세에서 70세 사이의 노인(당시 기준)들로 구성된 노인동맹단의 임무는 실전에 참여하는 청년 독립투사들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왈우는 3·1운동으로 경질되는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후임으로 오는 총독을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확보한 수류탄을 숨겨 원산부로 반입했다.

1920년 9월2일, 65세의 왈우는 경성부 남대문정거장에서 사이토 마코토 신임총독의 마차에 투척하였는데 수류탄은 마부 앞 7보 떨어진 곳에서 폭발해 37명에게 중경상을 입혔지만 사이토 폭살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의거 직후 혼란한 군중틈을 빠져 나온 왈우는 결연한 의지로 재거사를 계획하였으나, 거사 15일 만인 9월17일 종로구 가회동 장익규의 집에서 조선인 순사 김태석에게 체포되었다. 일제의 법정에서도 꼿꼿한 기개를 보여준 왈우는 결국 사형을 언도 받고 같은해 11월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 (단두대상 유재춘풍 유신무국 기무감상) “단두대 위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 왈우가 순국하며 남긴 사세시(辭世詩)가 옛날같이 쓸쓸하다.

[위]의거 현장인 옛 서울역사 앞에는 2011년 9월2일, 왈우 강우규 의사의 동상이 세워졌다. [아래]국립서울현충원 순국선열 강우규의 묘(독립유공자-40). 정부에서는 왈우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단두대상 유재춘풍 유신무국 기무감상) “단두대 위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

왈우의 남대문역 투탄의거는 3·1운동 이후 감행된 최초의 의열투쟁으로, 독립운동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노인에 의한 폭탄 투척 의거였다. (요즘으로 치면 80세 즈음으로 볼 수 있는) 65세의 노인이 항일운동 최전선에 나선 이유는 바보(愚-어리석을우)라 불러달라(曰-가로왈)는 호(曰愚)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아마도 조선의 청년들에게 ‘망국’이라는 굴레를 씌운 기성세대의 어리석음을 만회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왈우의 의열투쟁정신은 의열단과 한인애국단, 흑색공포단 등으로 이어지며 김익상, 김상옥, 나석주, 박열, 조명하,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원심창과 같은 열혈 조선 청년들의 모범이 되었다.

왈우 강우규 의사의 순국일(11.29)인 오늘 우리 사회의 참어르신을 찾는다. 진영논리에 매몰돼 가짜뉴스를 공유하며 확증편향을 불리는 태극기 할배들이 득실댈 뿐 사회갈등을 보듬고 아픔을 치유해야할 정치권 수뇌(首腦)는 물론 종교계 장상(長上) 중에서도 ‘어른’으로 추앙하고 따를 만한 지혜로운 노인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 현실이 씁쓸하다.

2022년 11월 27일 일요일

다시 꿈꾸는 백년

한자 투성이에다 붙여쓰기를 한 기미독립선언문은 의미 파악은 물론 읽는 것도 쉽지 않다. ― “吾等은玆에我朝鮮의獨立國임과朝鮮人의自主民임을宣言하노라此로써世界萬邦에告하야…”
국한문 혼용의 강건체 문장을 한글로 옮기고 띄어쓰기를 적용하면 그럭저럭 읽기는 가능하지만, 여전히 오등(吾等), 자(玆), 차(此)와 같은 어휘가 독해를 방해한다. ― “오등은 자에 아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딸깍발이 이희승 선생이 국역한 문장은 이해가 쉽다. ―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국에 알리어…”

3·1만세운동 100주년을 앞둔 2018년 9월18일, 서울지하철 3호선 안국역이 독립운동 테마역으로 재탄생하면서 △100년 하늘문 △100년 계단 △100년 기둥 △100년 강물 △100년 헌법 △100년 승강장 △100년 걸상 △3·1운동 청색지도 등이 설치됐다. 특히 19190301–20190301을 26개의 계단으로 잇고 있는 ‘100년 계단’은 한글학자 이희승이 풀어 쓴 3·1독립선언문 2,167자를 자음과 모음으로 분리하여 푸른색 UHPC(초고성능 콘크리트)로 제작해 붙였다. 안국역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우리 시대의 독립과 해방을 생각한다. 3·1만세를 부른 자(순절), 부르지 않은 자(거절), 부르다 만 자(변절)들은 100년의 간극을 넘어 현재도 저마다의 선택을 이어 나간다. 아예 꿈도 꾸지 않을 것인가, 꿈을 꾸었으나 중도에 꺾을 것인가, 아니면 계속 꿈을 꾸며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국에 알리어…” 한 글자를 2칸(리)이나 4칸(우·선) 또는 6칸(는)으로 구성했는데 주사위에 세 핍 기호(⚂)는 블랭크(blank)이다.


