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4일 일요일

경운동 건국빌딩

어제 종로3가역 인근 건국빌딩에서 공덕역 근처 풍림빌딩으로 사무실을 이전하는 ‘아는 형님’(?)이 계셔서 이사짐을 좀 거들어드렸다.
건국빌딩은 가운데에 주차장을 ㄱ자로 둘러싸고 인사관, 경운관, 건국관의 3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두어 번 가봤는데도 건물이 헷갈린다. 인사관(삼일대로 437)은 낙원동이고, 경운관(삼일대로 443)과 건국관(인사동4길)은 경운동이다. 건물 내부 복도가 널찍널찍하다.
월산대군의 옛 사저에 300년 터울을 두고 의주 몽진에서 환도한 선조와 아관파천에서 환궁한 고종이 기거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경운궁(慶運宮)이다. 경운동이란 동명이 경운궁과 연관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건국빌딩에서 경운궁(덕수궁)까지는 직선 거리로 1.4㎞에 이른다.
건국빌딩 자리는 1910년까지 서북학회 등이 들어섰던 곳이라고 한다.


낙원동 네거리의 낙원떡집(낙원본점) 앞에서 횡단보도를 통해 삼일대로를 건너 직진하면 건국빌딩 인사관(구 건국 1호 빌딩)과 건국주차장으로 진입할 수 있다.
횡단보도 중간 지점에는 한양 조씨 정암 조광조(1482~1520)가 살던 한양골 집터 표석이 있다. 고려시대에 한양향교가 있던 자리여서 향교동 또는 한양골로 불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경운관(구 건국 2호 빌딩) 도로쪽 입구 앞에는 표석 하나가 놓여있다. 오성학교, 보성학교, 정치대학의 이름이 보인다.

<표지석> 서북학회 터(西北學會址, Former Site of Seobukhakhoe)
서북학회는 대한제국 시대인 1908년에 국권 회복 운동을 위하여 평안도·함경도·황해도민이 조직한 애국 계몽 단체였다. 1909년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운동으로 전환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1910년에 강제 해산되었다. 그 후 이곳에는 한때 오성학교, 보성전문학교, 건국대학교 전신인 정치대학이 자리하였다.

1908년 1월에 기존의 서우학회(西友學會)와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가 통합하여 창설된 단체가 서북학회다. 평안도·황해도·함경도 출신의 지식인들이 중심이었다고 하는데 박은식, 이갑, 이동휘, 안창호 등 스쿼드가 대단하다. 이들은 1908년 11월 2일에 33명의 공동명의로 낙원동 282번지에 건물을 준공했다. 1910년 10월 1일 경술국치 후 서북학회가 강제해산된 후에는 서북협성학교, 오성학교 교사로 사용되었다. 해체된 건물은 1984년 12월에 광진구 모진동 건국대학교 내로 이전, 복원되어 현재 건국대학교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건국관(구 건국 3호 빌딩) 좌우에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서 있는 사이로 다양한 석물들이 놓여 있다. 건국관 입주 업체에서 판매하는 것이라고 들었다. 건국관에는 고미술이나 서예 관련 상호가 많이 보인다.


2018년 3월 1일 목요일

가회동, 종로 도심 트레킹

제99주년 삼일절을 맞아 가회동과 종로 일대 일부를 돌아보았다. 제39차 역사문화트레킹이다. 기록은 주요 포스트의 안내판과 표지석의 내용으로 대신한다.


<안내판> 3·1운동 유적지 : 유심사 터(惟心社址)
3·1운동 당시 불교 잡지 「유심」을 발행하던 출판사가 있던 곳. 만해 한용운(1879~1944)이 이곳에서 불교계의 3·1운동 참여를 주도하였다.


