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15일 일요일
2016년 5월 13일 금요일
평창마을길 트레킹
5월 7일(토) 오전… 제14차 역사문화트레킹으로 북한산둘레길 6구간 평창마을길을 걸었다.
01-150 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바로 한국고전번역원(韓國古典飜譯院)이다. 예전에는 민족문화추진회(民族文化推進會)라고 했던 것 같은데… 하여간 이곳에서 출발하여 구기동 교동짬뽕 옆 언덕길로 올라갔다.
목조여래좌상(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41호)으로 알려진 보각사(寶覺寺) 내리막 담장에 분홍 연등이 빼곡히 내걸렸다. 개인사찰인 청련사(靑蓮寺)를 지나면 동국대 종비생(宗費生) 비구니 수행관인 혜광사(慧光寺)가 나온다. 걷는 내내 기가 세기로 유명한 보현봉(普賢峰)을 마주하게 된다.
평창동 보현산신각(서울시 민속자료 제3호)은 북한산 보현봉(普賢峰) 산신(山神)을 모신 곳으로, 소박한 규모와 구조의 단칸짜리 맞배집이다. 안에는 호랑이와 함께 있는 산신을 묘사한 전형적인 산신도를 모셨다. 보현산신각 서쪽 약간 떨어진 곳에는 산신의 부인을 모신 여산신각이 있는데, 그곳에 1923년에 제작한 산신도를 모셨다. 이곳은 신당이 아니라 산신각(山神閣)이기 때문에 부부간을 위한 도당굿 같은 굿판을 벌이지 않으며, 소란을 피울 수 없다. 매년 3월 1일과 9월 13일 두 차례에 걸쳐 유교식 제례를 올린다. 제물은 다른 제당과 유사하지만,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삶아 바치는 것이 특징이다. 마을이 평안하고 주민이 안녕하기를 산신께 기원하던 민간신앙의 면모를 잘 간직하고 있다.
‘The Piano was drinking, Not Me. / 변명’이란 제목이 붙은 건물이다. 컬컬한 음색을 가진 톰 웨이츠의 ‘The Piano Has Been Drinking’에서 따온 작명인지도 모르겠다.
표지석에 2010 아시아실내디자인학회 금상, 2010 아시아태평양 스페이스디자이너협회 우수상, 2009 한국실내건축가협회 수상이라는 설명이 있다.
계곡을 지나고 평창동 언덕에 자리한 연화정사(蓮華精舍)를 지나 명상길(북한산둘레길 5구간) 방향으로 선선히 걸어나갔다.
소나무는 암꽃과 수꽃이 함께 피는 자웅동주(암수한그루)이다. 위쪽의 붉은 꽃이 암술이고 그 밑쪽의 길쭉한 부분이 수술이다. 잎이 두 가닥인 것을 보니 우리나라 소나무(한솔)가 맞다. 일본산 리기다소나무는 침엽이 3개이고, 잣나무는 5개이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송화가루가 날렸다.
일본이 원산지로 알려진 영산홍(映山紅), 자산홍(紫山紅), 백철쭉이 들어서 꽃내음 가득한 조용한 길에 잡지에서나 볼 수 있는 이국적 풍경의 카페같은 집들이 늘어서 있다.
광해군 즉위년(1608)에 경기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면서 설립한 선혜청(宣惠廳)의 평창(平倉)이 있던 데서 평창동(平倉洞) 동명이 비롯되었다. 창동(倉洞)의 유래도 비슷한 경우가 되겠다. 선혜청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대동미의 출납을 위해 용산강에 별창(別倉), 삼청동에 북창(北倉), 옛 장용영(壯勇營) 자리에 동창(東倉), 남대문 안에 남창(南倉)을 두었다.
01-150 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바로 한국고전번역원(韓國古典飜譯院)이다. 예전에는 민족문화추진회(民族文化推進會)라고 했던 것 같은데… 하여간 이곳에서 출발하여 구기동 교동짬뽕 옆 언덕길로 올라갔다.
목조여래좌상(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41호)으로 알려진 보각사(寶覺寺) 내리막 담장에 분홍 연등이 빼곡히 내걸렸다. 개인사찰인 청련사(靑蓮寺)를 지나면 동국대 종비생(宗費生) 비구니 수행관인 혜광사(慧光寺)가 나온다. 걷는 내내 기가 세기로 유명한 보현봉(普賢峰)을 마주하게 된다.
평창동 보현산신각(서울시 민속자료 제3호)은 북한산 보현봉(普賢峰) 산신(山神)을 모신 곳으로, 소박한 규모와 구조의 단칸짜리 맞배집이다. 안에는 호랑이와 함께 있는 산신을 묘사한 전형적인 산신도를 모셨다. 보현산신각 서쪽 약간 떨어진 곳에는 산신의 부인을 모신 여산신각이 있는데, 그곳에 1923년에 제작한 산신도를 모셨다. 이곳은 신당이 아니라 산신각(山神閣)이기 때문에 부부간을 위한 도당굿 같은 굿판을 벌이지 않으며, 소란을 피울 수 없다. 매년 3월 1일과 9월 13일 두 차례에 걸쳐 유교식 제례를 올린다. 제물은 다른 제당과 유사하지만,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삶아 바치는 것이 특징이다. 마을이 평안하고 주민이 안녕하기를 산신께 기원하던 민간신앙의 면모를 잘 간직하고 있다.