2022년 11월 23일 수요일

직지대모 박병선

오늘 중학2단계 사회시간에는 고려청자의 우수성과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술을 공부했다. 늘 그렇듯 문해교과서의 내용을 보충하는 심화 인쇄물을 준비했다. 어머니들은 고려청자의 이름 붙이는 방법을 재미있어하신다. ①맨 앞에 ‘청자’를 나타냄 ②기법을 나타내는 말을 씀 → 상감·양각·음각·투각 등 ③그릇에 표현된 무늬나 모양을 나타내는 말을 씀 → 운학무늬(구름+학), 포도동자무늬(포도+아이) 등 ④그릇의 용도를 씀 → 매병, 정병, 접시, 주전자, 향로, 항아리, 연적 등… 이렇게 하면 △청자 상감 포도동자문 주전자 △청자 양각 죽절문 병 △청자 음각 연화당초문 매병 △청자 투각 칠보문뚜껑 향로 같은 이름이 만들어지는데, 이는 분청사기나 백자의 작명에도 적용된다.

「백운화상초록 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14자의 긴 이름이다. 공민왕 때인 1377년 서원부(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된 「불조직지심체요절」 금속활자본은 독일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보다 78년이 앞선다. 현재 하권 1책(총 38장)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전하고 있다. 이곳 사서로 근무하며 「직지심체요절」(1967)과 외규장각 「의궤」(1975)를 발견해 세상을 놀라게 한 서지학자 故 박병선 박사의 활약상을 소개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파리위원부 청사까지 찾아낸 박병선 박사는 2011년 5월,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가 약탈해간 의궤의 반환을 보고 그해 11월22일(현지시간) 파리에서 영면에 들었다.

올바른 신념과 이를 관철하기 위한 굳은 열정은 외딴 곳에 홀로 서서 눈을 맞는 갈매나무다. 오늘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되찾으려 일생을 헌신한 ‘직지대모’ 박병선 박사(1923~2011)의 기일(한국시간 11.23)이다. 언젠가 동작동 현충원으로 체험학습을 나가게 되면 함께 충혼당(108실 075호)을 찾아 뵙기로 약조했다.

세계기록유산 증서. 유네스코는 2001년 9월4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한 데 이어 2004년 4월28일 ‘직지상’을 제정하였다. 한편, 우왕 때인 1378년 여주 취암사에서 간행된 「직지」 목판본은 상·하권 1책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에 소장돼 있다.


2022년 11월 17일 목요일

을사년스럽다

덕수궁 중명전(重眀殿) 현판은 日(날일)이 들어간 ‘明’ 대신에 目(눈목)이 들어간 ‘眀’을 썼다. 明과 모양이 다른 眀은 朙(밝을명)의 이체자로 ‘밝게 볼 명’으로도 부른다. 朙은 囧(빛날경)과 月(달월)로 구성돼 있는데, 창문에 비친 달을 뜻한다.

重(거듭할중)과 眀(밝을명)이 합쳐진 중명(重眀)은 ‘거듭하여 밝다’는 의미로 주역(周易)의 이괘(離卦)에서 따온 이름이다. 1905년 11월17일,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다’는 이곳 중명전에서 일본제국의 실권자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5조약을 관철하였고 이는 그대로 대한제국에 굴레(勒륵)가 되었다.

이로부터 날씨나 분위기가 스산하고 싸늘한 상태를 늑약(勒約)이 강제된 1905년 을사년(乙巳年)과 분위기가 같다고 해서 을사년스럽다→을씨년스럽다는 신조어가 탄생했다. 117년이 지난 2022년 가을…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2022년 11월 14일 월요일

못다 핀 꽃들을 위로하소서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님들이 공동집전하는 청계광장 ‘용산 이태원 10.29참사 희생자를 위한 추모미사’ 현장에 가지 못하고 유튜브로 미사 참례.

강론을 대신해서 못다 핀 꽃들의 이름이 한 사람씩 호명됐다. 호명은 존재를 부르는 행위이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기억하고 인정해 주는 것이다.

「흑인영가」, 「찔레꽃」은 왜 이리도 서글픈 것인지… “밤의 별같이 우리를 이끄시는 그리스도님, 예리코의 눈먼 이를 치유하신 것처럼 이태원 158위 영령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해원해 주소서.” 

김영식 신부님이 158위 영령들을 호명하고 있다.

찔레꽃 가락은 해방 전후에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데 가사는 누가 만들었는지 분명치 않다. 3절 가사는 1,2절에 비하면 훨씬 관념적이다.


2022년 11월 1일 화요일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난 날

우리들 마음 아픔에 어둔 밤 지새우지만
찾아든 아침 느끼면 다시 세상 속에 있고
눈물이 나는 날에는 창밖을 바라보지만
잃어간 나의 꿈들에 어쩔 줄을 모르네.

“택배가 잘못 오면 반환할 수 있다. 근데 슬픔, 비극이라는 택배는 반환할 데가 없다.” 정호승 시인의 말이다.
푸른하늘 2집(1989) 타이틀곡 「눈물나는 날에는」을 듣는다. 슬픔은 오직 슬픔을 통해서만 위로받는다는 믿음… 허나 다른 이의 슬픔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길은 아득하다.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난 날이다.
천지만물을 한 줄에 꿰어놓고 가이없이 한없이 펄렁펄렁. 하느님, 보시니 마땅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