<안내판> 석정보름우물(石井十五井, Seokjeong Full Moon Well)
서울에 상수도 시설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20세기 초까지 우물은 주된 음수, 생활용수 공급원이었다. 북촌 주민들의 중요한 음수원이었던 석정보름우물은 15일 동안은 맑고, 15일 동안은 흐려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물맛이 좋기로 소문난 데다, 이 우물물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 궁궐 궁녀들이 몰래 떠다 마시며 아이 낳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1794년 중국에서 압록강을 건너 온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새남터에서 순교하기 전까지 계동 최인길(마티아) 집에 숨어 지내면서 조선 땅에서 첫 미사를 봉헌할 때, 이 우물물로 세례를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1845년 한국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도 이 지역에서 짧은 사목 기간 동안 이 물을 성수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주교 박해 당시 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하자 갑자기 물맛이 써져서 한동안 사용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안내판> 3·1운동 책원비(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Memorial)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소재지: 종로구 창덕궁길 164(중앙고등학교 교정)
규모: 높이 2.5m, 폭 2.1m
1919년 중앙고등학교 교장이던 송진우, 김성수 그리고 교사이던 현상윤 등이 모여 독립운동에 필요한 독립선언문 작성 등 3·1운동 계획을 세우던 곳이 중앙고등학교 숙직실이었기에 1973년 6월 1일 동아일보사가 3·1운동의 태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책원비를 건립하였다.

[비문 내용]
1910년 8월 29일 우니라나는 포악무도한 왜적으로부터 그 유례가 없는 굴욕적인 침략을 받아 국권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민족의 자유는 여지없이 박탈당하여 삼천리 강산은 흡사히 감옥으로 변하고 2천만 동포는 누구나 포로가 되는 고초를 겪었으며, 이런 무리한 탄압은 날로 심하여 우리는 거의 질식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마침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 11월에 종결되고 만국평화회의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미국 대통령 윌슨씨는 세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민족의 운명은 그들 스스로가 결정지을 것이라는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였다.… 이하 생략


<안내판> 중앙고보 숙직실 터(The Site of a Night Duty Room at Choongang-gobo)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일본에서 추진하던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계획을 국내에 알려, 3·1운동을 촉발시킨 곳이다.
일본 도쿄 유학생 송계백이 1919년 1월 중앙고보를 방문하여 숙직실에서 교사 현상윤, 교장 송진우와 만나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알리고 2·8독립 선언서 초안을 전달함으로써 3·1운동을 촉진하였다.
중앙고보 숙직실은 1917년 김성수가 계동 교사를 지으면서 교장 사택으로 사용하였던 곳이다. 현재의 강단 정문 앞에 있던 당시 숙직실은 강당을 지으면서 철거하고 1973년 ‘3·1기념관’으로 복원하였다.


<안내판> 3·1기념관(3·1紀念館)
중앙학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3·1운동이다.
당시 중앙학교의 교사와 숙직실은 우국인사들의 사랑방 같은 역할을 하였다.
이 건물이 당시 중앙학교의 숙직실이었고 여기에서 인촌 김성수를 비롯 고하 송진우, 기당 현상윤 등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모여 3·1운동을 모의했다.
구체적인 거사 계획은 인촌, 고하, 기당 세사람이 이곳에서 처음 발의했고 인촌을 배후에 두고 49인이 거사를 주도했으며 이들 중 33인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낭독했다.
중앙학교는 개교 65주년 기념사업으로 1973년 당시 숙직실을 복원 3·1기념관을 설치하고 3·1운동 책원지비를 세운다.



위 사진은 가회동 북촌로 돈미약국 인근의 한옥 처마를 촬영한 것이다. 이 동네 한옥엔 함석 차양이 많이 보인다.


<표지석> 손병희선생집터(孫秉熙先生家址, House of Son Byeonghui)
손병희(1861~1922) 선생은 구한말의 천도교(天道敎) 지도자이자 3·1운동을 이끈 독립운동가이다. 1897년에 동학의 제3대 교주가 되었으며,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으로 3·1운동을 주도하였다.


<표지석>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터(Original site of the Joseon Language Society)
조선어학회는 1921년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의 제자들이 한글의 연구와 발전을 목적으로 발족한 조선어 연구회의 후신이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활동이 중단되었다가 광복 후 한글학회로 이어졌다.


아래 사진은 덕성여중과 덕성여고를 잇는 다리를 촬영한 것이다. 덕성여중 담장쪽에 천도교중앙총부지 표석이 있다.