‘The Piano was drinking, Not Me. / 변명’이란 제목이 붙은 건물이다. 컬컬한 음색을 가진 톰 웨이츠의 ‘The Piano Has Been Drinking’에서 따온 작명인지도 모르겠다.
표지석에 2010 아시아실내디자인학회 금상, 2010 아시아태평양 스페이스디자이너협회 우수상, 2009 한국실내건축가협회 수상이라는 설명이 있다.
계곡을 지나고 평창동 언덕에 자리한 연화정사(蓮華精舍)를 지나 명상길(북한산둘레길 5구간) 방향으로 선선히 걸어나갔다.
소나무는 암꽃과 수꽃이 함께 피는 자웅동주(암수한그루)이다. 위쪽의 붉은 꽃이 암술이고 그 밑쪽의 길쭉한 부분이 수술이다. 잎이 두 가닥인 것을 보니 우리나라 소나무(한솔)가 맞다. 일본산 리기다소나무는 침엽이 3개이고, 잣나무는 5개이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송화가루가 날렸다.
일본이 원산지로 알려진 영산홍(映山紅), 자산홍(紫山紅), 백철쭉이 들어서 꽃내음 가득한 조용한 길에 잡지에서나 볼 수 있는 이국적 풍경의 카페같은 집들이 늘어서 있다.
광해군 즉위년(1608)에 경기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면서 설립한 선혜청(宣惠廳)의 평창(平倉)이 있던 데서 평창동(平倉洞) 동명이 비롯되었다. 창동(倉洞)의 유래도 비슷한 경우가 되겠다. 선혜청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대동미의 출납을 위해 용산강에 별창(別倉), 삼청동에 북창(北倉), 옛 장용영(壯勇營) 자리에 동창(東倉), 남대문 안에 남창(南倉)을 두었다.
2016년 5월 12일 목요일
원천부원군 묘소 참배
5월 5일… 대은(大隱) 변안열(邊安烈) 장군을 찾아뵈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대은선생 행장(行狀)’ 역문(譯文)이다.
공의 휘(諱)는 안열(安烈)이요, 자는 충가(忠可)요, 호는 대은(大隱)이요, 성은 변(邊)씨라. 변씨는 본래 자성(子姓)이니 은(殷)나라 미중(微仲)의 후손이라. 미중이 송왕(宋王)에 봉(封)하여 그후 평공(平公)에 이르러 아들 어융(禦戎)이 자가 자변(子邊)이니 자손이 이로 인하여 성으로 하다.
대대로 중국 롱서(隴西)에 살았다가 변송말(汴宋末)에 바다를 건너 동으로 와서 취성(取城)에 거하니 곧 지금의 황주(黃州)라. 우리 고종(高宗) 때에 휘(諱) 여(呂)가 있어 충절로서 상장군에 재수되어 태천백(泰川伯)을 봉하였다. 그 후 휘(諱) 윤(允)은 진사로서 서해도안찰사가 되었다. 생휘(生諱) 유(宥)인데 공부의랑(工部議郞)이요. 생휘(生諱) 제(制)는 검교참지정사(檢校參知政事)이고, 행위(行諱) 눌(訥)은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요. 부인은 백(白)씨니 공에게 증조라.
생휘(生諱) 석(碩)은 문과통례(文科通禮)니 문장으로 명성이 높았고 그의 아우 순(順)은 원나라의 벼슬하여 심양후(瀋陽候)를 봉하였고 고려조에서 삼중대광문하찬성사(三重大匡門下贊成事)를 추증하였고 부인은 오(吳)씨니 공의 조(祖)라. 생휘 양(諒)은 세습하여 심양후를 봉하고 성근익조공신(誠勤翊祚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문하찬성사(壁上三韓三重大匡門下贊成事)를 겸직하였고 부인은 곽(廓)씨 공의 부모라. 원통(元統) 2년 갑술 4월 갑자일에 심양사제(瀋陽私第)에서 출생하였다.
공은 지조가 청고(淸高)하고 국량(局量)이 넓어서 문장도 능하며 무예도 뛰어나서 세상을 경륜하는 재능이 있었다. 지정(至正) 11년 신묘 정월에 18세로 무과에 장원급제한 것은 특히 재예(才藝)가 남보다 뛰어남이라. 일 년 동안에 초승(超陞)하여 형부상서(刑部尙書)가 되었다. 12월 경자(庚子)에 우리 왕대비가 원나라 노국공주로서 공민왕에게 하가(下嫁)하니 그때 공이 수장(首將)으로서 배행(陪行)하고 와서 드디어 우리 조정에 벼슬하였다.
