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13일 일요일

제국의 비애

지난주에는 하계 창의체험 활동으로 대한제국의 흔적을 쫓아보았다. 경운궁은 월산대군의 사저로 시작하여, 환도한 선조의 시어소(정릉동행궁), 인목왕후의 유폐지(서궁), 인조의 즉위지(즉조당)를 거쳐 고종이 자주 독립국임을 대외에 선포하면서 제국의 정궁이 되었던 곳이다.

인화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중화문을 바라보며…

단청 없는 2층집 석어당의 소박함과 다양한 동식물 문양으로 꾸며 놓은 정관헌의 이국적 풍광 사이로 야영지에 있어야 할 외국 스카우트 대원들이 지나다녔다. 덕홍전, 정관헌, 석조전의 오얏꽃문양을 확인하면서 조동탁의 「봉황수」 시구를 떠올리는데 망국의 설움이 전이되어 절로 한숨이 나온다. 광장 건너 Westin Josun호텔의 정원 조경물쯤으로 전락한 환구단 터를 걷다 보니 목은 선생이 부벽루에 올라 돌계단에 기대어 휘파람 불던 심정을 헤아릴 것도 같다.

1946년 석조전에서 열렸던 미소공동위원회와 남북분단의 고착화를 되새겨보았다.

이러매도 중립외교, 국권침탈, 자주독립 주제어 학습에 열중했다. 제국의 법궁인 경운궁은 1904년의 대화재와 일제의 의도적인 훼철로 뭔가 많이 허전하고 텅 빈 느낌이 든다. 태풍 카눈이 몰고 온 장대비 속에서도 공부에 대한 열정을 실천한 고령의 어머님들이 참 고맙다. 이번주 창체수업엔 명동성당과 명동일대를 답사한다. 

광무황제는 1899년 환구단의 북쪽에 3층 팔각정 황궁우(皇穹宇)를 건립하였다.


2023년 8월 8일 화요일

하는 말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말은 크고 높았다. …말은 기름진 뱀과 같았고, 흐린 날의 산맥과 같았다. …말은…똬리 틈새로 대가리를 치켜들어 혀를 내밀었다. 혀(=말)들은 맹렬한 불꽃으로 편전의 밤을 밝혔다. …말들은…보이지 않는 산맥으로 치솟아 시야를 가로막고 출렁거렸다.

오랜만에 「남한산성」을 펼쳐 보았다. 「칼의 노래」 「현의 노래」를 잇는 역사소설의 첫 단락 처음 6개 문장의 주어가 ‘말’이다. 가히 「말의 노래」라 할 만하다. 작가는 ‘하는 말’을 통해 “말로써 정의를 다툴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 받는 자들의 편이다.”라고 적었다. “말들이 창궐해서 주린 성에 넘”친다.


2023년 8월 1일 화요일

한 개의 행복을 찾기 위한 고독한 산책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8월1일… 구보(仇甫)의 날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나오는 레오폴드 블룸이 1904년 6월16일 하루동안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 시내를 거닐었던 블룸스 데이(Bloom’s Day)가 원형이다. 30년 뒤인 1934년 8월1일 유학파 고학력 실업자 구보는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경성을 배회하며 당대의 세태를 포착했다.

지난 주말… 이른바 도시 산책자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속 종로네거리와 청계천변, 황금정, 남대문통, 장곡천길, 태평통을 답사하며 관찰하고 기록하고 촬영하는 고현학(考現學)을 수행했다. 용산과 이태원, 양평, 오송, 서초, 평택을 돌아보고 탐구하고 기억하는 것도 우리 시대의 모더놀로지(modernology)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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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의 행복을 찾기 위한 고독한 산책
소설 속 종로 걸어보기② 박태원 고현학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http://www.jongno-mn.com/news/articleView.html?idxno=3333

