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4일 수요일

크리스마스 증후군?

영어로 하면 Christmas Syndrome가 맞는 표현인 지는 모르겠으나… 크리스마스 증후군이란 게 있다고 하더군.
하여간 뭔가 설레고 들뜬 분위기로 동분서주한 성탄 시즌에 다른 이들에 비해 자신의 신세가 처량해져 상대적 박탈감이나 우울감을 느끼고 의기소침해 하는 현상을 뜻한다고 한다. 상시적인 와이미 증후군(Why me Syndrome)과도 통하는 구석이 있는 듯하다.
전반적으로 침체된 사회 분위기와 벌~써부터 주구장창 방영되는 맥컬린 컬킨의 ‘나홀로 집에’ 시리즈의 상황에 자꾸만 감정이입되어서는 곤란하다.
양지에서 광합성하는 것만으로는 온전히 넘어가기가 어렵겠지. 내일은 여행이라도 가볼까.
노~엘~ 노~엘 노~엘 노엘

2014년 12월 20일 토요일

완생을 향해 나아가는 미생

좀전에 tvN 금토드라마 미생 최종회를 본방사수했다.
시놉시스 같은 건 훑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바둑에는 문외한인지라… 처음엔 미생의 의미를 매월당 김시습이 금오신화(金鰲新話)에 등장시킨 양생(梁生)·이생(李生)·홍생(洪生)·박생(朴生)·한생(韓生)과 같이 미씨(麋氏) 성을 가진 겉보기에 번지르르한 한량이 묘령의 여인과 썸타는 얘기로 점철된 미생(麋生)인 줄 착각하기도 했다.

바둑에서 미생(未生)은 집이나 대마 등이 살아있지는 않지만 앞으로 완전히 살(완생) 여지를 지니고 있는 상태나 그 돌을 뜻한다고 한다.
‘내가 먼저 산 후 상대를 공격한다’는 의미의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도 생각나지만, 그보다는 역시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 1928~1967)의 명언과 더 부합하는 듯 하다.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엔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
Seamos todos nosotros realistas,
pero tengamos un sueño imposible en nuestro corazón.

현실을 직시하되 안주하지는 않으며 자신이 품고 있는 이상과 꿈을 향해 도전하자는 의미일 것이다. 아직은 버둥버둥하는 미생(未生)일 뿐이지만 치열하게 고민하며 버틴다는 건 어떻게든 완생(完生)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2014년 12월 18일 목요일

서울도서관 강좌 - 사대문 안과 도심 재개발

서울도서관의 ‘겨울, 이야기로 듣는 서울’ 시리즈 2번째 《사대문 안과 도심 재개발》 강좌에 다녀왔다. 매서운 날씨 때문인지 선착순 30명 모집(공공서비스예약)에 18명만 출석했다.
강연자인 노주석 서울신문 기자는 “서울 사람들은 서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라는 의문에서 「서울 택리지」(소담출판사)라는 책도 출간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서울은 수많은 역사의 부침을 겪어왔다.
서기전 18년 온조가 위례(慰禮)에 터를 잡은 이래, 고려 문종은 남경(南京)으로 승격(1067)시켰고, 숙종은 경복궁 근처에 남경행궁을 만들어 행차(1104)하기도 했다.
16세기 무렵엔 양난(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초토화됐고, 20세기에 들어서자마자 일제에 강탈당했으며, 6·25전쟁 공방의 핵심지역으로 파괴되었다. 이후 전후복구와 개발논리에 치이면서 지금과 같은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형되어 왔다.