임진에 왕의 친척인 판추밀(判樞密) 원의(元顗)의 딸과 결혼시키고 원주로 관적(貫籍)을 하사하였으니 원씨의 본관이 원주이므로 관향을 원주로 하였다. 임인(壬寅)에 안우(安祐)를 따라 홍건적을 격파하여 이등공신을 녹훈(錄勳) 받고 판소부감사(判少府監事)에 배명되었다. 조공 후 경성을 회복하니 일등공신에 녹훈하고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제수하였으며 추성보조공신(推誠補祚功臣) 호를 하사받았다.
얼마 후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되고 두 번 겸직하여 지삼사일직사사(至三司密直司事)가 되었다. 계축(癸丑) 8월에 총의용우군(總義勇右軍)이 되고, 갑인 9월에 최영과 같이 제주의 적을 토벌할 것을 정하여 판밀직사사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에 배명되었다가 평리로 전직이 되었다. 을묘에 상왕이 즉위하자 공이 원수가 되어 심왕(瀋王)을 격파한 공으로 윤충량절선위익찬공신(輪忠亮節宣威翊贊功臣)의 호를 하사받았다.
병진 9월에 양광(楊廣) 전라도도지휘부사 겸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11월에 왜적이 부령(扶寧) 행안산(幸安山)에 올라가는지라 공이 나세(羅世)·조사민(趙思敏)·유실(柳實) 등과 다같이 독전하여 적을 대파하니 참획(斬獲)한 바가 심히 많았고 첩보를 상진(上秦)하니 왕이 백금 한 덩이와 안마(鞍馬)와 의복을 하사하였다. 개선하여 돌아오자 2품 이상의 고관들이 천수문(天壽門)에 나와 굿놀이를 하며 맞이하였다. 공이 승진하여 문하찬성사가 되었다.
정사(丁巳) 3월에 경기도 총사로 재수되어 왜구를 공격할 새 4월에 왜선이 서강으로 침입하거늘 공이 최영과 더불어 격파 퇴각시켰다. 5월에 왜적을 수원 양성(陽城)에서 격파하고 8월에 문하평리(門下評理)로서 조전원수가 되어 왜적을 해주에서 격파하였다. 또 최영과 같이 왜적을 해평에서 격파하다. 경신(庚申) 8월에 왜선이 대거 침공하여 충청·전라·강원·경상도를 도살하고 인민을 살상하니 지나는 곳마다 피바다가 되어 왜적이 침략한 피해가 가장 심하였다. 왕이 이성계를 명하여 양광 전라 경상 3도의 도순찰사로 공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왜적을 운봉 인월역에서 대파하니 시냇물이 붉은 빛이 되어 6,7일이 되어도 빛이 변하지 아니하였다. 이 싸움에서 말 1,600여 필과 무기를 무수히 노획(鹵獲)하여 첩보가 상진되자 왕이 크게 기뻐하여 궁중에 큰 잔치를 베풀고 위로하였다. 10월에 개선하니 왕이 최영에게 명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채색한 누각을 설치하고 천수문 앞에서 영접하고 이성계와 공에게 황금 50냥을 각각 하사하였다.
임술 4월에 왜구가 담양을 침략하자 공이 도원수가 되어 한방언(韓邦彦)과 더불어 격파하고 8천여급을 참수하고 말 200여 필을 노획하였다. 5월에 또 한방언 등과 같이 왜구를 안동에서 격파하여 3천여 급을 참수하고 말 60필을 노확함에 훈록으로 원주부원군(原州府院君) 봉하였으며 얼마 후 판삼사사가 되었다.
무진(戊辰)에 이성계를 따라 요양 정벌에 가서 위화도에 이르러 의리(義理)를 들어 회군하였다. 6월에 상왕이 강화도로 추방되자 공이 드디어 통곡하고 두문불출하였다. 내가(牧隱) 공과 더불어 정비(定妃)의 교지(敎旨)를 받고 왕자 창(昌)을 옹립하였다. 9월에 상왕이 여흥(驪興)으로 옮기자 공이 사사로이 알현(謁見)하고 나와 더불어 상왕을 영립(迎立)할 것을 꾀하였다. 이로부터 왕실에서 믿음이 있고 조정의 명망이 심히 높았다.
이성계가 포은과 공을 초청하고 주석(酒席)을 베풀고 술을 권하여 노래하기를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성황당 뒷 담이 퇴락(頹落)한들 어떠하리
우리들이 이러하다 죽지 아니하면 또한 어떠하리’ 하니
포은이 화답하여 노래하기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하고
공이 또 화답하기를
‘내 가슴 구멍 뚫어 동아줄 길게 꿰어
앞뒤로 끌고 당겨 갈겨져 쓰라림은 네맘에
맡기련만 우리 님 빼앗는덴 내 어찌 굴할소냐’ 하였다.