<안내판> 옛 천도교 중앙총부 터(The Headquarters of Chondogyo)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소재지: 종로구 율곡로3길 49

천도교를 비롯한 종교계 지도자들이 모여 3·1운동 계획을 논의한 옛 천도교 중앙총부가 있던 곳이다.
천도교에서는 손병희의 지도아래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선언서 인쇄 배포와 만세 시위를 통해 독립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기독교·불교계와 제휴를 추진하였다. 천도교 중앙총부는 각계의 3·1운동 통합 논의에서 중심이 되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천도교 중앙총부 본관 건물은 1910년 2층으로 건립되었고, 1921년 경운동 신축 교당으로 이전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현재 옛 건물은 사라지고 덕성여자중학교가 들어서 있다.


<표지석> 삼일독립선언유적지
이 집터는 본래 중종때 순화공주의 궁터라 불행하게도 을사 경술 두 조약때 매국 대신들의 모의처로 사용되더니 삼일독립운동 때에는 그 조약을 무효화 시킨다는 뜻으로 여기에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즉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탑골공원에서 터진 민족의 절규와 함께 민족대표 일동은 여기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대한독립을 알리는 식을 거행하는 동시에 미리 서명해 두었던 선언서를 요로에 발표하고 급히 달려온 일경들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하고 일제히 사로잡혔다. 그 뒤 남감리 교회는 이 터를 매수하여 태화기독교사회관 건물을 지었으며 일제 말기에는 침략의 도구로 징발 되었으나 팔일오 해방과 더불어 이를 되찾아 사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도시재개발계획에 따라 건물이 헐리게 되매 새집을 짓고 여기에 그 사연을 줄잡아 둔다."

                                                            건립일 1997년 3월 1일
                                                            당초 건립 1982년 8월 15일

                                                            오리 전택부 글
                                                            해청 손경식 글씨




<안내판> 민족대표 삼일독립선언도(THE SIGNING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기미년(1919년) 3월 1일, 이곳(당시 명월관)에서 민족 대표 33인은 독립 선언식을 통해 조선이 독립국이며 조선인은 자주민임을 선언하였다.
2년 후인 1921년, 감리교 여성 선교사는 이곳에서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한 선도적인 복지 사업을 펼치며 하나님의 큰 평화를 실현하고자 ‘태화여자관’의 문을 열었다. 태화복지재단은 이처럼 유서 깊은 장소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독립 선언 장면을 기록화로 제작하였다.


<표지석> 순화궁터(順和宮址)
조선조 헌종(憲宗)의 후궁 경빈 김씨(慶嬪 金氏, 金祖根의 딸) 사당인 순화궁(順和宮)이 있었던 자리



<표지석> 이율곡(李栗谷)선생 살던 집터
이 언저리는 이이(李珥) 이율곡(1536~1584) 선생이 살던 절골 집터

승동교회 내 이율곡의 집터 표석… ‘율곡 이이’가 아니라 ‘이이 이율곡’이라니… 표기가 요상하다. 아마도 글자 배치 때문이겠지만, 생경한 느낌이 든다. 최소한의 통일된 형식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안내판> 승동교회(胜勝洞敎會|勝洞敎會, Seung Dong Presbyterian Church)
지정번호: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30호 / 시대: 1912년
소재지: 종로구 인사동 137번지
이 건물은 1893년 미국선교사 새뮤얼 무어 목사가 설립한 승동교회의 교회당으로 1910년에 짓기 시작하여 1912년에 완성되었다. 붉은 벽돌을 이용한 양옥 건물인 이 교회당은 동적인 구조를 갖춘 초기 개신교 교회당의 대표적인 건물로 그 규모가 웅장하다. 건물 1층 방들의 벽이 2층의 넓은 예배실 공간과 바닥을 받쳐 주는 벽돌조 건축의 전형적인 방식을 채책하고 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전국의 학생대표들이 이 교회에 모여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나누어 주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승동교회는 한국 교회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종교적 행사가 이곳에서 많이 열렸다. 수리와 증축이 거듭되면서 건물의 외벽에 구조적 결함이 생겨, 외관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철골로 보강하여 안전하게 복원하였다.
건물의 벽체와 창호 주변, 지붕과 바닥 틀 등은 20세기 초 서양식 건축기술의 정착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안내판> 승동교화와 三·一운동
승동교회 면려청년회장이었던 김원벽(金元璧)을 비롯해서 학생지도자들은 1919년 2월 20일에 승동교회 1층 밀실에서 三·一학생 독립 만세 운동을 숙의 하였다.
그러나 독립만세운동이 범국민적으로 이루어지게 됨에 따라서 이곳에서 23일 학생측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소각하고 28일 三·一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한편 당시 차상진(車相晋) 담임목사는 “十二人等의 狀書”를 조선 총독에게 제출하고 투옥당하였다. 그 후로 승동교회는 일본 경찰로부터 심한 수색을 당하는 등 많은 수난을 당해야 했다.


