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29일 수요일

기록되어 있다

28일(화) 어제 #종로마을N 제4기 기자아카데미 4회차 강좌는 하동훈 사진작가가 잡힐 듯 또는 안 잡힐 듯한 이미지의 감성을 들려주었다. 단순히 사진 잘 찍는 스킬을 나열할 것으로 예상했던 나는 크게 한 방 먹었다. 「곁에서 바라보기」라는 주제로 △잘 찍은 사진(?) △이미지 퀄리티(빛) & 내용(대상과 프레임) △관점 △시점 △초점으로 이어가는 하동훈 작가의 말하기(telling)와 보여주기(showing)는 한 편의 인문학 강의를 연상케 했다.

아래 사진은 하동훈이 2013년에 1년간 서아프리카의 부르키나 파소(Burkina Faso)에 머물며 그네들의 평범한 일상을 담고 있을 때, 자동차정비소에서 일하는 한 아이가 고장난 카메라로 하 작가를 찍어주겠다며 장난치던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이 작품은 아프리카인사이트가 공모한 「내가 만난 아프리카」展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아이의 해맑은 미소에서 가난, 기아, 질병, 고통, 전쟁 같은 고정된 부정적 관념은 쉬이 연결되지 않는다.

문학과 마찬가지로 사진을 대할 때에도 표현론이 어쩌니 반영론, 효용론이 어떻느니 하는 것들은 한낱 언어의 사변에 그치게 된다. ♬느낌 그대로를 말하고 생각한 그 길로 움직이면 되는 것𝅗𝅥 

기자학교 수강생은 다음 시간까지 「내가 사랑하는 것」을 주제로 10장 내외의 사진을 제출해야 한다. 다음주에는 강좌를 마치고 한잔하기로 했다. 오징어 데치고 전 부치는 소리가 추임새 되는 22년 장마, 종로거리 천장 낮은 허름한 주점에서 서로 작가가 되고 독자가 되어 술잔을 기울일 게다. 

시선과 교감

하동훈 작가는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의 「연금술사」(1988)를 꼽았다. 하 작가는 이 책에 자주 등장하는 아랍어 마크툽(Maktub)을 왼팔뚝에 문신했다. 「연금술사」 100쪽에는 ‘그건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이미 씌어있는 말이다’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이다’라는 의미로 해석돼 있다.


2022년 6월 25일 토요일

그대들의 조국은 안녕하신가?

경술국치를 당한 그해 10월, 만해 한용운은 대륙으로 넘어갔고, 1911년 만주 동북삼성(東北三省)에서 김동삼을 만나게 된다. 일송 김동삼은 만주벌판 말을 달리던 무장투쟁의 지도자로서 무오독립선언과 민족유일당촉진회를 주도했다. 일송은 경학사, 신흥학교, 부민단, 백서농장, 서로군정서 참모장 활동을 거쳐,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듯이 독립운동계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그러나 1931년 하얼빈에서 일경에 피체돼 조선으로 송환된 후 경성감옥에서 복역 중 1937년 4월13일, 만 59세로 옥중 순국하며 불굴의 삶을 마감한다.

만주지역 독립운동진영에서 ‘통합의 화신(化身)’, ‘만주벌 호랑이’라 불리며 일생을 조국의 독립에 헌신한 일송이었지만, 서슬 퍼런 식민치하의 공포 분위기 속에서 누구도 선뜻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주검을 수습해 가지 않았다. 이때 만해 스님이 나서서 일송의 시신을 심우장으로 모셔와 5일장을 지내며 극락왕생을 발원했다. 5일장을 치르면서 다녀간 조문객은 고작 20여 명뿐. 만해는 영결식에서 방성대곡했다. 만해가 일생에서 눈물을 흘린 것은 이때 한 번뿐이었다고 전한다.