“마치 사우론(Sauron)의 거대한 눈이 떠있는 탑처럼 보인다.” 한 참가자의 말이다. 듣고 보니 정면에서 바라보는 종로타워는 J.R.R. 톨킨이 「반지의 제왕」에서 묘사한 것처럼 고층부의 스카이라운지를 세 개의 탑이 떠받들고 있는 형상이다.
1999년 종로타워가 들어선 자리는 일제강점기 화신백화점이 영업하던 곳이다. 1931년 화신상회의 경영권을 장악한 유통왕 박흥식은 20평짜리 ‘문화주택’을 경품으로 거는 등 파격적인 마케팅을 선보였다. 1932년 바로 옆에 들어선 동아백화점을 인수합병하여 동관으로 부르고 기존 화신 건물은 서관으로 삼아 육교로 연결했다. 초창기부터 두 개의 탑이었던 셈이다.

구보는 화신백화점 승강기 앞에서 너댓 살 아이를 데리고 백화점식당으로 올라가는 젊은 내외를 바라보며 부러움을 느끼고 행복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발 가는 대로 전찻길 안전지대 위에서 머엉하니 서있다가 동대문행 전차에 뛰어오른다. 그러나 89년 전 구보의 행적을 쫓는 16인의 추적자는 동선을 변경해 SC제일은행 본점으로 향했다. 악명 높은 경성종로경찰서가 있던 곳이다. 서편의 주상복합건물 그랑서울이 건축된 자리에 제비다방이 있었다. 박태원은 제비가 조선광무소 건물 1층에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이상은 총독부 건축과 기사로 들어갔다. 각혈을 다스리기 위해 황해도 배천온천으로 요양하러 갔다가 운명의 여인 금홍을 만났다. 이듬해인 1933년 이상은 백부의 유산으로 제비다방을 개업하고 금홍을 불러올려 마담으로 앉히고 동거를 시작했다. 이상은 거리쪽 벽면을 전면 유리로 꾸미고 실내 공간은 흰색으로 칠했다. ‘도스토옙스키의 방’이라 부르던 골방에 구인회 멤버들이 모여 예술과 문학을 논했다. 1934년 이상은 조선중앙일보에 난해시 「오감도·烏瞰圖」를 연재하면서 비슷한 시기 같은 신문에 연재된 박태원 중편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하융’이란 이름으로 삽화를 그렸다.

녹두장군이 갇혔던 전옥서 터를 돌아 광교를 건너 인제서야 소설의 출발지에 다다른다. 한국관광공사 서울센터 앞쪽 다옥정 7번지는 부친(박용환)의 공애당약방과 숙부(박용남)의 공애의원이 좌우에 자리한 2층 구조의 한옥상가로 작가 박태원의 실제 집이자 소설 속 산책자 구보의 집이다. 1934년 무렵에는 박태원을 비롯해 어머니와 가업을 이은 형(박진원)·형수, 동생(박문원), 안잠자기, 약방아이 등 적어도 10명가량이 기거했다. 복개와 도로확장 이전에는 남쪽천변의 약방 사환 창수와 북쪽천변의 이발소 아이 재봉이가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얘기를 나눌 정도로 천폭이 좁았다.

어려서부터 시력과 청력이 좋지 않은 ‘몹쓸 체력’의 박태원은 어깨 너머로 습득한 의학지식을 발휘해 급우·선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 당시 경성의전 해부학교실 구보(久保) 교수의 이름을 따와 박태원을 호명하는 구보(仇甫)로 삼았다.

7월23일(일) 오전, 세찬 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2023년 「종로구 주민소통 공모사업」 ‘소설 속 종로 걸어보기’ 참가자들이 청계천 광교 남쪽 옛 다옥정 7번지 앞에서 구보씨의 흔적을 쫓고 있다.