<표지석> 3·1독립운동 기념터(3·1獨立運動 記念址) : 승동교회
3·1독립운동 거사(獨立運動 擧事)를 위해 학생대표(學生代表)들의 모의(謀議)하였던 곳.


<안내판> 탑골공원 팔각정(塔谷公園八角亭, Palgakjeong Pavilion of Tapgol Park)
지정번호: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3호 / 시대: 1902년(광무 6)
소재지: 종로구 종로 2가 38-1번지 탑골공원
팔각정은 1902년(광무 6)에 탑골공원 안에 지은 팔각형 정자다. 이곳은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이다. 팔각정은 장대석 기단 위에 둥근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 부분은 물익공을 짠 후 기와지붕을 덮었다. 전통과 근대의 건축 기술을 두루 사용했던 건축가 심의석(沈宜錫: 1854∼1924)이 주도하여 공사를 진행하였다.
탑골공원은 서울에 만들어진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다. 이 공원이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 이견이 있으나, 1890년대로 알려져 있다. 이 공원은 고종 대 총세무사로 활약한 브라운[John Mcleavy Brown, 栢貞安]이 건의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탑골공원, 파고다공원 등으로 불리다가 1991년부터 공식적으로 탑골공원이 되었다.


<안내판> 원각사지 십층석탑(圓覺寺十层石塔|円覚寺址十層石塔, Ten-Story Stone Pagoda of Wongaksa Temple site)
지정번호: 국보 제2호 / 시대: 1467년(세조 13) / 소재지: 종로구 종로 2가 38-2번지
이 탑은 세조(世祖)가 세운 원각사(圓覺寺) 터에 남아 있는 높이 12m의 십층 석탑이다.
원각사는 1465년(세조 11)에 조계종의 본산이었던 흥복사(興福寺) 터를 확장하여 세운 사찰인데, 이 탑은 2년 뒤인 1467년(세조 13)에 완성했다. 세조는 사리분신(舍利分身)하는 경이로운 일을 겪은 뒤 원각사를 짓기로 결정하였는데, 공사 도중에도 사리분신하고 서기가 나타났다고 전해진다. 지금 견해로는 십층 석탑이지만 사료에는 13층의 탑[率睹婆]를 세워 분신사리와 새로 번역한 《원각경(圓覺經)》을 모셔 두었다고 한다.
亞자 모양의 기단은 세 겹인데, 아래에는 용과 연꽃 같은 무늬를 새겼고, 중간에는 삼장법사(三藏法師)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일행이 인도에서 불법(佛法)을 구해 오는 과정을 그려 새겼다. 위에는 부처님의 전생 설화와 일생을 조각하였다. 법회 장면을 새긴 탑의 몸체에는 현판, 용을 휘감은 기둥, 목조구조, 지붕을 두었는데, 마치 하나의 건물 같다. 탑을 만든 재료는 흔치 않은 대리석이며, 독특한 형태와 조각 솜씨는 조선시대 석탑의 백미로 꼽힌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에 제작한 경천사 십층석탑(국보 제86호)과 여러 면에서 매우 비슷하다.

원각사지 10층석탑 앞에서 노인 두 분이 작은 태극기를 꽂아놓고 올드랭사인(Auld Lang Syne) 가락에 맞춰 애국가를 부르고 계셨다.



<표지석> 3·1독립운동기념터: 종로 YMCA(獨立運動記念址)
이 기독청년회관(Y.M.C.A.)은 민족운동의 본거지로써 3·1독립운동을 준비하였던 곳.



<표지석> 김상옥 의거 터(金相沃義擧址, Site of Kim Sangohk’s Patriotic Deed)
김상옥(1890~1923)은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원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1월 12일 이곳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며 일본 경찰과 격전을 벌이다 그달 22일 효제동에서 순국하였다.