오후 1시, 성북동 尋牛莊에서 극단 더늠의 창작뮤지컬 「심우」를 관람했다. 뮤지컬은 만해가 재혼해 얻은 딸 영숙의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된다. 딸자식이 일제의 교육을 받는 것을 단연히 거부하는 아버지를 모셨기에 영숙은 보통학교에 다니는 대신 심우장의 화초와 나무를 벗삼아 소일하는 홈스쿨러다. 속을 알 수 없는 괴팍한 아버지를 ‘땡중’이라 호칭하기도 하지만, 「나룻배와 행인」 「차라리」를 낭송하며 관객에 자랑하기도 한다.

1937년 음력 3월, 영숙은 제자들이 전하는 일송의 부음을 듣고 크게 상심하는 아버지가 걱정스럽다. 일송의 장례를 치르면서 만해가 제자들에게 묻는다. “몇 명이나 왔더냐?” 1937년 당시 일송의 마지막을 지켜본 이는 20여 명에 불과했고, 85년이 지난 2022년 오늘 공연엔 60여 명이 함께했다. 그렇담 100년이 되는 시점엔 몇이나 동참하며 기억할까?

오후 3시에 경운동 천도교대교당에서 「김지하 시인 추모문화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며칠 전부터 듣고 있었지만 숙고할 것도 없이 성북동 심우장을 택했다. 김지하의 변신 혹은 변절이 없었다면 표절 시비는 크게 불거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1937년 당시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끌려가고, 2022년 당년엔 국가보안법에 걸리면 잡혀가는 역사가 재현되고 있다. 신천(信天) 함석헌 선생이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하고 읊은 것처럼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사회운동에 매진한다는 분들께 감히 여쭌다. “한 살 터울의 만해와 일송이 보여준 뜨거운 同志愛를 당신들은 가졌는가?”

빙허 현진건의 단편 「고향」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신민요 가사가 후퇴하는 민주주의, 민영화로 치닫는 경제정책, 분단조국의 고착화 등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당금의 현실과 겹친다. “볏섬이나 나는 전토는 신작로가 되고요/ 말마디나 하는 친구는 감옥소로 가고요/ 담뱃대나 떠는 노인은 공동묘지 가고요/ 인물이나 좋은 계집은 유곽으로 가고요”

극 중 만해가 “그대들의 조국은 안녕하신가?”라며 앞줄 관객에게 물었고, 그분은 “잘 나가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난 속으로 조아렸다. “후손들이 못나서 먹구름이 몰려오는데도 방비를 못하고 있습니다.”

만해의 또다른 대사가 먹먹함을 준다. “목 놓아 울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미친 듯이 웃어라. 그도 아니면 가만히 묵념이라도 해라.” 하 수상한 시절이어도 만해 스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잃어버린 소를 찾아나서야(심우) 한다.

http://www.k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103


2022년 6월 23일 목요일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

‘장마’는 고어에 ‘댱마ㅎ’라고 했으니, ‘댱’은 ‘길다(長)’는 뜻이고, ‘마ㅎ’는 ‘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글자 그대로 ‘긴 비’라는 뜻이겠다.

윤흥길의 중편 「장마」는 6·25전쟁기의 장마철을 시간적 배경으로 국민학교 3학년 아이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국군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한 아들(외삼촌)을 둔 외할머니와 인민군으로 참전했으나 소식이 없는 아들(삼촌)을 둔 친할머니의 갈등은 장마와 더불어 시작되고 장마가 끝날 무렵 화해로 해소된다.

‘온 세상을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는’ 장마는 가족사의 오랜 불행을 상징하며, 나아가 우리 민족에 닥친 전쟁의 비극적 상황이 계속되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소설의 끝문장은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로 과거형이다. 더 많은 깨친 사람들이 지혜롭고 영험한 구렁이로 化하면 이다지도 지긋지긋한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파탄 없이 융화로 인도해나갈 수 있을까.


2022년 6월 21일 화요일

서도소리 배뱅이굿 직관

지난 토요일(18일) 오후, 서도소리 배뱅이굿을 처음 직관했다. 故 이은관 명인을 사사한 운보 김경배 예능보유자가 1인 다역을 소화한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찾아가는 문화재 공연」이 남양주시 수동 멀티스포츠센터에서 열렸다. 운니동 팔도강산국악예술단 몇 분이 찬조공연에 나서게 되어 따라가 일일사진사 역할을 수행했다.