1934년 8월1일 수요일 오정, “일즉어니 들어오너라”는 어머니의 당부를 뒤로 하고 다옥정 집을 나서는 스물여섯의 미혼 룸펜(Lumpen)1) 구보의 차림새를 상상해 본다. 앞머리를 일자로 자른 갓빠머리에 동그란 안경을 썼다. 노타이셔츠와 신사바지에 구두를 신고 단장과 대학노트를 들었다. 시계를 차거나 모자를 쓰거나 우산을 챙기지는 않았다. 그러고는 격렬한 두통을 느끼며 ‘아무렇게나 내어놓았던 바른발이 공교롭게도 왼편으로 쏠렸기 때문에’ 아무런 사무도 갖지 않은 종로네거리로 향하게 된다.

우리는 구보가 동대문에서 한강행 전차를 갈아타고 지나갔을 남대문 1정목·2정목을 걷는다. 노구치 시타가후가 건축한 반도호텔(1938·롯데호텔), 고리대출로 배를 불린 민간총독부 조선식산은행(1918·롯데백화점 본점), 조지야백화점(롯데영플라자) 등을 거쳐 조선은행(1912·화폐박물관) 앞까지 빗길을 주유했다.
한국은행 앞 교차로는 당시 조선은행, 경성우편국(1915·서울중앙우체국), 미쓰코시 경성지점(1930·신세계백화점)이 트라이앵글을 이루며 ‘센긴마에 히로바(鮮銀前 廣場)’로 불렸다. 여기서부터 황금정에 이르는 좌우 지역은 ‘경성의 월스트리트’로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이자 제국주의 경제침략의 상징이었다. 그렇기에 광복 후 이충무공의 동상은 광화문이 아니라 이곳에 세웠어야 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머릿돌 글씨 ‘定礎(정초)’를 확인하고 11시 방향으로 경성치의전 터, 경성부립도서관 터를 지나며 장곡천길(소공로)을 따라 오른다. 구보가 조선일보 사회부에서 근무하는 친구 김기림에게 전화하려고 들어간 양복점(본전양복점)이 있었음 직한 곳 인근에 제이제이안토니(JJ.ANTONY) 소공점이 보인다.
세종대로18길 건너 북쪽에는 구보가 꼽추화가 구본웅을 만나려고 들른 골동점(우고당) 터다. 구본웅의 나이 어린 이모 변동림은 구본웅의 친구 이상과 짧은 결혼생활을 했다.

이곳에서 더플라자호텔 뒤편길을 돌아나오면 스타벅스(소공동점) 맞은편에 낙랑파라 자리가 있다. 1931년 도쿄 유학파 이순석 화가가 고대국가 ‘낙랑’에 응접실을 뜻하는 ‘파라’(parlour의 일본식 표기)를 합성해 카페 이름을 지었다. 소설에서 구보는 세 번에 걸쳐 낙랑파라에 출입한다. ‘일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 틈에 끼어 가배차를 마시고 담배를 태우며 「율리시즈」를 논하는 김기림의 탁설을 듣는다.


우리는 지하도를 이용하여 건너편 환구단 터에 올랐다. 일제가 일한병합 후 환구단을 허물고 철도국 직영의 경성철도호텔(1914)을 짓는 바람에 지금은 환구단 정문과 3개의 석고, 황궁우와 황궁우 정문·협문만 남아 있다. 호텔은 이승만 때 조선호텔로 이름이 바뀌고, 2021년에는 영문 철자도 CHOSUN에서 JOSUN으로 변경되었다.
환구단 터를 내려와 89년 전 구보가 그랬던 것처럼 경성부청(서울도서관) 앞에 서서 태평통 건너 대한문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500년 왕조의 찬란한 위엄은 쉽사리 찾아보기 어렵다.

2023년 ‘소설 속 종로 걸어보기’ 2차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참가자들이 환구단 황궁우 앞에서 고현촬영을 하고 있다.

경성토박이 유학파 엘리트 구보는 1934년 8월1일 낮 12시부터 8월2일 새벽 2시까지 14시간 동안 도보 9.6㎞, 전차 5.7㎞를 이동하며 행복과 기쁨을 찾아 경성의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소설 말미에서 구보는 생활을 가지고 소설을 쓰고 결혼도 할 것을 다짐한다. 실제로 박태원은 연재를 마친 직후 보통학교 훈도 김정애와 다옥정 7번지 본가에서 혼례(1934.10.27)를 치르고, 이후 수준급 모더니즘 작품도 창작했다. 우리는 따라가는 이의 시선으로 동선을 변형하여 2시간여 동안 3㎞를 거닐며 우중 모데르놀로지2)를 수행했다.