기사(己巳) 11월에 대호군 김저(金佇)가 밤에 이성계의 집에 들어가서 이성계를 모해(謀害)코자 하다가 도리어 잡혀 갇힌 바가 되어 국문(鞠問)에 불복하니 이에 칼로서 발바닥을 베고 불로 지져대자 묻는데 따라 자복하였다. 이것이 구실이 되어 공이 연루되니 드디어 옥사가 이루어졌다. 이때 상왕(上王)을 강릉으로 옮기고 왕자를 강화로 추방하였다. 공양왕을 세운 공으로서 영삼사사(領三司事)에 승진(陞進)되었다. 경오(庚午)정월에 낭사(郞舍) 윤소종(尹紹宗)·이언(李彦)·오사충(吳思忠) 등이 상소하고 공에게 사형을 청하니 왕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다만 파직만 하였다. 다음 날 또 상소하니 왕이 오히려 관대히 하여 삭직(削職)하고 한양으로 유배하였다. 또 그 무렵 성문 밖에서 강도가 일어나고 궁정에 여우가 나오는 것을 변안열의 소의라고 면전에서 진달(秦達)하고 또 5차나 상소하였다.
대사헌 성석린(成石磷)이 공을 대역으로 논계(論啓) 하는지라 왕이 부득이하여 상소를 물리고 배소(配所)로 보내어 ‘국문(鞫問)을 하지 않고 사형하라.’하니 평의사가 상진하기를 ‘대신을 그 죄로 묻지도 아니하고 극형에 처함은 불가하다.’하니 왕이 좌사의(左司議) 오사충과 집의(執義) 남재(南在)에게 가서 힐문케 하니 벽재역에 이르르니 공이 이미 피화(被禍)됨을 들었다. 실은 정월 16일 경진에 피화되었다.
이에 4월에 회군의 공을 훈록할세 교서(敎書)에 말하기를 ‘변안열은 이미 죽었으나 의를 일으켜 회군하였으니 그 공을 가히 잊을 수 없다.’ 하고 녹번을 하사하고 직첩(職牒)을 환급하였으며 묘지를 하사하여 양주(楊州) 주엽(注葉)에 의관(衣冠)으로 장사(葬事)하였다.
신미(辛未) 9월에 공이 이초(彝初)의 무고(誣告)에 사연(辭連)되어 마침내 훈작(勳爵)을 삭탈(削奪)하고 가산을 적물(籍沒)하였다.
아! 공의 충열(忠烈)이 포은(圃隱)과 같으니 후인이 논하고자 하는 자는 포은에 구하면 가(可)할 것이다. 공의 배위(配位)는 진안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 원(元)씨로 3남 1녀를 낳으니 남(男)은 현(顯))이니 문과급제를 하였으며 이(頤)와 예(預)요 여(女)는 이방번(李芳蕃)에 출가하였고 손(孫)에 남녀는 70여 인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대은선생 행장(行狀)’ 역문(譯文)이다.
공의 휘(諱)는 안열(安烈)이요, 자는 충가(忠可)요, 호는 대은(大隱)이요, 성은 변(邊)씨라. 변씨는 본래 자성(子姓)이니 은(殷)나라 미중(微仲)의 후손이라. 미중이 송왕(宋王)에 봉(封)하여 그후 평공(平公)에 이르러 아들 어융(禦戎)이 자가 자변(子邊)이니 자손이 이로 인하여 성으로 하다.
대대로 중국 롱서(隴西)에 살았다가 변송말(汴宋末)에 바다를 건너 동으로 와서 취성(取城)에 거하니 곧 지금의 황주(黃州)라. 우리 고종(高宗) 때에 휘(諱) 여(呂)가 있어 충절로서 상장군에 재수되어 태천백(泰川伯)을 봉하였다. 그 후 휘(諱) 윤(允)은 진사로서 서해도안찰사가 되었다. 생휘(生諱) 유(宥)인데 공부의랑(工部議郞)이요. 생휘(生諱) 제(制)는 검교참지정사(檢校參知政事)이고, 행위(行諱) 눌(訥)은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요. 부인은 백(白)씨니 공에게 증조라.
생휘(生諱) 석(碩)은 문과통례(文科通禮)니 문장으로 명성이 높았고 그의 아우 순(順)은 원나라의 벼슬하여 심양후(瀋陽候)를 봉하였고 고려조에서 삼중대광문하찬성사(三重大匡門下贊成事)를 추증하였고 부인은 오(吳)씨니 공의 조(祖)라. 생휘 양(諒)은 세습하여 심양후를 봉하고 성근익조공신(誠勤翊祚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문하찬성사(壁上三韓三重大匡門下贊成事)를 겸직하였고 부인은 곽(廓)씨 공의 부모라. 원통(元統) 2년 갑술 4월 갑자일에 심양사제(瀋陽私第)에서 출생하였다.