배뱅이굿의 줄거리는 탁발 나온 상좌중과 사랑에 빠진 정승댁 무남독녀 배뱅이가 상사병을 앓다 죽자 부모가 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팔도의 무당을 불러 모아 굿을 하는데 건달 청년이 가짜 무당행세로 횡재한다는 내용이다. 배뱅이굿을 완창할 경우 2시간이 넘게 소요되는데, 굿에 나오는 노래만 해도 36곡이란다. 기억해야 할 것은 배뱅이굿은 굿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도의 판소리(북 반주)처럼 소리꾼이 장구 반주에 맞춰 배뱅이 이야기를 서도의 기본 창법을 바탕으로 민요와 무가, 재담 등을 섞어 해학적으로 엮어낸다. 나이를 먹어가는 것인지 우리 가락이 점점 정답고 흥겨워진다.



서도소리 배뱅이굿이 왔구나, 왔소이다!
남양주 수동면 물골안공동체 주민들 열띤 호응

한국여성연합신문 | 변자형 기자 | 승인 2022.06.21 11:33
http://www.k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095

팔도강산국악예술단이 함께한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찾아가는 문화재 공연」이 성황리에 종료됐다.

팔도강산국악예술단(단장 이춘화)은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배뱅이굿 예능보유자 김경배가 주최하고 ㈔배뱅이굿보존회가 주관하여 남양주시 수동 멀티스포츠센터에서 개최한 「찾아가는 문화재 공연」이 18일(土)일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고 밝혔다.

공연에는 배뱅이굿 예능보유자와 이수자, 전수장학생 등 출연진과 찬조 출연진이 무대에 올라 배뱅이굿 중 △둥둥타령(배뱅이의 출산과 성장) △사랑타령(배뱅이와 상좌중의 만남과 사랑) △어머니의 곡(배뱅이의 죽음) 등을 열창했다. 또한, △내 이름은 배뱅이 △불쌍한 배뱅이 등의 창작곡(양진희 사, 김경배 곡)을 더해 서사의 완성도를 높였다. 출연진은 번갈아 무대에 올라 △상여소리 △무당소리 △태평가 △난봉가 △풍구타령 △뱃노래 등을 선보였다.

이날 공연장을 찾은 수동면 물골안 공동체(회장 이희원) 주민 100여 명은 서도의 기본 음악 어법을 바탕으로 민요와 무가, 재담 등을 버무린 배뱅이굿 특유의 구성진 노랫가락에 손뼉을 치며 호응했다.

한 주민(70대·여)은 “배뱅이가 죽는 장면이 너무 슬펐지만, 어렸을 때 봤던 일도 기억나고 재미있었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이번 공연은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원장 이경훈)과 한국문화재재단(이사장 최영창)이 주최, 운영하여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들이 기량을 펼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국가무형문화재 공개행사’와 무형문화유산의 대중화 및 전승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한 전승자의 자유로운 기획을 지원하는 ‘전승자 주관 전승활동 기획행사’의 하나로 펼쳐졌다.

한편, ‘서도소리’란 황해도 지방이나 평안도 지방에서 불리어 온 노래를 아울러서 부르는 이름이다. 이날 공연된 서도소리 배뱅이굿의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서울 장안의 최정승이 명산대찰을 찾아가 정성껏 빌어서 겨우 얻은 무남독녀 배뱅이가 탁발을 나온 상좌중과 눈이 맞아 사랑을 하게 되는데, 다시 온다고 약속하고 떠나간 상좌중이 돌아오지 않자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된다. 이에 최정승 내외는 각도의 무당을 불러 죽은 딸자식의 넋이나 듣자고 굿을 하게 되는데, 마침 평안도 건달이 주막집에 들렀다가 주모에게 배뱅이네 집 내력을 듣고 굿판에 들어가 배뱅이가 살아 돌아온 것처럼 꾸민다. 여기서 “왔구나, 왔소이다.”라는 널리 알려진 대목이 나온다. 

18일, 팔도강산국악예술단은 「서도소리 배뱅이굿」 공연에 상여소리와 부채춤 등으로 무대에 올랐다.