1호선 종각역 8번출구 입구에 세워진 불령선인 김상옥 의사 의거지 표석은 지하철 환풍기와 오고가는 인파 속에 가려져 있어 찾기가 쉽지 않다.



<표지석>
이 건축물은 1926년 7월 5일 신축하여 일제치하 동아일보·조선일보와 함께 민간 3대 신문의 하나였던 조선중앙일보(1933~1937)의 사옥으로 사용된 건물이다.
조선중앙일보는 독립운동가인 유정 조동호(榴亭 趙東祜)의 후원으로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이 사장에 취임한 후 1936년 8월 13일자 신문에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사진을 실으면서 일장기를 지워버린 사건으로 동아일보와 함께 무기 정간 처분을 받았다가 1937년에 폐간되었다.
1970년부터 농협중앙회에서 사용해 오고 있으며 2002년 ‘서울특별시 고시 제 2002-27호’에 의해 건물 전면 원형보존을 요하는 근대 건축물로 지정되었으며 2003년에 증축되었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조선중앙일보 사옥의 표석에는 아예 제목 역할을 하는 표제어가 빠져 있다.


<안내판> 수진궁(壽進宮, Sujin Palace)
명례궁(明禮宮)·어의궁(於義宮)·용동궁(龍洞宮) 등과 함께 중요한 궁의 하나였다. 수진궁의 정확한 연혁은 알 수 없으나 본래는 조선 예종의 둘째아들인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저택이었다 한다.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봉작(封爵)을 받기 전에 사망한 대군·왕자와 출가하기 전에 사망한 공주·옹주들을 합사(合祀: 합동으로 제사를 모심)하는 사우(祠宇)로 변하였다.
수진궁(壽進宮)의 위치는 조선후기 여러 지도를 통해 추정가능하다. 또 구체적인 필지의 규모와 건물의 배치는 규장각의 소장되어 있는[가사(家舍)에 관한 조복문서(照覆文書)] 중, <수진궁 및 용동궁 건물 측량 토지 조사보고(壽進宮及龍洞宮建物附屬土地調査報告)에 도면이 남아있어 이를 일제강점기 지적도에 중첩해 보면 대략적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조사지역은 1908년에 건립된 수진측량학교(壽進測量學校)의 옛터로 확인된다.


<표지석> 수진측량학교터(壽進測量學校址)
개화사상가 유길준(兪吉濬)이 수진궁(壽進宮)을 빌려 측량전문교육기관(1908~1909)을 세웠던 곳.



<표지석> 정도전 집터(鄭道傳 家址)
조선 개국공신(開國功臣)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이 살던 집터. 후일 사복시(司僕寺), 제용감(濟用監)이 이 자리에 들어 섰고 일제때에는 수송국민학교(壽松國民學校)가 세워졌었다.



<표지석> 혜정교터(惠政橋址)
중학천(中學川) 위에 놓였던 다리로 복청교(福淸橋)라고도 하며, 이곳에서 탐관오리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하기도 하였음

실제로는 가마에 물을 끓여 사람을 걸상 위에 앉히고 삶는 시늉만 하는 팽형(烹刑)이 행해진 것이라고 하는데, 표석의 내용만 보면 마치 처형이 집행된 것으로 오독할 수 있겠다.

2018년 2월 10일 토요일

연천 탐방

고양도시농업네트워크에서 진행한 민통선 생명평화여행에 참가했다.
아침 9시 30분… 일산동구청에서 집결 후 왼편으로 장항습지를 두고 자유로를 달려서 찾아간 곳은 동이대교 아랫쪽의 주상절리(柱狀節理, columnar joint).
동이리 주상절리는 27만~10만년 전 북한 평강지역 오리산과 부근 680고지에서 흘러온 용암이 임진강을 만나 역류해 생성된 주상절리대의 일부분인데, 2015년에 환경부에서 우리나라 7번째 지질공원으로 등록한 한탄·임진강 지질공원의 한 축인 곳이다. 지질공원은 국립공원 등 여타 자연공원에 비해 재산권 제약이 까다롭지 않다고 한다.
교각 주변엔 갈대밭도 있었는데, 보통 갈대는 물이 있는 습지에서 자라는 반면 억새는 산과 들에서 많이 자란다. 하지만 물가에 사는 물억새도 있어서 헷갈리기 쉬운데, 이럴 경우엔 잎사귀로 구분해야 한다. 꽃도 갈대꽃 쪽이 좀더 복슬복슬한 느낌이다.


