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31일 목요일

단풍의 이유

시월의 첫날, 임시공휴일에 소요산 자재암에 올랐었다. 원효와 요석공주의 옛일을 떠올리거나, 국가 보물로 지정된 「반야심경」 언해본을 만나거나, 한가로이 슬슬 거닐며 소요(逍遙)할 생각으로 산행에 나선 것이 아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동두천의 옛 성병관리소를 보존하고자 애쓰는 분들과 잠시나마 함께하기 위해 몇몇 지인과 미리 날을 잡았었다.

그동안 동두천시는 모두가 잠든 새벽시간에 궤도굴삭기를 동원하여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쪽으로 돌아서 진입을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철수했고, 철거를 지지하는 관제데모를 동원하기도 한 모양이다. “미국이 도와줘서 한국이 10대 경제대국이 된 것이다. 그래서 성병관리소는 철거되어야 한다.”고 발언했다(공대위 전언)는 시의장의 속내는 차라리 솔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옛 성병관리소의 평화적 전환과 활용을 지지하는 이들의 “당시엔 달러벌이 애국이고, 지금은 감추고픈 수치인가”란 피켓문구가 상황을 요약해 준다.

지난 구월에 만난 남악의 金선생은 공무원=禁治産者로 규정해서 나를 놀래켰었다. 저 선홍색 조끼 입은 사람들의 무지하고 막지한 죄과를 어이해야 할까. 홉스의 말대로 국가는 거대한 폭력, 리바이어던이다.

이 가을에 한 번이라도 타오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하다. 내내 가슴이 시퍼런 이는 불행하다. 단풍잎들 일제히 입을 앙다문 채 사색이 되지만, 불행하거나 불쌍하지 않다. 단 한 번이라도 타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너는 붉나무로 나는 단풍으로 온몸이 달아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사랑도 그와 같아서 무작정 불을 지르고 볼 일이다. 폭설이 내려 온몸이 얼고 얼다가 축축이 젖을 때까지, 합장의 뼈마디에 번쩍 혼불이 일 때까지. ―이원규, 「단풍의 이유」


2024년 10월 28일 월요일

사난살주 (live, alive and life)

다큐공연 「사난살주」를 관람하고 있다. 극의 제목 ‘사난살주’는 “살아 있으니 살아간다”는 뜻의 제주 방언이라고 했다.

1부의 타이틀(국가는 우리에게)이 ‘억장’이다. 3m짜리 장(丈, 10척)이 1억개나 쌓인 높다란 억장지성(億丈之城, 30만㎞)이 무너지는 슬픔과 아픔이라니… 참척의 비통을 겪은/겪고 있는 남겨진 사람에게는 그냥 죽지 못해 산다, 마지못해 행한다로 다가올 법하다.

객석 곳곳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연극도 아니고 안연극도 아닌 이상한 것이 보는이의 가슴을 후빈다. 4·3의 따님, 5·18의 동생, 4·16의 아버지, 10·29의 어머니와 그 이웃들이 이렇듯 지성(至誠)을 드리니, 너그러이 받으사 이제 고만 감천(感天)하시고 정의를 세워 눈물을 닦아 주시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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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 참사의 아픔 보듬은 연극 「사난살주」
아픔 딛고 무대 오른 유족, 뜨거운 마음으로 연대한 이웃

제주 4·3과 광주 5·18, 4·16 세월호와 10·29 이태원 참사의 아픔을 다룬 다큐멘터리 연극 「사난살주(live, alive and life)」가 28일(월) 오후 정동 프란치스코회관 1층 성당에서 막을 올렸다.
극의 제목 ‘사난살주’는 “살아 있으니 살아간다”는 뜻의 제주 방언이다.

1부 억장(億丈)은 김은숙 배우가 4개의 에피소드를 이어주는 역할을 맡아 극을 인도해 나갔다.
제주 4·3은 현애란 배우가 고영일·강순옥(부모) 희생자의 애달픈 이야기를, 광주 5·18민주화운동은 김호준 배우가 국민학교 4학년 전재수(형) 희생자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4·16 세월호 참사 이야기는 단원고 2학년 문지성 학생의 아버지 문종택氏가, 10·29 이태원 참사 이야기는 문효균氏의 어머니 이기자氏를 대신하여 성가소비녀회 조진선(안나) 수녀가 자식을 잃은 참척의 고통을 들려주었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아파하는 유족들의 울음 섞인 하소연에 객석에서는 흐느낌과 함께 뜨거운 연대의 박수가 쏟아졌다.