수십 장의 사진을 차례로 보여주면서 그에 따른 설명으로 이어진 노기자의 강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1900년대 초엽에 외국인이 박았다는 광화문 육조거리의 사진이다.
광화문(光化門) 뒤편으로 웅장한 산세의 주산(主山) 백악(북악산)이 자리하고 있고, 우편으로 보현봉(普賢峰)과 삼각산(북한산)이 멀리 북방의 백두산까지 이어올라가 백두대간을 형성하고 있으며… 좌편으로는 진흥왕순수비가 서있는 비봉(碑峰)이 보인다. 그야말로 왕조의 위엄을 상징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풍수와 지세이며 조형이다. 이 한장의 사진이 서울의 어제와 오늘에 대해 참으로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서울도서관 앞에 18m짜리 대형 성탄트리가 핑크색과 보랏빛의 크리스마스 볼과 은하수 조명으로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2014년 12월 13일 토요일

위례성과 한성(풍납토성·몽촌토성)

위례성(慰禮城)에서 한성(漢城)으로…
서울은 2천년 전부터 백제의 수도였다. 백제의 첫도읍은 한강 남쪽의 위례성(慰禮城)이다. 위례성은 나중에 확대·발전하여 한성(漢城)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백제 때의 한성은 지금의 송파구와 강동구 일대이다. 좁은 의미의 한성은 정궁이 있는 북성(풍납토성)과 별궁이 있는 남성(몽촌토성)으로 구성되었다. 성 안에는 각각 궁궐과 관청, 왕족 및 귀족들의 집과 군사시설, 일반민가 등이 있었다. 넓은 의미의 한성은 두 성 바깥의 도시와 왕릉구역인 석촌동고분군 등 인근 지역(일반민가와 농경지, 각종 경제시설)을 모두 포함한다.
백제사람들은 살아서는 풍납토성·몽촌토성·삼성동통성과 그 인근 지역에서 생활하였고, 죽어서는 석촌동·가락동·방이동 등지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서울 서북쪽 경계 인근 한강변에는 멱절산유적이 있다. 백제 때 한강을 오가는 배들을 굽어보며 감시하던 낮은 야산의 보루 혹은 초소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교통로는 육상교통로와 수상교통로로 나뉜다. 백제 한성기의 육상교통로는 고구려 지역과 연결되는 북방교통로와 마한·신라·가야 지역으로 통하는 남방교통로가 있었다. 백제는 북쪽으로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했으며 남쪽으로 마한을 정복하였다. 이때 군사들은 주로 육상교통로를 이용하였다. 수상교통로는 강과 작은 하천을 이용하는 내륙수로와 바다를 이용하는 해상수로가 있다. 백제의 내륙수로에서는 한강이 가장 중요했으며 그 중심에 한성이 있었다. 한성은 백제의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다. 백제의 도읍 한성은 한반도 중앙을 가로지르는 한강변에 자리하여, 동쪽으로 북한강과 남한강으로 연결되고, 서쪽으로 서해 바다와도 연결되었다. 한강 하류의 김포·고양·하남, 상류의 가평·여주·원주 등에는 백제 한성기 유적이 널리 분포한다. 한강 북쪽의 임진강과 한탄강도 백제의 매우 중요한 교통로였다. 특히 임진강이 흐르는 파주·연천 등에서 육계토성·칠중성·강내리유적 등 백제의 주요 유적이 발견되었다.



풍납토성(風納土城)
한국과 중국의 고대 도성은 대체로 강을 끼고 있는 평지에 흙으로 성을 쌓았다. 중국의 경우에는 전국시대(475BCE~221BCE) 제나라·노나라·조나라 등의 왕성·도성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한국의 경우에는 평양의 낙랑토성, 고구려 국내성(초기), 백제 풍납토성, 신라 월성 등이 대표적이다.
한강변에 흙으로 쌓은 풍납토성(風納土城)은 서울시 송파구에 위치한다. 평지에 흙으로 쌓은 고대의 성으로는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백제의 첫 왕성(위례성)이자 도성(한성)이다. 풍납토성의 북쪽과 서쪽에는 한강이 흐르고 동쪽에는 얕은 구릉 너머로 남한산 줄기가 우뚝 솟아 있다. 남쪽으로는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삼국사기에 기록된 위례성의 위치에 대한 설명과 일치한다. 성 안의 면적은 약 878.678㎡이며, 궁궐·도로·우물·창고 등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성벽은 너비 43m, 높이 11m 이상으로 추정되며, 한강과 맞닿은 서쪽 성벽이 오래 전에 무너져서 지금은 전체 둘레 3.5㎞ 가운데 2.2㎞만 남아 있다. 1999년과 2011년, 2차례의 성벽발굴조사 결과 성벽은 3차례에 걸쳐 증축된 것으로 밝혀졌다. 증축은 성벽 안쪽만 하고, 바깥쪽은 하지 않았으며, 성벽 쌓는 기술은 지점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즉, 흙을 시루떡처럼 다져쌓는 판축법(版築法)은 모든 지점에서 확인되었으나, 흙을 쌓는 도중 나뭇가지·나뭇잎 등을 깔아두는 부엽법(敷葉法)은 몇몇 지점에서만 확인되었다.