공은 지조가 청고(淸高)하고 국량(局量)이 넓어서 문장도 능하며 무예도 뛰어나서 세상을 경륜하는 재능이 있었다. 지정(至正) 11년 신묘 정월에 18세로 무과에 장원급제한 것은 특히 재예(才藝)가 남보다 뛰어남이라. 일 년 동안에 초승(超陞)하여 형부상서(刑部尙書)가 되었다. 12월 경자(庚子)에 우리 왕대비가 원나라 노국공주로서 공민왕에게 하가(下嫁)하니 그때 공이 수장(首將)으로서 배행(陪行)하고 와서 드디어 우리 조정에 벼슬하였다.
임진에 왕의 친척인 판추밀(判樞密) 원의(元顗)의 딸과 결혼시키고 원주로 관적(貫籍)을 하사하였으니 원씨의 본관이 원주이므로 관향을 원주로 하였다. 임인(壬寅)에 안우(安祐)를 따라 홍건적을 격파하여 이등공신을 녹훈(錄勳) 받고 판소부감사(判少府監事)에 배명되었다. 조공 후 경성을 회복하니 일등공신에 녹훈하고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제수하였으며 추성보조공신(推誠補祚功臣) 호를 하사받았다.
얼마 후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되고 두 번 겸직하여 지삼사일직사사(至三司密直司事)가 되었다. 계축(癸丑) 8월에 총의용우군(總義勇右軍)이 되고, 갑인 9월에 최영과 같이 제주의 적을 토벌할 것을 정하여 판밀직사사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에 배명되었다가 평리로 전직이 되었다. 을묘에 상왕이 즉위하자 공이 원수가 되어 심왕(瀋王)을 격파한 공으로 윤충량절선위익찬공신(輪忠亮節宣威翊贊功臣)의 호를 하사받았다.
병진 9월에 양광(楊廣) 전라도도지휘부사 겸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11월에 왜적이 부령(扶寧) 행안산(幸安山)에 올라가는지라 공이 나세(羅世)·조사민(趙思敏)·유실(柳實) 등과 다같이 독전하여 적을 대파하니 참획(斬獲)한 바가 심히 많았고 첩보를 상진(上秦)하니 왕이 백금 한 덩이와 안마(鞍馬)와 의복을 하사하였다. 개선하여 돌아오자 2품 이상의 고관들이 천수문(天壽門)에 나와 굿놀이를 하며 맞이하였다. 공이 승진하여 문하찬성사가 되었다.
정사(丁巳) 3월에 경기도 총사로 재수되어 왜구를 공격할 새 4월에 왜선이 서강으로 침입하거늘 공이 최영과 더불어 격파 퇴각시켰다. 5월에 왜적을 수원 양성(陽城)에서 격파하고 8월에 문하평리(門下評理)로서 조전원수가 되어 왜적을 해주에서 격파하였다. 또 최영과 같이 왜적을 해평에서 격파하다. 경신(庚申) 8월에 왜선이 대거 침공하여 충청·전라·강원·경상도를 도살하고 인민을 살상하니 지나는 곳마다 피바다가 되어 왜적이 침략한 피해가 가장 심하였다. 왕이 이성계를 명하여 양광 전라 경상 3도의 도순찰사로 공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왜적을 운봉 인월역에서 대파하니 시냇물이 붉은 빛이 되어 6,7일이 되어도 빛이 변하지 아니하였다. 이 싸움에서 말 1,600여 필과 무기를 무수히 노획(鹵獲)하여 첩보가 상진되자 왕이 크게 기뻐하여 궁중에 큰 잔치를 베풀고 위로하였다. 10월에 개선하니 왕이 최영에게 명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채색한 누각을 설치하고 천수문 앞에서 영접하고 이성계와 공에게 황금 50냥을 각각 하사하였다.
임술 4월에 왜구가 담양을 침략하자 공이 도원수가 되어 한방언(韓邦彦)과 더불어 격파하고 8천여급을 참수하고 말 200여 필을 노획하였다. 5월에 또 한방언 등과 같이 왜구를 안동에서 격파하여 3천여 급을 참수하고 말 60필을 노확함에 훈록으로 원주부원군(原州府院君) 봉하였으며 얼마 후 판삼사사가 되었다.
무진(戊辰)에 이성계를 따라 요양 정벌에 가서 위화도에 이르러 의리(義理)를 들어 회군하였다. 6월에 상왕이 강화도로 추방되자 공이 드디어 통곡하고 두문불출하였다. 내가(牧隱) 공과 더불어 정비(定妃)의 교지(敎旨)를 받고 왕자 창(昌)을 옹립하였다. 9월에 상왕이 여흥(驪興)으로 옮기자 공이 사사로이 알현(謁見)하고 나와 더불어 상왕을 영립(迎立)할 것을 꾀하였다. 이로부터 왕실에서 믿음이 있고 조정의 명망이 심히 높았다.
이성계가 포은과 공을 초청하고 주석(酒席)을 베풀고 술을 권하여 노래하기를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성황당 뒷 담이 퇴락(頹落)한들 어떠하리
우리들이 이러하다 죽지 아니하면 또한 어떠하리’ 하니
포은이 화답하여 노래하기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하고
공이 또 화답하기를
‘내 가슴 구멍 뚫어 동아줄 길게 꿰어
앞뒤로 끌고 당겨 갈겨져 쓰라림은 네맘에
맡기련만 우리 님 빼앗는덴 내 어찌 굴할소냐’ 하였다.