<>29일 오후 정동 프란치스코회관 1층 성당에서 제주4·3, 광주5·18, 4·16세월호, 10·29이태원 참사를 다룬 연극 「사난살주」가 상연되었다. 왼쪽부터 김호준 배우, 문종택 아버지, 김은숙 배우, 조진선 수녀, 현애란 배우

2부 감천(感天)은 하늘을 감동시켜 이땅에 정의와 평화가 넘치게 만들고픈 소망을 담아 대화를 나누는 시간으로 마련됐다.
연극을 기획하고 연출한 방은미(요한네스)氏는 “주님만을 섬기고 사람을 도우라 하신 기도가 이 연극을 만들게 했다”면서 “연극을 통해 바치는 기도가 학살과 참사로 별이 되신 분들과 그 가족분들께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공연 후에는 2022년 이태원 참사 당시 첫 구조요청 시간인 오후 6시 34분에 맞춰 묵주기도가 이어졌고, 7시에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주관하는 10·29 이태원 참사 2주기 추모미사가 봉헌됐다. 이날 미사 중에는 참사 희생자 159명의 이름이 불려졌다.

<>29일 오후 정동 프란치스코회관 1층 성당에서 「사난살주」 공연이 끝난후 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수녀, 배우, 유족, 청중이 연대의 마음으로 사진 촬영하고 있다.

2024년 10월 21일 월요일

파주삼릉 탐방

지난 9월말 파주 홍원연수원으로 워크숍을 갔었다. 200m 거리에 파주삼릉(坡州三陵)이 있었는데, 이번 기회가 아니면 교통 등의 여건상 다시 찾아오기 어렵겠다고 판단했다. 욕심을 내어 아이스브레이킹 시간에 살짝 빠져나와 50분 정도 나홀로 탐방을 나갔다.


파주 삼릉은 능역 왼편부터 공릉, 순릉, 영릉이 있는 곳이다.

공릉(恭陵)은 8대 예종의 세자빈이었던 장순왕후 한씨의 묘로 조성되었다. 무석인이 없고, 지형 문제로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참도는 ㄱ자로 꺾여 있다.

순릉(順陵)은 9대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 한씨의 단릉이다. 공혜왕후는 세조의 장자방 한명회의 넷째딸로 셋째딸인 장순황후와 자매지간이다.

영릉(永陵)은 21대 영조의 맏아들인 효장세자(진종)와 며느리 효순현빈(효순황후) 조씨의 묘로 조성되었다. 이후 양자인 정조가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하고 순종이 다시 진종소황제·효순소황후로 추존하였다. 세자묘로 조성된 이후 추존될 때마다 표석을 세웠기 때문에 영릉에는 비각 2동에 3기의 표석이 남아있다. 각 표석 전면에는 △조선국 효장세자묘 효순현빈 부좌 △조선국 진종대왕 영릉 효순왕후 부좌 △대한 진종소황제 영릉 효순소황후 부좌…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전체적으로 파주삼릉은 크게 눈여겨볼 것은 없었다. 다만 당대의 척신 한명회가 수양대군을 왕위에 올리고, 정희왕후 윤씨와 결탁하며 예종과 성종의 장인으로 국정을 농단하다가 마침내 탄핵당한 옛일을 떠올리며 현 시국과 겹쳐본다. 한명회가 갈매기(鷗)를 길들이며(狎) 소일했던 한강 남쪽의 압구정(狎鷗亭)은 오간 데 없고 지금은 압구정 현대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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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순릉·영릉이 모인 파주삼릉 걸어보자.

추존 진종의 영릉은 비각 2동에 표석 3기 세워

http://www.k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425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에 있는 파주삼릉(坡州三陵)은 공릉·순릉·영릉이 모여 있어 ‘공순영릉’이라고도 부른다.

가장 왼편의 공릉(恭陵)은 조선 8대 예종이 세자(해양대군)였을 때 세자빈이었던 장순왕후 한씨의 단릉이다. 장순왕후는 세조의 장자방 ‘한명회’의 셋째딸이다. 1461년(세조7)에 원손 인성대군을 낳았으나 얼마 후 숨을 거둬 묘소를 장순빈묘(章順嬪墓)라 불렀다. 이후 1470년(성종1) 장순왕후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공릉이라 하였다.

공릉은 세자빈의 묘로 조성되었기에 능침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석상(혼유석), 석양과 석호 각 1쌍만 배치하여 간소한 모습이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향로와 어로는 지형에 맞게 조성하여 한 번 꺾여있다.