18일(土) 오후,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찾아가는 문화재 공연」 출연진이 관객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2022년 6월 20일 월요일

영월 장릉의 ㄱ자형 참도, 세호 없는 망주석

세조 3년(1457) 영월 관풍헌에 거처하던 노산군(魯山君)이 유배 4개월 만에 16세로 세상을 떠나자,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시신을 거두어 현재의 자리에 가매장하였다. 사후 59년이 지난 중종 11년(1516)에야 봉분을 갖추었다. 이후 숙종 7년(1681)에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추봉하고, 숙종 24년(1698)에 묘호를 단종(端宗)으로 복위, 추존하면서 노산군묘를 능제에 맞게 다시 조성하고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장릉의 진입공간에는 여타 조선왕릉과 다르게 단종의 충신들을 위한 건축물이 있다. 노산군의 시신을 거두어 묘를 만든 엄흥도의 정려각(旌閭閣), 노산군묘을 찾아 제를 올린 영월군수 박충원(朴忠元)의 뜻을 기린 낙촌비각(駱村碑閣),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종친, 신하, 환관, 궁녀, 노비 등 268人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藏版屋)과 이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배식단(配食壇)이 있다.

신로(神路)와 어로(御路)는 지형에 맞게 조성하여 ㄱ자로 꺾여 있다. 그 밖에 장명등, 망주석, 문석인, 석수 등은 정종의 후릉(厚陵)의 능제에 따라 작게 조성하였으며, 무석인은 생략하였다.

사적 제196호 영월 장릉(寧越 莊陵)

영월 장릉은 처음부터 왕릉으로 택지된 곳에 조성한 능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적인 조선왕릉의 구조와 다른 점이 많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參道, 左신로+右어로)는 일자형으로 조성되지만, 영월 장릉은 ㄱ자형으로 꺾여 있다.

능침에는 추존왕릉 제도에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능침 주변의 석양과 석호도 한 쌍만 조성했다. 무력으로 폐위된 왕이기 때문에 다른 왕릉과 달리 무인석이 없다. 또한 봉분 좌우에 세우는 망주석(望柱石)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세호(細虎)가 없다.

박충원 낙촌비(朴忠元 駱村碑)는 영월군수이던 낙촌 박충원이 노산묘를 찾은 사연을 기록한 기적비이다. 엄흥도 정려각(嚴興道 旌閭閣)은 영조 2년(1726)에 어명으로 세운 비각으로, 엄홍도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각이다. 1970년 장릉 경내로 옮겨 세웠다.

장판옥(藏版屋)은 충신위(忠信位) 32인, 조사위(朝使位) 186인, 환관군노위(宦官軍奴位) 44인, 여인위(女人位) 6인 등 총 268인의 합동 위패를 모셔놓은 곳이다. 정조 15년(1791)에 건립했다. 배식단(配食壇)은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 조사, 환자군노, 여인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매년 단종제향과 함께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 1440~1521)의 사릉(思陵)에 있는 소나무들은 하나같이 가지를 동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이는 왕후가 남편이 있는 영월 쪽을 바라보기 때문이라 하여 1999년 4월9일 남양주 사릉의 소나무 하나를 영월 장릉에 옮겨 심고, 정령송(精靈松)이라 명명했다. 정순왕후 사후 478년 만의 일이다.


2022년 6월 19일 일요일

훌륭한 인터뷰의 요건

(협)마을대학종로 조합원 엄광용 작가의 “인터뷰 요령과 기사작성” 강의… 엄광용 작가는 조합원으로 만나기 전에 중학교 아이들 국어 교과서에 실린 전기문 「화가 이중섭」을 통해 먼저 함자를 접했다. 이 분 별호가 광파(曠坡)인데, 이런 이름을 얻게 된 비화가 흥미롭다. 뒤풀이 자리에서 전해 들은 「무진기행」의 김승옥이 절필한 숨은 사연, 이후 순복음교회에 귀의한 얘기가 삶의 변화무쌍을 느끼게 한다.