기사(己巳) 11월에 대호군 김저(金佇)가 밤에 이성계의 집에 들어가서 이성계를 모해(謀害)코자 하다가 도리어 잡혀 갇힌 바가 되어 국문(鞠問)에 불복하니 이에 칼로서 발바닥을 베고 불로 지져대자 묻는데 따라 자복하였다. 이것이 구실이 되어 공이 연루되니 드디어 옥사가 이루어졌다. 이때 상왕(上王)을 강릉으로 옮기고 왕자를 강화로 추방하였다. 공양왕을 세운 공으로서 영삼사사(領三司事)에 승진(陞進)되었다. 경오(庚午)정월에 낭사(郞舍) 윤소종(尹紹宗)·이언(李彦)·오사충(吳思忠) 등이 상소하고 공에게 사형을 청하니 왕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다만 파직만 하였다. 다음 날 또 상소하니 왕이 오히려 관대히 하여 삭직(削職)하고 한양으로 유배하였다. 또 그 무렵 성문 밖에서 강도가 일어나고 궁정에 여우가 나오는 것을 변안열의 소의라고 면전에서 진달(秦達)하고 또 5차나 상소하였다.
대사헌 성석린(成石磷)이 공을 대역으로 논계(論啓) 하는지라 왕이 부득이하여 상소를 물리고 배소(配所)로 보내어 ‘국문(鞫問)을 하지 않고 사형하라.’하니 평의사가 상진하기를 ‘대신을 그 죄로 묻지도 아니하고 극형에 처함은 불가하다.’하니 왕이 좌사의(左司議) 오사충과 집의(執義) 남재(南在)에게 가서 힐문케 하니 벽재역에 이르르니 공이 이미 피화(被禍)됨을 들었다. 실은 정월 16일 경진에 피화되었다.
이에 4월에 회군의 공을 훈록할세 교서(敎書)에 말하기를 ‘변안열은 이미 죽었으나 의를 일으켜 회군하였으니 그 공을 가히 잊을 수 없다.’ 하고 녹번을 하사하고 직첩(職牒)을 환급하였으며 묘지를 하사하여 양주(楊州) 주엽(注葉)에 의관(衣冠)으로 장사(葬事)하였다.
신미(辛未) 9월에 공이 이초(彝初)의 무고(誣告)에 사연(辭連)되어 마침내 훈작(勳爵)을 삭탈(削奪)하고 가산을 적물(籍沒)하였다.
아! 공의 충열(忠烈)이 포은(圃隱)과 같으니 후인이 논하고자 하는 자는 포은에 구하면 가(可)할 것이다. 공의 배위(配位)는 진안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 원(元)씨로 3남 1녀를 낳으니 남(男)은 현(顯))이니 문과급제를 하였으며 이(頤)와 예(預)요 여(女)는 이방번(李芳蕃)에 출가하였고 손(孫)에 남녀는 70여 인이다.
2016년 5월 9일 월요일
공빈 김씨 모자 묘역
12차 역사문화트레킹으로 공빈 김씨 삼모자(三母子) 묘역을 답사했다.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 이혼(李琿)은 선조와 공빈 김씨의 차남으로, 정비인 의인왕후 박씨의 소생이 없던 차에 임진왜란의 발발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전란 중 임시정부 성격의 분조(分朝)를 이끌며 관민의 신망을 얻었는데, 이는 정탁(鄭琢)이 기록한 피난행록(避亂行錄)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방계승통의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선조는 말년에 계비 인목왕후 김씨가 낳은 적자 영창대군을 후계로 삼고 싶어했으나, 두 살배기 어린 아이였기에 승하 직전 할 수 없이 광해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1608년 즉위 초부터 광해군은 전후복구에 전념하였고,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또한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의 자구책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친형 임해군과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유배 후 사사하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는 실정으로 반정의 빌미를 제공하였고, 결국 능양군 이종(李倧)과 반정군에게 폐위당한 후 강화를 거쳐 제주도에 유배되어 67세(1641년)의 천수를 다했다. 어머니 무덤 발치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1643년 제주도에서 현 위치로 옮겨졌다.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에 위치한 광해군묘(사적 제363호)는 2개의 봉분(쌍분)에 각각 비석과 상석이 있고, 장명등 하나에 망주석 2개, 문인석 1쌍이 세워져 있다.
문화류씨 문성군부인의 저고리가 중요민속문화재 제215호(광해군비당의)로 지정돼 있다.
이어서 2번째 답사지는 선조의 후궁이자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 김씨의 성묘(成墓, 사적 제365호). 공빈 김씨는 광해군을 낳고 2년 후에 2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553~1577).