<>공릉(恭陵)은 조선 8대 예종의 원비인 장순왕후(1445∼1461)의 무덤이다. 장순왕후는 한명회의 딸로 1460년에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이듬해 죽었다. 처음에 왕후릉이 아닌 세자빈 무덤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병풍석, 난간석, 망주석은 없다. 다만 양석과 둘레돌을 둘러 무덤을 보호하게 하였다.

가운데의 순릉(順陵)은 9대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 한씨의 단릉이다. 공혜왕후는 ‘한명회’의 넷째딸로 공릉에 안장된 장순왕후의 동생이다. 1467년(세조13) 잘산군(성종)과 혼인하여 천안군부인에 올랐고,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공혜왕후는 1474년(성종5) 소생 없이 창덕궁 구현전에서 19세로 세상을 떠났다. 중전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기에 능침이 왕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우편의 영릉(永陵)은 21대 영조의 장자인 효장세자(진종)와 효순현빈(효순황후) 조씨의 쌍릉이다. 효장세자는 1728년(영조4) 창경궁 진수당에서 10세로 세상을 떠났다. 훗날 이복동생인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효장세자의 양자로 들어가 왕위를 이으면서 진종(眞宗)으로 추존되었다. 이어서 대한제국 시기인 1908년(융희2)에 다시 진종소황제(眞宗昭皇帝)로 추존되었다.

영릉에는 두 비각에 3기의 표석이 남아있다. 이는 진종이 왕과 황제로 추존될 때마다 표석을 새로 세웠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효장세자묘, 두 번째는 진종대왕 영릉, 세 번째는 진종소황제 영릉의 표석이다.

파수삼릉은 숲길을 따라 산책하듯 둘러보면 60분 정도 소요된다.

<>파주 영릉(永陵)에는 비각 2동에 3기의 표석이 남아있다. 이는 세자 시절에 세상을 떠난 진종이 왕과 황제로 추존될 때마다 표석을 새로 세웠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효장세자묘, 두 번째는 진종대왕 영릉, 세 번째는 진종소황제 영릉의 표석이다.

2024년 10월 7일 월요일

장미꽃 없는 장미동

 2019년 가을, “장미꽃 없는 장미동”이란 타이틀로 군산 원도심 답사를 진행했었다. 지난 토요일에 가보니 그사이 장미동(藏米洞)에 장미꽃(薔薇花)을 심어놨더라.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짜놓은 대로 ①뜬다리 부두 ②조선은행 군산지점 ③군산근대역사박물관 ④조선식량영단 군산출장소 ⑤군산세관 본관·창고를 둘러보았다. 빠듯한 일정상 장미동의 △舊18은행 군산지점 △舊미즈상사는 둘러보지 못해 아쉽다. 조선은행의 함석지붕은 녹이 슬었는데,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호명되고 이런저런 건축적 기법과 복원의 과정이 소개되었다. 5년 전과 비교했을 때 가장 큰 변화를 보인 것은 조선식량영단 군산출장소 건물이었다. 외벽의 색채부터 하늘색에서 노란 계통으로 바뀌어 있었다.


건축을 주제로 한 답사여서 째보선창이나 짬뽕, 화교, 적산 이야기는 물을 수 없었다. 채만식의 장편 「탁류(濁流)」의 배경이 군산 원도심이다. 90여 년 전 소설 속 정초봉과 고태수가 걸었을 해망로는 차들이 제법 통행한다. 원도심에선 아직도 멍멍이 4종을 캐릭터로 밀고 있는 모습이다. ‘쌀(수탈)’이나 ‘월명(月明)’ 등을 내세운 군산만의 독특한 지역브랜드를 보고 싶다. 일제의 (쌀)수탈의 현장과 우리의 전통문화를 삭제하고 일본제국의 왜색문화를 이식하려 한 흔적을 겉핥기라도 들여다보려면 적어도 1박2일은 돌아봐야 한다.


<>군산 나포면 서포리 ‘옹고집쌈밥’에서 점심을 먹었다. 폐교된 서포초등학교를 개조한 식당이다. 교사 앞에 옥색 동상이 있는데, 하단에 “반공소년 이승복”이라 음각돼 있다.


<>구 조선식량영단 군산출장소


<>‘인문학창고 정담’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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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내셔널트러스트… 군산 원도심 현장답사

‘헤리티지 오픈하우스’로 건축 시간여행

http://www.k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424


한국내셔널트러스트(이사장 조명래)는 10월5일(토), 과거와 현재를 잇는 건축 복원 기술 현장답사 ‘헤리티지 오픈 하우스(Heritage Open house)’ 군산편을 진행했다.