다져넣기 : 판축법(版築法)
판축법은 흙을 시루떡처럼 층층이 다져쌓는 방식을 말한다. 성을 쌓기 전 땅을 고르기 위해 개흙을 대략 50㎝ 두께로 깔고, 그 위에 다시 모래 성분이 많은 진흙을 20㎝ 정도 깔았다. 이후 여러 종류의 진흙을 번갈아 두껍게 쌓아가며 사다리꼴의 성벽을 만들었다. 판축법은 하남성의 정주 백가장(白家莊)에서 발견된 상나라(2070BCE~1600BCE) 때의 토성에서 이미 나타난다. 백제는 이 판축법을 왜(일본)로 전하였다.

나뭇잎 깔기 : 부엽법(敷葉法)
나뭇잎 깔기는 성벽이나 제방을 쌓을 때 나뭇잎·나뭇가지·나무껍질 등을 깔고 흙을 쌓는 방식이다. 땅의 기초가 단단하지 못한 곳에서 사용하는 기술이며, 지진 등에 잘 견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풍납토성 일부 구간에서는 개흙을 10㎝ 정도 두께로 쌓은 뒤에 나뭇잎이나 나뭇가지 등을 1㎝ 정도 깔고 다시 개흙을 덮는 과정을 10여 차례 반복한 것이 확인되었다. 중국에서는 안휘성의 안풍당(安豊塘)이라는 한나라 때 저수지 제방에서 발견되었으며, 백제에서는 김제 벽골제, 부여 나성 등의 사례가 알려져 있다. 이러한 기술은 백제를 통해 왜(일본)로 전해져 큐슈의 미즈키·키쿠치죠 성벽, 오사카의 카메이·사야마이케 제방 등에 적용되었다.

성벽의 안팎에는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작은 강돌을 덮었다. 강돌은 처음 성벽을 쌓을 때와 마지막 성벽을 쌓을 때 덮었다. 처음 성벽을 쌓을 때 성벽의 중간 높이까지 강돌을 덮었는데 바깥쪽 성벽의 가장 위쪽 강돌 사이에는 큰 판석이 일정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판석 위쪽은 성벽을 가파르게 쌓아 사람이 쉽게 기어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안쪽 성벽의 마지막 성벽 바닥에는 큰 돌을 다듬어 2~3단의 축대를 정연하게 쌓았다.
발굴조사 결과 성 밖이 성 안에 비해 4m 이상 낮았다. 성 안쪽에는 좁고 얕은 도랑을 만들어 비가 올 때 물이 흐르도록 하였다.
토성의 주요 방어시설로는 성벽 외에도 해자·목책·망루·치 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풍납토성은 성벽 안쪽을 완만하게 쌓고 바깥쪽을 가파르게 쌓아 성벽을 쉽게 오르지 못하도록 하였다. 성벽 바깥쪽에 물이 흐르도록 파놓은 해자(垓子)는 매우 넓고 깊어 다리나 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성벽에 접근할 수 없다.
목책(木柵)은 성벽 바깥쪽 아래에 끝을 날카롭게 깍은 나무기둥을 울타리처럼 땅에 박아 설치한 것을 말한다. 목책을 설치함으로써 적이 쉽게 성벽에 접근할 수 없었다. 몽촌토성의 성벽 바깥쪽에서 목책이 확인되었으므로 풍납토성에도 목책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풍납토성의 동남쪽 모서리와 서남쪽 모서리는 성벽이 유독 바깥쪽으로 튀어나와 있어 치(雉)의 흔적일 가능성이 높다. 치는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옆에서 공격하기 위해 성벽 일부를 바깥쪽으로 돌출시킨 것이다.
풍납토성에는 망루(望樓)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몽촌토성·부소산성 등의 사례를 참조하면, 성벽과 내부의 높은 곳에 망루를 만들어 성 안팎의 상황이나 적의 침입 등을 감시하였을 것이다.