즉위 직후 광해군은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1610년 생모인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하고, 능호를 성릉(成陵)이라 했다. 광해군 폐위 후 시호와 능호가 모두 삭탈되어 성묘(成墓)로 강등되었으나, 추숭 당시에 만들었던 석물들은 그대로 보존되었기 때문에 여느 왕릉과 같은 외양을 볼 수 있다. 2006년에 성묘에 대한 도굴 시도가 있었으나 미수에 그친 것으로 파악됐다.
전광렬이 주연한 MBC 드라마 <허준>에서 박주미가 공빈으로 출연했었다.
진건읍의 송릉리라는 지명은 소나무가 많고 성릉이 있는 마을이라는 송릉(松陵)에서 유래되었다.
임해군 이진(李珒, 1572~1609)은 선조의 서장자이자 광해군의 친형으로 공빈 김씨 소생이다. 임란 때 근왕병을 모집하러 함경도에 갔다가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의 포로가 되어 협상 끝에 풀려났다.
방탕하고 난폭한 성격 탓에 왕세자로 책봉되지 못했다. 광해군 즉위년에는 몰래 사병을 양성하고 있으니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에 따라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 이후 이이첨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 이혼(李琿)은 선조와 공빈 김씨의 차남으로, 정비인 의인왕후 박씨의 소생이 없던 차에 임진왜란의 발발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전란 중 임시정부 성격의 분조(分朝)를 이끌며 관민의 신망을 얻었는데, 이는 정탁(鄭琢)이 기록한 피난행록(避亂行錄)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방계승통의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선조는 말년에 계비 인목왕후 김씨가 낳은 적자 영창대군을 후계로 삼고 싶어했으나, 두 살배기 어린 아이였기에 승하 직전 할 수 없이 광해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1608년 즉위 초부터 광해군은 전후복구에 전념하였고,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또한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의 자구책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친형 임해군과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유배 후 사사하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는 실정으로 반정의 빌미를 제공하였고, 결국 능양군 이종(李倧)과 반정군에게 폐위당한 후 강화를 거쳐 제주도에 유배되어 67세(1641년)의 천수를 다했다. 어머니 무덤 발치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1643년 제주도에서 현 위치로 옮겨졌다.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에 위치한 광해군묘(사적 제363호)는 2개의 봉분(쌍분)에 각각 비석과 상석이 있고, 장명등 하나에 망주석 2개, 문인석 1쌍이 세워져 있다.
문화류씨 문성군부인의 저고리가 중요민속문화재 제215호(광해군비당의)로 지정돼 있다.
이어서 2번째 답사지는 선조의 후궁이자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 김씨의 성묘(成墓, 사적 제365호). 공빈 김씨는 광해군을 낳고 2년 후에 2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553~1577).
즉위 직후 광해군은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1610년 생모인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하고, 능호를 성릉(成陵)이라 했다. 광해군 폐위 후 시호와 능호가 모두 삭탈되어 성묘(成墓)로 강등되었으나, 추숭 당시에 만들었던 석물들은 그대로 보존되었기 때문에 여느 왕릉과 같은 외양을 볼 수 있다. 2006년에 성묘에 대한 도굴 시도가 있었으나 미수에 그친 것으로 파악됐다.
전광렬이 주연한 MBC 드라마 <허준>에서 박주미가 공빈으로 출연했었다.
진건읍의 송릉리라는 지명은 소나무가 많고 성릉이 있는 마을이라는 송릉(松陵)에서 유래되었다.
임해군 이진(李珒, 1572~1609)은 선조의 서장자이자 광해군의 친형으로 공빈 김씨 소생이다. 임란 때 근왕병을 모집하러 함경도에 갔다가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의 포로가 되어 협상 끝에 풀려났다.
방탕하고 난폭한 성격 탓에 왕세자로 책봉되지 못했다. 광해군 즉위년에는 몰래 사병을 양성하고 있으니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에 따라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 이후 이이첨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2016년 5월 8일 일요일
비운의 황실 묘역
2015년 한포(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포럼) 4월 답사지는 남양주 금곡 땅…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의친왕묘(義親王墓).
의친왕 이강(1877∼1955)은 귀인 장씨의 소생으로 고종의 5남이다. 1877년(고종14)에 태어나 1891년(고종28)에 의화군(義化君)에 봉해졌다. 1899년(광무3) 미국에 유학했고, 이듬해인 1900년(광무4)에 의친왕(義親王)으로 진봉되었다. 1906년 귀국 후 대한제국 육군 부장, 대한적십자사 4대 총재 등을 역임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등 국권회복에 힘썼다. 1919년 11월 대동단 단원들과 함께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망명을 시도하였으나 단동역(丹東驛)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으로 송환되었고, 1930년에는 작위까지 박탈당했으나, 1940년 일제의 창씨개명령도 거부하였다. 광복 후 평민 신분으로 살았으며, 6·25전쟁 때에는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였다. 1955년에 안국동 사동궁에서 79세로 세상을 떠난 후에는 양주 화양리(현 성동구 화양동)를 거쳐 서삼릉 권역으로 묘소가 옮겨졌다.