1930년대 경성을 이해하기 위해 1936년작 「천변풍경」(박태원), 「날개」(이상)를 읽어보고 그 소설 속 배경을 따라 걸어도 좋을 것이다. 2023년 「종로구 주민소통 공모사업」 ‘소설 속 종로 걸어보기’ 3차시는 9월10일, 창신동에서 박수근과 백남준을 고현(考現)한다.

1)룸펜(Lumpen) : 우리나라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많이 배웠음에도 그 지식을 쓸 데가 없는 슬픈 지식인들이 스스로를 비하하는 의미로 쓰던 말이다.

2)모데르놀로지(modernology, 고현학·考現學) : 현대의 풍속과 세태를 조사·기록하는 학문을 가리킨다. 이 방법론을 문학 쪽에 적용한 것이 세태소설이다.

2023년 7월 2일 일요일

흥선대원군의 권토중래기 「운현궁의 봄」

흥선대원군의 권토중래기
소설 속 종로 걸어보기① 김동인 장편 「운현궁의 봄」


일요일 오전 3호선 안국역은 한산하다. 3번 출구로 나가 현대사옥 내 관천대를 뒤로 하고 창덕궁 매표소에 이른다. (협)마을대학종로가 2023년 「종로구 주민소통 공모사업」에 응모해 선정된 ‘소설 속 종로 걸어보기’를 개시한다. 첫 탐방 대상은 김동인의 장편 「운현궁의 봄」에 등장하는 장소들이다.

2020년 복원된 돈화문 월대 위에 서서 좌우를 둘러본다. 1910년 대한제국을 병탄한 일본제국은 창덕궁과 경복궁을 잇는 길을 대로로 확장했다. 순종 사후에는 영친왕을 압박해 1932년 종묘관통선을 개통하여 종묘를 창덕궁·창경궁에서 떼어냈다. 1966년 이 신작로에는 ‘율곡로’라는 이름이 붙었다. 율곡로 종묘 구간은 2009년 지하화 공사에 들어가 2022년 끊어진 지 90년 만에 다시 이어졌다.
이번에는 남쪽 도심을 바라본다. 종로까지 뻗어 주작대로 역할을 하던 돈화문 앞 王의 길은 일제가 월대를 덮고 남산 왜성대에 위치한 조선총독부까지 직선 도로화하여 지금의 형태를 갖췄다.

당하관이 드나들던 창덕궁 금호문(金虎門) 앞은 1926년 4월 순종 승하 때 송학선 의사가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척살하려 뛰어든 곳이다. 「운현궁의 봄」 4장에서 흥선군이 대제학 김병학의 사인남여를 빌어 타고 승후관 조성하를 배행하여 내전으로 조 대비를 안견하러 출입한 문이 금호문이다.

금천교를 건너 마주하는 진선문(進善門) 우측에는 대한제국의 궁내부를 형식적으로 계승한 이왕직(李王職) 청사가 있었다. 인정문 용마루에 3개, 인정전 용마루에 5개가 새겨진 오얏꽃 문양을 통해 조선왕조를 일개 가문의 정권으로 낮추려는 일제의 사특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소설 25장에는 갑자년(1864) 고종의 즉위식과 함께 국태공의 섭정 취임식 장면이 나온다. 살아있는 대원군 직위에 오른 흥선은 인정전 월대에 올라 발아래 늘어선 대소백관을 향해 “전 책임을 내가 지고 전 의무를 내가 갖겠다”고 선언하며 사직의 만세태평을 예견했다. 그러나 채 반세기가 되지 못한 1910년 9월에 손자인 순종 융희제는 인정전에서 메이지 덴노가 보낸 창덕궁이왕(昌德宮李王) 책봉 칙사를 맞닥뜨리게 된다.