몽촌토성(夢村土城)
삼국사기에는 백제 근초고왕 26년(371)에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移都漢山)”고 적혀 있다. 한산은 지금의 남한산으로 추정되는데, 산줄기가 넓게 퍼져서 지금의 몽촌토성도 그 능선의 끝자락에 해당한다. 근초고왕은 왕의 권위를 나타내고 도성방어체제를 튼튼히 하기 위해 백제 첫 수도인 위례성 남쪽에 새 거처를 마련해 옮긴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북성과 남성으로 구성된 새로운 형태의 도성이 출현하였는데, 바로 한성이다. 북성은 지금의 풍납토성, 남성은 지금의 몽촌토성에 비정된다. 백제의 천도 및 멸망으로 원래 이름이 잊혀졌으며 조선시대 성 안에 곰말(꿈말) 곧 몽촌(夢村)이라는 마을이 생겼으므로 지금의 몽촌토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몽촌토성은 남한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려온 낮은 구릉의 끝 부분에 자리잡고 있는데,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이 낮다. 성벽 길이는 2,285m이고, 내부 면적은 216,000㎡(67,000평)이다. 동문과 북문 사이의 성벽 바깥쪽에는 또 하나의 작은 능선 위에 둘레 약 270m의 외성이 위치한다. 토성 바깥으로는 성내천이 몽촌토성의 동남쪽 부근에서 토성의 동벽을 따라 북쪽으로 흐른 다음, 다시 북벽을 따라 서쪽으로 흘러 한강 본류에 합류함으로써 자연적인 해자가 되었다. 몽촌토성에서 남쪽으로 약 1~2㎞ 거리에 석촌동·가락동·방이동고분군이 위치한다.
성벽은 자연구릉 가운데 낮은 지점만 흙을 덧쌓아 연결하고 높은 지점은 깎아내리도록 하였다. 성문은 남문지, 동문지, 북문지가 발견되었고, 서북쪽과 동북쪽 성벽, 그리고 외성에는 성벽의 바깥쪽 면에 목책을 세운 흔적이 있다. 몽촌토성 내부에서는 백제 한성기의 적심석을 갖춘 지상건물터, 움집터, 저장구덩이, 연못터 등이 조사되었다.
출토 유물로는 3세기 중후반 이후의 토기류, 칼·화살촉 등의 철제 무기류, 뼈로 만든 갑옷, 금동제 허리띠 장식, 동전무늬 도기를 비롯한 중국제 청자 등이 있다. 몽촌토성을 쌓고 사용한 시기는 대략 3세기말~5세기말경으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3세기말이라는 추정은 성벽의 퇴적토층에서 동전무늬 도기조각이 수습된 점에 근거한 것이어서 재검토 여지가 있다. 일부 유물이 전세품(傳世品)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몽촌토성이 실제 성으로서 쓰인 것은 4세기 이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2014년 12월 11일 목요일

한문 학습의 필요성

제64차 평생교육사 목요회(2014.12.4)는 ‘한문학습의 필요성’ 강의로 진행되었다.
현직 고교 한문교사인 후말(後末) 김경진 선생님에 따르면 한자·한문교육은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며 나아가 미래를 답보하는 한가지 방법이 된다. 때문에 학교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한문공부의 필요성을 이해시키기 위해 몇가지 방법을 동원하는데… 자전(字典) 찾는 방법을 숙지시키고, 호(號) 짓는 방법도 알려주면 아이들이 재미있게 한문학습에 친숙해진다고 한다.
목요회 강의에서도 호(號)와 그에 관련된 흥미있는 사례가 소개되었다.