다시 버스를 타고 11시 방향으로 이동하여 연천 유엔군 화장장 시설에 도착했다.
1952년 6·25전쟁 당시 영국군과 벨기에군이 연천 금굴산 전투에 투입되었는데, 이때 희생된 유엔군의 유해를 화장하여 본국으로 송환하기 위해 영국군이 막돌 허튼층 쌓기로 마련한 7m 높이의 굴뚝과 부속 화장시설이다.
1993년에 지역의 향토사학자가 발견했다고 알려졌다. 2008년에 등록문화재 제408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기도 하다.


UN군 화장장에서 500m쯤 서쪽에 당포성(堂浦城)이 있다.
원래는 백제의 성이었겠지만 5세기 경에는 남진에 성공한 고구려의 요새가 되었을 것이다. 다시 6세기 이후에는 나제연합군에 밀리면서 북퇴한 후 100년 넘게 신라와 마주한 고구려의 임진강 방어선이 되었을 것이다. 1992년 발견된 당포성은 해자만 해도 폭 6m에 깊이 3m가 된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기다란 이등변삼각형 형태의 절벽 위에 축조했는데, 수직벽이 아닌 동쪽에는 현무암을 가지고 다듬돌 바른층 쌓기로 축성하였다. 안내판에는 6m 높이라고 쓰여있지만 그보다는 낮아 보였다. 당포성은 2006년에 사적 제468호로 지정되었다. 1500여년의 풍상을 헤쳐온 고구려의 요새를 문화상품화하면 좋은 줄거리가 나올 법도 하다.


다시 서쪽으로 1㎞쯤 이동하니 고려왕조의 종묘랄 수 있는 숭의전이다.
정문인 천수문(天授門) 앞쪽으로 수령 550년이 넘은 20m짜리 느티나무 2그루가 서있다. 그러고보니 왕건이 사용한 연호가 천수(天授)였네.


정전인 숭의전(崇義殿)은 고려 태조, 8대 현종, 11대 문종, 24대 원종 등 4황제의 위패와 왕건의 어진을 모시고 있다. 배신청(陪臣廳)은 고려 16공신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복지겸·홍유·신숭겸·유금필·배현경·서희·강감찬·윤관·김부식·김취려·조충·김방경·안우·이방실·김득배·정몽주가 배향돼 있다.
6·25전쟁 때 전각이 소실되었는데, 연천 숭의전지는 1971년에 사적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매년 봄가을에 한 차례씩 개성왕씨종친회 주관으로 춘계대제와 추계대제가 봉행되고 있다.
600m 길이의 숭의전 둘레길은 평화누리길 11코스와도 연계되어 있다. 잠두봉에서 참나무 6형제(졸참나무·갈참나무·굴참나무·신갈나무·떡갈나무·상수리나무)를 확인해 보았다.
숭의전으로 올라가는 하마비와 홍살문 아래쪽에 어수정(御水井)이 있다. 태봉국의 신하로 녹을 먹던 시절의 왕건이 마시던 물이라고 한다.
길 맞은편으로 식당 2개가 나란히 붙어 있다. 우리는 왼편의 왕자회관에서 점심을 먹었다. 버섯전골 맛이 좋았고, 밑반찬이 맛깔났으며 무엇보다 주인아주머니가 친절하게 서비스해 주셨다.