“인터뷰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인터뷰어)에 의해 좌우된다.”(Oriana Fallaci) “훌륭한 인터뷰의 요건은 난처한 질문들을 거침없이 던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Mike Wallace) “인터뷰 담당자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Ted Koppel) 등의 문장을 새기며 외람된 기레기의 행태를 반면교사 삼는다.



지역사회·지역주민 목소리 듣고 기사화하는 인터뷰 방법 익혀
기자아카데미 2강… 인터뷰 요령과 기사 작성법 강좌 성료

종로마을N  변자형 기자  승인 2022.06.19 07:40
http://www.jongno-mn.com/news/articleView.html?idxno=2806

14일(화) 오후 5시, 도심권 50플러스센터 강의장(수표로26길 28 동의빌딩)에서 종로마을N(발행인 정숙연) 제4기 주민기자아카데미 2회차 강좌가 열렸다.

70여 권의 저서를 출간한 엄광용 작가가 오랜 기자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인터뷰 요령 △인터뷰 질문지 작성 △인터뷰 기사 작성 등에 대해 강의했다. 특히, 좀처럼 이야기를 풀어놓지 않거나 질문의 요지에서 한참 비켜나는 지점으로 빠지는 난감한 인터뷰 대상자를 대처하는 노하우에 수강생들의 눈과 귀가 쏠렸다.

이날 주민기자아카데미에는 초등 4학년 어린이부터 70대 중반 액티브 시니어까지 종로와 연관된 다양한 연령층의 예비기자 15명이 참석해 기자아카데미의 열기를 이어갔다.

강좌에 참여한 한 60대 예비기자는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동네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야말로 소중한 뉴스라는 걸 알았다”라면서 “힘든 시절을 살아왔고 앞으로 살아갈 동네 소식을 전하는 일에 함께하고 싶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2022년 종로마을N 주민기자아카데미는 6월21일, 권기봉 여행작가의 ‘종로 스토리텔링화’로 3회차 강좌를 이어간다.


2022년 6월 17일 금요일

석촌동 연접적석총

#비지트인한성백제 프로그램에 참가하면서 하루의 대부분을 석촌동, 방이동, 풍납동, 신천동 일대를 탐방하며 보냈다. 석촌동(石村洞)이라는 동명은 돌이 많은 마을이라는 뜻으로 ‘돌말’, ‘돌마리’라고 불려온 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은 현재 돌무지무덤(적석총) 5기, 흙무지무덤(즙석분구묘) 1기, 움무덤(토광묘) 2기가 복원돼 있다. 정비된 2,3,4호 돌무지무덤은 계단 형태로 만들어져 중국에 있는 고구려의 태왕릉이나 장군총의 모습과 유사하여 부여에서 시작된 문화적 동질성을 보여준다.

몇 년 전과 달리 이번 답사에서는 새로이 ‘연접적석총’이란 구조를 알게 됐다. 연접적석총은 돌과 흙을 쌓아 만든 다수의 중·소규모 적석묘들이 서로 연결되어 사방으로 확장하면서 큰 묘역을 이루는 형태로 드러났다. 특히 2기가 연접된 형태로 복원된 석촌동 1호분과 이에 인접한 A호 적석총(내원외방분)도 포함되어 총길이 120m에 달하는 규모를 보인다. 일정에 쫓길 수밖에 없는 동행탐방 없이 혼자 방문해 찬찬히 다시 한번 살펴봐야겠다. 

한 변의 길이가 50m가 넘는 3호분(동서 50.8m, 남북 48.4m)은 근초고왕릉으로 비정(比定)되고 있다.

석촌동 고분들은 윗부분이 심하게 깎이고, 훼손되는 바람에 무덤 주인공이 묻힌 공간인 매장주체부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석촌동 고분군의 돌들은 돌무지무덤의 내부를 채우고 외부를 감싸고 있던 것이다. 어떤 돌들은 한쪽 면을 편평하게 다듬은 흔적이 보이는데 이것은 무덤의 외부를 감싸고 있던 돌들의 특징이다. 발굴된 많은 강돌과 깬돌을 분석한 결과 편마암과 규암 등으로 밝혀졌으며, 대모산과 연결된 석촌동 주변 산지와 한강에서 가져온 것으로 확인되었다. “욱리하(郁利河)에 큰 돌들을 가져와 묘곽을 만들어 선왕의 뼈를 묻었다.”는 「삼국사기」 기록(백제 개로왕 때)이 있다.