선을 즐기고(낙선재·樂善齋) 복을 아끼고(석복헌·錫福軒) 건강하게 장수한다(수강재·壽康齋)는 헌종의 바람은 이뤄지지 못했다. 희정당(효명세자), 중희당(헌종), 대조전(철종), 흥복헌(순종)… 소설에 등장하는 군왕들이 승하한 전각과 터를 둘러본다. 임종에 처한 지존이 평상시 입던 웃옷을 든 내시가 지붕에 올라 상위복(上位復)을 3번 외쳤을 것이다. “윗사람(임금)이여, 돌아오소서”라는 뜻이다.

2023년 「종로구 주민소통 공모사업」 ‘소설 속 종로 걸어보기’ 참가자들이 운현궁 노안당을 탐방하고 있다.

원점 회귀. 돈화문을 나와 운현궁으로 향한다. 흥선대원군이 궁궐을 출입할 때 이용한 공근문(恭勤門)의 위치를 가늠해 본다. 운현궁은 흥선군의 낙척과 섭정, 실각과 납치, 유폐와 운명을 모두 지켜본 역사적인 곳이다. 경내에 들어서면 한창때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소설 1장에서 묘사된 것처럼 ‘쓰러져가는 아래채, 거미줄 천지의 추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고종 즉위 이후 잠저(潛邸)인 ‘경운동 흥선댁’은 새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대원위 대감이 거처한 사랑채 노안당(老安堂)은 처마 끝에 각목을 길게 대어 차양을 달고 주춧돌 사이를 벽돌로 막아 놓은 독특한 누마루의 모습을 보여준다. 현판은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현판 왼쪽에 ‘서위 석파선생 노완’(書爲 石坡先生 老阮: 늙은 완당이 석파 선생에게 써준다)이라는 작은 글씨가 있다.

운현궁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노락당(老樂堂)은 민치록의 외동딸 민자영이 삼간택 후 왕비수업을 받은 곳이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가례를 올리고 침소로 사용한 이후 가족행사를 위한 공간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소설 6장에서 명성황후는 삼청동에서 오막살이하는 ‘얽으망태 소녀’로 등장한다. 친정이 단출한 것이 마음에 들었던 흥선대원군이 며느리로 낙점했지만, 훗날 정적으로 대립하게 된다.

1866년(고종3) 병인년 3월에 15살 이재황은 노락당에서 16살 민자영과 친영례(親迎禮)를 거행했다. 병인년 정월에 병인박해가 시작됐고, 그 반동으로 11월에 병인양요가 발생했다. 같은 해 7월에는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號가 소각됐다. 노락당 동편으로 양관(洋館) 함석지붕이 보인다.<

이로당(二老堂)은 안채 용도로 신축한 건물이다. 바깥 남자들의 출입을 제한하기 위해 중정(中庭)이 있는 ㅁ자형 배치를 하고 있다. 현판의 두 이(二)자가 위쪽으로 올라가 있는데 대원군과 부대부인을 높이는 의미라 한다. 석조 수조인 운하연지(雲下硯池), 해시계를 올려놓았던 일영대(日影臺)를 볼 수 있다. 동편 마당에는 빙고 앞쪽에 난을 올려놓았던 무승대(茂承臺), 고종이 어릴 때 오르내리며 놀던 정2품 대부송(大夫松)을 기리는 경송비(慶松碑)가 서 있다.

「운현궁의 봄」은 경신년(1860)부터 신유년(1861), 임술년(1862), 계해년(1863), 갑자년(1864)에 이르기까지 5년에 걸친 상갓집 개 흥선군 이하응의 권토중래를 다뤘다. “옛날 흥선이 관직을 내어던진 이래, 오랫동안 쓸쓸하기 짝이 없던 그 집에도 드디어 봄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봄은 (오랫동안 쓸쓸하였더니만큼) 또한 유달리 화려한 봄이었다(25장).”