1964년 궁정동 칠궁에서 85세로 작고한 의친왕비 김수덕의 묘가 홍유릉 권역 밖(현 외재실 근처)에 조성되었는데, 1996년에 서삼릉 권역의 의친왕묘와 홍유릉 권역 밖의 의친왕비묘를 이장하여 덕혜옹주묘 동쪽 땅에 합장하였다.
봉분 앞쪽에 상석·향로석이 있고, 오르내리는 다람쥐(세호)가 부조된 망주석 사이에 장명등이 세워져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비석 조차 없는 허술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황족 중 가장 항일정신이 투철하였던 의친왕의 생애를 돌아다 볼 때, 전주이씨종약원 측에 보다 꼼꼼하고 실질적인 일처리를 요구하고 싶다.
의친왕 이강(1877∼1955)은 귀인 장씨의 소생으로 고종의 5남이다. 1877년(고종14)에 태어나 1891년(고종28)에 의화군(義化君)에 봉해졌다. 1899년(광무3) 미국에 유학했고, 이듬해인 1900년(광무4)에 의친왕(義親王)으로 진봉되었다. 1906년 귀국 후 대한제국 육군 부장, 대한적십자사 4대 총재 등을 역임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등 국권회복에 힘썼다. 1919년 11월 대동단 단원들과 함께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망명을 시도하였으나 단동역(丹東驛)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으로 송환되었고, 1930년에는 작위까지 박탈당했으나, 1940년 일제의 창씨개명령도 거부하였다. 광복 후 평민 신분으로 살았으며, 6·25전쟁 때에는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였다. 1955년에 안국동 사동궁에서 79세로 세상을 떠난 후에는 양주 화양리(현 성동구 화양동)를 거쳐 서삼릉 권역으로 묘소가 옮겨졌다.
1964년 궁정동 칠궁에서 85세로 작고한 의친왕비 김수덕의 묘가 홍유릉 권역 밖(현 외재실 근처)에 조성되었는데, 1996년에 서삼릉 권역의 의친왕묘와 홍유릉 권역 밖의 의친왕비묘를 이장하여 덕혜옹주묘 동쪽 땅에 합장하였다.
봉분 앞쪽에 상석·향로석이 있고, 오르내리는 다람쥐(세호)가 부조된 망주석 사이에 장명등이 세워져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비석 조차 없는 허술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황족 중 가장 항일정신이 투철하였던 의친왕의 생애를 돌아다 볼 때, 전주이씨종약원 측에 보다 꼼꼼하고 실질적인 일처리를 요구하고 싶다.
2016년 4월 25일 월요일
태후지몽
아이들 교과서를 뒤적이다가 발견한 절창(?) 한 편…
비상교육 중등 국어5 (한철우 외 17)에 소개된 오은 시인의 <미니 시리즈>…
느닷없이 접촉 사고
느닷없이 삼각관계
느닷없이 시기 질투
느닷없이 풍전등화
느닷없이 수호천사
느닷없이 재벌 2세
느닷없이 신데렐라
느닷없이 승승장구
느닷없이 이복형제
느닷없이 행방불명
느닷없이 폐암 진단
느닷없이 양심 고백
느닷없이 눈물바다
느닷없이 무사 귀환
느닷없이 갈등 해소
느닷없이 해피 엔딩
16부작이 끝났습니다. 꿈 깰 시간입니다.
1연에 16부작 미니시리즈(miniseries)의 내용을 16행으로 행렬 배치하고, 2연에서 여운을 남기며 끝맺는 4언절구의 변형이라고나 할까.
드라마 속 작위적 상황에 대한 30대 젊은 시인의 유니크한 비꼼과 사실적인 언어유희가 통쾌하다. 재미있다.
지난주엔가 종영한 KBS 16부작 <태양의 후예>가 떠오른다.
태후지몽(太後之夢)… 저격당했다는 여심들은 꿈에서 깨어나시길…
비상교육 중등 국어5 (한철우 외 17)에 소개된 오은 시인의 <미니 시리즈>…
느닷없이 접촉 사고
느닷없이 삼각관계
느닷없이 시기 질투
느닷없이 풍전등화
느닷없이 수호천사
느닷없이 재벌 2세
느닷없이 신데렐라
느닷없이 승승장구
느닷없이 이복형제
느닷없이 행방불명
느닷없이 폐암 진단
느닷없이 양심 고백
느닷없이 눈물바다
느닷없이 무사 귀환
느닷없이 갈등 해소
느닷없이 해피 엔딩
16부작이 끝났습니다. 꿈 깰 시간입니다.
1연에 16부작 미니시리즈(miniseries)의 내용을 16행으로 행렬 배치하고, 2연에서 여운을 남기며 끝맺는 4언절구의 변형이라고나 할까.
드라마 속 작위적 상황에 대한 30대 젊은 시인의 유니크한 비꼼과 사실적인 언어유희가 통쾌하다. 재미있다.
지난주엔가 종영한 KBS 16부작 <태양의 후예>가 떠오른다.
태후지몽(太後之夢)… 저격당했다는 여심들은 꿈에서 깨어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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