2022년 6월 15일 수요일

대한민국 문화 사대주의의 필연성?

문해과정 중학 2단계 「사회」 1학기 기말시험 문제를 선제 출제했다. 이 중 20문제를 추려 시행할 예정이다.


2022년 6월 13일 월요일

최들풀 바리톤… 문경 불정역 별빛콘서트

1955년 9월15일 준공한 불정역(佛井驛)은 경북 문경에 위치한 문경선의 폐지된 간이역(불정동 418번지)이다. 불정역은 1980년대 석탄 수요 감소와 탄광의 채산성 저하 문제에 대응한 정부의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의 영향으로 1993년 9월1일 역무가 중단된 이후 철거 위기에 몰리기도 했지만,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강(江)자갈로 외벽을 마감한 역사(驛舍)의 건축양식 등이 희소성을 인정받아 2007년 등록문화재(제326호)로 지정됐다.

페친 #최들풀 바리톤은 왕성한 국외 활동 이후 귀국해 2017년 문경시의 등록문화재 활용 공모에 당선되면서 반세기 전 불정역장을 지낸 부친의 뒤를 이어 아라리오 인형오페라연구소(Arario Marionette Opera House of Mungyeong)의 예술감독으로 문경땅에 귀향했다.

들풀 최상균 감독이 18일 저녁 7시, 옛 문경선 불정역에서 별빛콘서트로 초여름 밤을 수놓는다. 삼삼오오 함께하는 청중은 새재 마루에서 별 하나에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과 시와 노래와 아버지를 떠올리며 향수에 젖는 자리를 간직하게 된다. 

난 수업이 있어 영월로 이동해야 하기에 문경(聞慶)… 최들풀과 친구들의 경사로운(慶) 노래를 듣는(聞) 행운은 누리지 못하겠으나, 새들도 날아서 넘기 힘든 선비들의 과거길이라 했던가. 언젠간 인근 절골의 맑은 부처샘물(佛井)도 맛보면서 자전거 하이킹하는 기회를 고대하련다. 모두들 행복한 #불정역 낭만남녀가 되시기를…

http://www.k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092


2022년 6월 10일 금요일

1871년 6월10일, 구슬프고 장엄한 항전

6월10일 하면 1987년 6·10민주항쟁과 1926년 6·10만세운동을 떠올리게 된다. 헌데 1871년 6월10일도 기억해야 한다. 5년 전인 1866년 대동강에서 자국 상선 General Sherman號가 소각된 사건과 통상교섭을 명분으로 米 아시아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 소장이 지휘하는 조선원정대(군함 5척+1,230병력)가 1871년 6월10일 강화도 초지진(草芝鎭)에 상륙하면서 이른바 ‘48시간 전투’가 시작된다. 엄청난 화력의 열세를 보인 조선군은 초지진과 덕진진(德津鎭)을 내주고 광성보로 퇴각했다.

광성보(廣城堡)는 진무중군(鎭撫中軍) 어재연(1823~1871)이 지키고 있었다. American Civil War(1861~65)를 거치며 단련된 미 해군은 조선군의 후방공격을 사전에 차단하고, 강화도 동해안에서 유독 툭 튀어나온 광성보를 3면에서 옥죄어왔다. 조선군은 미군의 총탄을 막기 위해 초여름 13겹의 면갑옷을 입고서 싸우다 피탄에 불이 붙으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결사 항전했다. 패배가 뻔한 전황인데도 단 한 명의 탈영병이 없었고, 최후에는 돌과 흙을 무기 삼아 던지고 뿌려가며 투혼을 불살랐다. 8시간 가량 치러진 학살 수준의 광성보전투에서 조선군은 어재연·어재순 형제 등 240여 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염하(강화해협)로 뛰어들어 자결하였으며, 2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미군은 장교 1명과 사병 2명이 전사하고 10여 명이 부상을 입는 데 그쳤다.