소설의 이해를 더하기 위해 부암동 석파정(石坡亭) 별서, 남양주 문안산 기슭의 국태공원소(國太公園所)를 찾아봐도 좋을 것이다. 2023년 「종로구 주민소통 공모사업」 ‘소설 속 종로 걸어보기’ 2차시는 7월23일, 1930년대 경성부 구보氏의 하루 여정을 따라간다.

2023년 6월 11일 일요일

그대 너무 서러워마요

어제 이 시간 명동성당 꼬스트홀… 홀로아리랑(35플러스 합창단), 그날이 오면(한선희), 늙은 군인의 노래(박준), 한 입의 아우성으로(꽃다지),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 함께가자 우리 이길을, 광야에서를 따라 불렀다. 이 뜨거운 노래들을 이렇게나 한꺼번에 불러보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명동성당 청년단체연합회장을 지낸 기춘氏는 1985년에 광주학살 비디오테이프를 서울시내에서는 처음으로 이곳 문화관(현 꼬스트홀)에서 상영하여 신자·시민들의 폭발적인 관심과 참여를 불러왔다고 회상했다. 가민연 옛친구 순이누나의 추모편지에 울컥, 눈물을 훔쳤다.

미친 세상, 모진 바람 안고 그대는 다시 못 올 곳으로 푸른 계절에 떠났지. 조찬배 아버님의 바람대로 그의 쇠붙이, 그의 학생증, 그의 사진첩을 온전히 회수해 소장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김상식 신부(예수성심전교수도회)의 말처럼 지금 잠들어있는 이 나라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다시 깨달음의 불을 지를 수 있기를… 야만으로 뒷걸음치는 안녕하지 못한 시대. 부끄럽지 않도록 추하지 않게 잘 늙어가자… 

가톨릭평화공동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공동주최한 통일열사 故조성만(요셉) 35주기 추모공연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 콘서트」

1988년 5월15일, 통일열사 故조성만(요셉) 형제가 투신 산화한 명동성당 교육관은 기억하고 있다. 그대 너무 서러워 마요.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2023년 6월 5일 월요일

생활밀착형 문화 콘텐츠로 나주식 통일운동을

6월2일(금) KTX 타고 처음 가본 남도 羅州. 나주의샛골나이, 나주소반, 율정점, 영산포 황포돛배, 나주연가(차효린唱), 어디 숨었냐 사십마넌(정윤천詩), 사철가(장진규唱)… 휘영청 달밤에 듣는 판소리 적벽가, 고향역 주인장의 찰진 리액션, 아침 영산강변의 진흙밟기, 보리순 홍어애탕, 생경한 어휘와 풍경, 낯설지만 낯익은 만남…

고려시대 개경과 서경 이외 지역에서 유일하게 팔관회가 개최된 곳, 전봉준의 동학군이 유일하게 집강소를 설치하지 못한 곳이 바로 나주였다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됐다. 북콘서트에서 구입한 「명동 다다이스트」(지승룡著)는 찬찬히 읽으며 경험과 기억과의 화해를 시도해 볼 테다.

지역을 살피고 다듬고 엮어내는 여정이 쉽지 않다. 발상과 출발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이번 남도행에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고 귀한 인연에 감사한 마음 전한다.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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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자형 기자 | 승인 2023.06.05 18:06
http://www.k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261

나주학교, 나주고성포럼 개최
천년고도 나주, 인문학으로 디자인하라!


나주학교(교장 홍양현)는 2일(금) 오후 4시, 복합문화공간 나주정미소에서 ‘천년도시 나주를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가’를 주제로 나주고성포럼을 개최했다. 나주 지역의 문제 해결방안을 모색하고 현 상태의 이상적 상태로의 전환을 추구하기 위한 포럼이다.