예전엔 장군교가 지나던 장군여울 위쪽에 설치된 임진강 두루미 생태관찰대에서 탐조망원경으로 철새를 탐조했다.
천연기념물 제202호인 두루미(red-crowned crane)는 울음소리에 따라 명명되었는데, 정수리에 붉은 점이 있다. 두루미·학·단정학(丹頂鶴)은 같은 새의 다른 이름이다. 천연기념물 제203호인 재두루미(white-naped crane)는 눈 주변이 붉은 색이다. 길 잃은 새(迷鳥, stray bird)로 추정되는 시베리아 흰두루미(Siberian white crane) 2마리도 관찰하는 행운이 따랐다. 망원경 렌즈에 스마트폰을 대고 철새 사진을 박아보았는데 생각보다 잘 나온 듯하다.
아름다웠다. 오늘 일정 중에서 초등생 등 아동과 청소년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활동이 아니었나 싶다. 스완구스(swan goose)… 기러기의 일종으로 거위의 조상쯤 된다는 개리(또는 게리) 얘기도 재미있었다. 성삼이와 덕재의 ‘단정학’이 생각났다. 폴 사이먼의 ‘철새는 날아가고(El condor pasa)’도 생각났다.


빙애여울을 지나 민통선(민간인통제선) 내 제28보병사단 태풍부대로 들어갔다.
중서부전선 264m 비슬산 정상의 태풍전망대는 155마일 휴전선에 설치된 크고 작은 12개 전망대 중 북한과 가장 근접한 전망대다. 남쪽으로 흐르는 임진강 사이로 배티고지, 노리고지 등이 보였다. 흐린 날씨임에도 1600m 전방의 북한 초소와 북한군 병사가 총을 맨 모습까지 렌즈 너머로 볼 수 있었다.


오늘 함께 탐방길에 오른 명례방협동조합 여섯 식구들과 태풍전망대 앞에서 포즈 잡고 한 컷~


태풍전망대에서 4시 방향으로 5㎞ 직선거리에 군남홍수조절지가 있다. 북한 황강댐의 무단방류에 대응하기 위해 조성된 댐이라고 한다. 안내를 맡은 박평수 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실질적으로 홍수조절 역할을 하는 댐은 소양강댐과 충주댐 2개소라고 한다. 오늘 본 군남댐은 26m까지 채워져 있었다.
연강나룻길 두루미 테마파크가 있는 곳인데, 조형물만 있을 뿐 실제 두루미는 볼 수가 없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주판알 튕기면서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표리부동한 정치인을 빗대 ‘철새족’이라 하는 것은 철새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자 명예훼손이다.


37번 국도를 타고 7시 방향으로 30㎞쯤 달리면 도로변에 적군묘지(敵軍墓地)가 있다. 왼편 1묘역에는 북한군이, 오른편 2묘역에는 북한군 일부와 중공군이 묻혀 있다.
원래는 1968년 1·21사태를 도발하여 사살된 김신조의 124군부대 무장공비들의 가묘가 있던 곳인데 제네바 협약 제120조 등에 따라 YS 시절인 1996년 7월, 전국에 산재한 적군묘를 모아 지금처럼 조성하여 전 세계에서 유일한 적군(enemy)의 묘지가 탄생하였다.
‘무명인’이란 이름이 새겨진 30×25㎝의 화강암 비석에는 ‘○○지구 전투’라는 지역명도 적혀 있다. 벌초 등 깔금하게 관리된 모습이었다.
재임 초기인 2013년 베이징을 방문한 박근혜는 중국군의 유해를 송환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2014년 3월 27일 중국으로 인도된 437구의 유해는 선양에 있는 항미원조열사릉에 안치됐다고 한다. 사진의 빈 공간은 중공군들의 유해가 묻혀있던 곳이다.
태풍전망대, 유엔군 화장장 시설, 적군묘지는 전쟁의 비극과 아물지 못한 상처를 일깨워주고 있어 마음이 무겁고 아프다.


당일치기 짧은 한 번의 여행에 생명, 평화, 안보, 생태라는 거대담론을 조금씩 담아낸 보람있는 일정이었다.

2018년 1월 29일 월요일

옛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보안분실 탐방

13일 토요일 오전 11시, 지인들과 함께 번개 투어를 갔다. <1987> 영화를 관람한 뒤 급조한 탐방 일정임에도 모두 16명이 함께 했다. 37번째 역사문화트레킹이자 명례방협동조합의 2번째 번개야행이기도 하다.


고 박종철 군이 참고인 신분으로 연행된 1987년 1월 14일 수요일의 최저기온은 영하 15.1℃… 당시 이곳 용산구 갈월동 88번지의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에서 고문치사(拷問致死)가 벌어졌고 이후 은폐조작이 자행됐다.