강화역사박물관은 辛未洋擾 당시의 광성보전투를 밀랍인형으로 재현해 놓았다. 조선군은 상륙 후 성벽을 올라오는 미군을 상대로 분전하지만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거의 전군이 궤멸당하고 만다.

상륙전을 경험한 슐레이 소령은 “조선군은 결사적으로 싸웠다. 그들은 총에 탄약을 갈아 넣을 시간적 여유가 없어 창과 검으로 공격했다. 대부분 무기도 없이 맨주먹으로 싸웠는데, 모래를 뿌려 적들의 눈을 멀게 하려 했다. 항복 같은 건 아예 몰랐다. 부상자들은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하거나 바다에 뛰어들어 익사했다. 조선군은 낡고 뒤떨어진 무기를 가지고도 미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고,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다가 죽어갔다. 아마 우리는 가족과 나라를 위해 그처럼 장렬하게 싸우다가 죽은 군인을 다시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는 기록(기함에서의 45년, 1904)을 남겼을 정도였다.

미군은 악착같이 덤벼드는 조선군에 질려버린 데다가 한양까지 점령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광성보를 점령한 다음날인 6월11일에 철군하면서 가로세로 413×430㎝의 ‘帥’(장수 수) 한 글자가 새겨진 깃발을 잘라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이 수(帥)자기는 약탈된 지 136년이 지난 2007년에 장기임대 형식으로 고국에 돌아왔다. 2017년 임대기간이 만료됐지만 2년 단위로 갱신되고 있다. 미국측은 ‘수자기’를 문화재로 취급하지 않고, 승전으로 노획한 전리품으로 간주하기에 임대는 가능하나 반환은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사람 사이에는 평생의 친구가 있을 수 있지만, 국가 간에 영원한 우방은 없다. 151년 전 제국주의 미국은 우리나라 조선을 침략해왔다. 그리고 우린 맞서 싸웠다.

신원을 알 수 없는 51구의 전사자가 7기로 분묘된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으로 남았다. 이곳은 또 하나의 국립묘지다. 무섭도록 구슬프고 장엄하다.


2022년 6월 8일 수요일

영월마차리 마을대학, ‘마을 어르신을 위한 스마트폰 교실’ 개설

다음 주에는 영월군 북면 마차리 팹랩(fablab)에서 지역 어르신의 디지털 격차 해소를 위해 진행하는 스마트폰 기초강의에 나선다. 수년간 나름대로 익힌 제라고지(geragogy) 경험을 바탕으로 어르신들이 편안하게(寧) 넘어가는(越) 수업이 될 수 있도록 꼼꼼히 설계해야 한다. 오며 가며 틈틈이 즐기는 지역 탐방은 선물 같은 체험학습이 될 것이다.



영월마차리 마을대학, ‘마을 어르신을 위한 스마트폰 교실’ 개설
앱 설치·활용, 사진편집, SNS소통 등 스마트폰 기초과정

한국여성연합신문 | 변자형 기자 | 승인 2022.06.06 16:55
http://www.k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081

영월군 리플레이스 사회적협동조합은 영월마차리 마을대학 주관 하에 ‘마을 어르신을 위한 스마트폰 교실’을 개설하고 수강생을 모집한다.

스마트폰 기초과정은 △스마트폰 설정과 앱 설치하기 △사진 촬영과 편집 △지도앱을 활용한 경로 찾기 △SNS로 세상과 소통하기 등 총 4개 분야로 교육하며, 참여 어르신들 역량에 맞는 맞춤형 교육을 진행할 계획이다.

교육은 6월20일부터 7월11일까지 4주간 매주 월요일 오전 10시부터 2시간 동안 마차리 팹랩 강의장(영월군 북면 밤재로 231-9)에서 진행한다.