号 + 虎(범 호) : 범(虎)의 울음소리처럼 이름을 우렁차게 부르짖으니(号) 이름 호(號), 부르짖을 호.
사람이 본 이름(本名)이나 자(字) 이외에 허물없이 부를 수 있도록 지은 이름인 호(號)는 자신이 짓기도 하고, 남이 지어 부르기도 했다. 이규보(李奎報)는 「백운거사어록」(白雲居士語錄)에서 호를 짓는 4가지 방법을 언급하였는데… 거하거나 인연 있는 장소로 호를 삼는 소처이호(所處以號), 이루고자 하는 뜻으로 호를 삼는 소지이호(所志以號), 처한 환경·여건을 호로 삼는 소우이호(所遇以號), 좋아하거나 간직하는 것으로 호를 삼는 소축이호(所蓄以號)가 그것이다.
아호(雅號)는 시·문·서·화의 작가들이 사용하는 우아한 이름이라는 의미이고, 별호(別號)는 본 이름 이외의 이름이라는 뜻으로 보통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성격이나 용모 또는 특징을 따서 지어 부르는 별명과 같은 것이다.
당호(堂號)는 ‘당우(正堂과 屋宇)의 호’를 말함이나, 이것이 그 집에 머무는 사람을 일컫게도 된 것이다. 김시습의 매월당, 신인선의 사임당, 정약용의 여유당 등이 있다. 택호(宅號)는 어떤 이름 있는 사람의 가옥 위치를 그 사람의 호로 부르는 것으로 ○○대감댁·김선생님댁 등으로 불렀으며, 출가한 여인에게는 친정의 지명을 붙여 나주댁·하동댁·전주댁·강릉댁 등으로 불렀다.
시호(諡號)란 벼슬한 사람이나 관직에 있던 사람이 죽은 뒤에 그 행적에 따라 왕(王)으로부터 받은 이름을 말한다.
김정희(金正喜)는 추사(秋史) 등 무려 503개 호가 있었다고 한다.


무작정 따라갈 이유는 없지만 강남구에 소재한 초등학교에서는 강남교육지원청의 지도 아래 이미 2008년부터 한자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한자는 보다 풍부한 한국어를 구사하기 위한 기본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 어휘의 70% 이상이 한자어이고, 학문언어 영역으로 옮겨가면 90%가 한자어이다. 때문에 한자어를 이해하지 못하고선 온전한 학습을 이루어 나가기가 힘들다.
한글 어휘를 빼고 한자만 적는 혼용(混用)에는 반대하지만, 교과서의 주요 어휘에 한글과 한자를 병기(倂記)하는 것은 고려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2014년 12월 7일 일요일

허니버터칩 단상

오늘 기말대비 주말보강에 중딩 1학년 한 녀석이 해태제과 허니버터칩(honey butter chip)을 가져와 맛을 봤다.
미국산 감자에 국내산 아카시아꿀, 12시간의 발효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는 프랑스산 고메버터가 시즈닝된 유탕처리 과자제품으로 60g(345㎉) 짜리 한 봉지가 1,500원이다.
해태제과에서는 원주 문막공장을 풀가동하고 있다는데 물량 부족으로 전국 곳곳에서 품귀현상이 나타나고, 공정위도 끼워팔기와 관련하여 인질마케팅 여부를 조사하겠다고 밝히는 등 연일 뉴스메이커로 오르내리고 있다.


요며칠 감기로 입맛이 없는데… 먹어보니 맛도 괜찮다. 기존의 짭짤하고 자극적인 감자칩이 아닌 달콤하고 고소한 식감이다. 중1 아이들 이번 기말 범위인 경제 단원의 희소성이나 수요·공급법칙 내용에도 부합하여 설명하기도 좋다. 농심이나 오리온, 롯데제과 같은 대기업에서 미투제품 출시를 생각해봄직 하지만 아직은 대응이 없는 거 같다. 몇몇 음모설까지 나도는 듯하나, SNS를 기반으로 한 바이럴마케팅의 성공사례임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하얀국물 열풍을 촉발한 팔도 꼬꼬면의 사례를 뛰어넘을 수 있을런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팍팍한 우리 삶도 허니버터(honey butter)처럼 조금은 달콤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