첫 발제에 나선 정연진 상임대표(AOK한국)는 10년 전 나주향교에서 본인의 국내 첫 지역강연이 이루어진 인연을 돌아보는 것으로 서두를 열었다. 정 대표는 “후삼국이라는 분열과 갈등의 시대에 통합의 정신과 새시대에 대한 비전을 이미 천년 전에 나주가 보여주었다”고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천년고도 나주가 지닌 역사·문화적 자산을 초석으로 실행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며 통일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나주로 탈바꿈시켜 보자”고 힘주어 말했다.

2일 오후, 나주고성포럼에서 AOK(액션원코리아) 한국 정연진 상임대표가 발제를 통해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풀뿌리운동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어진 발제는 80년대 초반 독일로 건너가 40년간 활동하다가 최근 나주로 들어온 「검은비(碑)」의 정영창 작가가 맡았다. 정 작가는 라인강이 관통하며 흐르는 뒤셀도르프와 영산강이 가로지르는 나주를 교차 비교하며 “나주가 뒤셀도르프처럼 강이라는 요소의 장점을 십분 살려 과거의 문화유산을 지혜롭게 담아내 고급스러운 현대도시로 변화를 추구하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세번째 발제자인 신정일 이사장(우리땅걷기)은 “2004년 봄, 조선시대 9대로 중 나주를 지나는 제7호 간선도로인 삼남대로를 걸었다”고 소개했다. 신 이사장은 고려 태조와 장화왕후의 만남, 정도전 유배, 황진이와 임제의 흔적, 정약전·정약용 형제의 이별, 나주목사 민종렬과 전봉준, 1929년 호남선 통학열차의 조선학생들 등 나주 관련 인물과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 장소를 촘촘히 엮어내는 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2일 과원길 나주정미소에서 진행된 나주고성포럼 발제자들. ②정영창 작가 ③신정일 문화사학자 ④지승룡 소장 ⑤이상준 교수

지승룡 소장(도시문화연구소)이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지 소장은 “요즘 가장 각광을 받는 개신교단은 구세군이다”라고 운을 떼며 성리학 이념을 현실정치에 구현하려 애쓴 정도전의 제민철학을 소환했다. “1천년 역사도시라고 자부한다면 자기 것을 공유하고 나누는 정신이 필요하다. 아시아의 지중해 중심도시가 돼야겠다는 신념으로 구세군처럼 온정을 나누고 정도전의 복지도시를 지향한다면 나주는 세계에 내놓을 도시로 거듭날 것”으로 내다봤다.

마지막 발제에 나선 이상준 교수(동신대)는 문순태 대하소설 「타오르는 강」에 나타난 공간현황과 활용방안을 이야기했다. 이 교수는 “188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나주 영산강 일대의 지리, 방언, 신분제, 토지수탈과 그에 대한 저항 등 근대 사회·문화적 콘텐츠가 녹아난 스토리를 다양하게 변용, 확장하는 연구에 지역 사람들이 더 디테일하게 다가가야 한다”며 역할론을 부각했다.

나주고성포럼이 열린 나주정미소 천장엔 청사초롱이 걸리고, 벽면엔 박정자 단청장(국가무형문화재 제48호)의 불화가 전시돼 고풍스런 풍치를 더했다.

20여 명이 함께한 나주고성포럼은 천년도시 나주의 새로운 천년도약을 바라는 참가자들의 단체촬영으로 마무리됐다. 참가자들은 인근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함께 저녁을 나누며, 나주를 브랜딩하고 지방 지역부터 새롭게 시작해 문화를 공유, 확산하는 일에 이바지하자는 결의를 다졌다.

한편, 이날 포럼이 열린 나주정미소는 1920년대에 나주시 성북동에 호남권 최초로 세워진 정미소로, 미곡 수탈의 아픔과 나주학생항일운동의 주역들이 모여 회의를 했던 항일의 역사를 모두 지니고 있다. 1980년대 이후 화재로 인해 버려졌던 정미소(精米所) 건물은 나주읍성권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100년이 넘은 붉은 벽돌을 최대한 보존하는 방식으로 구조물을 보강해 2022년 ‘정과 맛을 간직한 웃음’이라는 의미의 새로운 정미소(情味笑)로 재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