영월마차리 마을대학은 이번 스마트폰 기초교육이 디지털기기 사용이 서툰 지역 어르신의 정보격차를 줄이고 IT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첫 발걸음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수강 문의 : ☎ 033-375-8830



2022년 6월 5일 일요일

鷗波 파도 갈매기의 무궁화

구파 백정기(1896.1.19~1934.6.5) 의사 순국일이다. 의열사(義烈祠) 사당문은 닫혀 있고, 묘역을 찾는 이도 보이지 않고, 흐릿한 날씨에 작은 화환 5개만 놓여있는 쓸쓸한 88주기다. 이대남 시절에 3·1만세운동을 경험한 구파는 1921년 베이징으로 망명한 후 1924년 덴노를 암살하려 도쿄로 갔으나 실패하고, 1925년 상하이로 건너가 아나키스트 연맹에 가입하고 농민운동에 투신했다.


1932년 자유혁명가연맹을 조직해 흑색공포단(BTP, Black Terrorist Party)으로 개칭하고 일제기관 파괴와 침략원흉 처단 등의 대일투쟁을 전개했다. 4월29일 매헌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虹口) 공원 폭탄투척 당시에 구파도 같은 의거를 준비했지만, 출입증을 기다리는 사이에 매헌의 거사가 먼저 터져나왔다.


1933년 3월17일, 상하이 훙커우의 음식점 육삼정(六三亭)에서 주중일본대사 아리요시가 중국의 군벌들과 회합을 갖는다는 기밀을 입수한 8명의 동지들은 3월5일, 거사를 수행할 사람을 가리기 위해 제비뽑기를 했다. ‘有’를 뽑은 구파는 이강훈, 원심창과 함께 단행하기로 하고 육삼정에서 가까운 송강춘에 모였으나 종업원으로 위장한 일경에 체포됐다. 주동자를 자처하며 젊은 동지들을 보호했던 구파는 동지들의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이사하야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지병이던 폐병이 재발, 악화되어 1934년 6월5일 오후 11시, 39세로 옥중 순국하였다.


낚시를 좋아했다는 송대의 神品 조맹부(1254∼1322)의 별호가 구파(鷗波)였다. 일제의 강점이 아니었다면 백정기 의사는 당신의 號처럼 고향땅 부안 변산 바다의 ‘파도 위를 날으는 갈매기’와 같이 유유자적한 구파의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2022년 6월 4일 토요일

못다핀 두 소녀 효순·미선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543-3 효순미선 평화공원에 다녀왔다.

월드컵 열기가 한창이던 2002년 6월13일(木) 10시45분, 조양중학교 2학년 15살 신효순, 심미선 학생이 법원읍과 광적면을 잇는 양주시(당시 양주군) 광적면 효촌2리 56번 지방도로에서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졌다. 6월13일은 목요일이었지만 제3회 지방선거로 빨간 날이었다. 다음날인 14일이 친구 생일날이어서 졸업생이 10명뿐인 효촌초등학교를 나온 동창생 5명이 의정부로 놀러가기로 약속했다. 두 학생은 모임장소인 ‘초가집’ 식당으로 향하다가 법원리(서쪽)와 덕도리(동쪽) 사이의 편도 1차로(폭 3.3m)에 불과한 좁은 언덕길에서 米 보병 2사단 44공병대대 소속 부교 운반용 장갑차(폭 3.65m)에 그만 압사당했다.

56톤 부교장갑차(AVLM) 운전병(마크 워크)과 관제병(폐르난도)은 11월, 판사·검사는 물론 변호사·배심원까지 현역 미군으로 구성된 동두천 캠프 케이시 內 군사법정에서 터무니없는 무죄(not guilty) 판결을 받고 5일 만에 본국으로 빠져나가 시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평통사(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등 시민단체와 시민들은 진상규명과 미국사죄, 한날 세상을 떠난 1988년생 두 소녀의 넋을 기리기 위해 오랫동안 꾸준하게 노력해왔고, 현장에서 수습한 운동화의 형상으로 사건 18년 만인 2020년 추모공원을 조성했다. 불평등한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은 반드시 손을 보아야 한다. 헌데 경유하는 의정부시, 양주시 곳곳에 國民の力 당첨자들의 축하 펼침막이 걸려있는 아이러니라니ㅠㅠ… 피고 지는 조국 산하, 유월의 햇볕이 따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