‘○○해양연구소’라는 위장 간판을 달았던 이 음습하고 음침한 건물은 1976년 당시 내무부의 발주에 따라 김수근이 설계하였다. 그나마 참여정부 때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현판을 바꿔달면서 ‘인권’을 표방하였으나, 용산·쌍용·밀양·강정·백남기의 사례에서 보듯 이명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인권은 거추장스러운 장애물 수준으로 전락하고 만다.
박종철이 물고문을 당하고 숨져간 509호실에 대비되어 김근태가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부터 전기고문을 당했던 515호실은 원형 보존이 되어 있지 않아 아쉽다.




1987년 4월 13일 대통령 전두환의 호헌선언에 부역했던 영혼없는 공직자들의 뿌리는 깊다. 현재까지도 강력하게 이어지고 있는 이들에 대한 청산 없이는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 따위는 요원한 허상일 뿐이다.

2018년 1월 6일 토요일

1987… 마음이 너무 아파서

1987… 조조관람
영화는 대한뉴스의 대통령 동정으로 시작한다.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조사실
물고문 과정에서 욕조 턱에 목이 눌리면서 억하고 쓰러져간 박종철
치안본부 대공수사처 치안감 박처장
존의(尊意) “받들겠습니다”로 부복하는 하수인들
형사소송법 제196조 수사지휘권
슬기롭지 못한 감빵생활의 교도관들
체육관 선거와 4·13 호헌선언
향린교회와 명동성당, 문익환과 함세웅과 김승훈
호헌철폐, 독재타도
청자켓·청바지의 백골단
연희네 슈퍼
연희와 한열이의 하얀색 타이거 운동화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

“그날 같은거 안와요. 꿈꾸지 말고 정신 차려요.”
“그러고 싶은데 그게 잘 안돼. 마음이 너무 아파서…”

아~ 짧았던 젊음도 피맺힌 기다림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2017년 12월 28일 목요일

ㄹㄹ의 로마자 표기법 ll

로마자 표기법은 외국인이 국어의 고유명사를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마련한 표기 원칙이다. 국어의 로마자 표기는 국어의 표준 발음법에 따라 적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ㄹ’은 모음 앞에서는 ‘r’로, 자음 앞이나 어말에서는 ‘l’로 적는다. 단, ‘ㄹㄹ’은 ‘ll’로 적는다.
구체적인 예는 아래와 같다.

울릉도 Ulleungdo
헌릉(獻陵) Heolleung ⇒ 제3대 태종(1367~1422)과 원비 원경왕후(1365~1420) 민 씨의 쌍릉
인릉(仁陵) Illeung ⇒ 제23대 순조(1790~1834)와 순원왕후(1789~1857) 김 씨의 합장릉
선릉(宣陵) Seolleung ⇒ 제9대 성종(1457~1494)과 계비 정현왕후(1462~1530) 윤 씨의 동원이강릉
원릉(元陵) Wolleung ⇒ 제21대 영조(1694~1776)와 계비 정순왕후 김 씨(1745~1805)의 쌍릉

한라산 [할라산] Hallasan
대관령 [대괄령] Daegwallyeong
마천령 [마철령] Macheollyeong
한려수도(閑麗水道) Hallyeosudo
신륵사(神勒寺) [실륵싸] Silleuksa
곤리도(昆里島) [골리도] Gollido
불로봉 Bullobong
빌레못 Billemot ⇒ 단일동굴로서 세계최장(11,749m)
전라북도 Jeollabuk-do
신라 [실라] Silla
신림 [실림] Sillim
한림 Hallim
산림청(山林廳) sallimcheong
천룡(天龍) Cheollyong
천리포(千里脯) Cheollipo
물약 [물냑→물략] mullyak
알약 [알략] allyak

월내(月乃) [월래] Wollae ⇒ 여성머리장식용품
별내 [별래] Byeollae ⇒ 별비면 + 내동면
문래동(文來洞) [물래동] Mullaedong
물레방아 mullebanga
올레길 ollegil
진달래 jindallae
갈래 gallae
걸레 geolle
벌레 beolle
빨래판 ppallaepan
실례 sillye
판례((判例) [팔례] pallye
판로(販路) [팔로] pallo
결로(結露) gyeollo

고질라 Godzil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