이날 답사는 송석기 교수(군산대 건축공학부)와 이창배 소장(제이엠 건축사사무소)이 맡아 안내했다. 군산 원도심의 몇몇 답사지를 좇아본다.


① 군산 내항 뜬다리 부두(부잔교)

‘뜬다리 부두’라는 별명을 가진 부잔교는 물에 뜰 수 있는 부체를 길게 연결하여 배가 정박할 수 있도록 만든 구조물이다. 간조와 만조의 수위 변화와 무관하게 대형 선박을 접안시키기 위해 조성하였다. 군산항의 제3차(1926~1932)와 제4차(1936~1938) 축항공사를 통해 6개의 부잔교가 설치되었는데, 현재는 3개만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해마다 쌀수확량의 절반가량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그중 25%인 220만석 정도가 군상항을 통해 나갔다고 한다.

부잔교는 영화 「타짜」(2006)에서 고니(조승우 扮)가 아귀(김윤석 扮)와 한판을 벌이기 위해 건넜던 다리로 등장한다.


②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일제강점기에 식민지 경제수탈을 지휘했던 조선은행의 군산지점이 있던 곳이다. 1909년 대한제국의 국책은행인 舊 한국은행이 병합 이후 조선은행으로 개칭되어 조선총독부의 직속 금융기관 역할을 담당했다.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가 설계하여 1922년 준공한 건물은 외벽에 붉은 벽돌과 대리석을 사용하였다. 정면에 돌출 현관을 중심으로 평아치를 5개 세우고, 양쪽에 각각 1개씩 반원형 아치를 두었으며, 외벽 중간 보머리를 상징하는 화강석을 끼워 장식하였다.

광복 후에는 한일은행 군산지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한때는 민간으로 넘겨져 나이트클럽 등으로 변용되어 내부 구조가 많이 바뀌고 화재를 겪기도 했다. 2008년 보수·복원 과정을 거쳐 현재 군산 근대건축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채만식의 장편 「탁류(濁流)」(1937~38)에서 정초봉의 남편 고태수가 근무했던 ××은행이 이곳 조선은행 군산지점이다.


③ 군산근대역사박물관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은 과거 무역항으로 해상 물류·유통의 중심지였던 옛 군산의 모습을 보여주고, 근대문화 자원을 전시하는 곳이다. 박물관 건물은 1920년대 근대도시 이미지를 형상화해 설계한 것으로, 2010년 공공디자인 부문 우수디자인상을 수상했다. 로비에 들어서면 왼편으로 1912년 어청도에 축조된 하얀색 등대 모형을 볼 수 있다. 1층은 해양물류역사관, 2층은 옥구농민항일항쟁 기념전시실, 3층은 근대생활관으로 관람객을 맞는다.


④ 구 조선식량영단 군산출장소

중일전쟁 이후 일제가 종합적인 식량관리통제 시스템으로 설립한 조선식량영단의 군산출장소 건물이다. L자형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은 초기 양식주의에서 모더니즘 경향을 일부 보여주는 과도기적 특징을 나타낸다. 미곡수탈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건물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

영화 「화려한 외출」(2007)에서 강민우(김상경 扮), 박신애(이요원 扮), 강진우(이준기 扮)가 함께 영화를 보던 문화극장으로 등장했다.


<>5일 낮, 2024년 ‘헤리티지 오픈하우스’ 군산편 참가자들이 ‘舊 조선식량영단 군산출장소’ 건물을 돌아보고 있다.(사진=김금호)


⑤ 구 군산세관 본관, 창고

수출입 세관업무를 보도록 설치한 군산세관의 청사 건물로 순종 때인 1908년에 완성되었다. 설계자는 독일인 건축가로 알려졌는데, 물고기 비늘모양의 슬레이트 지붕 위에 3개의 첨탑이 솟아 있다. 현재 호남관세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창고 건물은 2018년 ‘인문학창고 정담’ 카페로 재탄생하였다.


<>10월5일, 2024년 ‘헤리티지 오픈하우스’ 군산편 참가자들이 ‘인문학창고 정담’에서 질의응답 시간을 갖고 있다.(사진=김금호)


이날 답사 참가자들은 카페 정담에서 차와 커피를 나누며 △우리 곁에서 생생한 역사를 간직한 문화유산은 과거로부터 수리와 복원을 거친 시대적 산물이며 △복원이란 단순히 과거의 건축물을 재현하는 작업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문화적, 역사적 가치를 되살리는 과정이 돼야 함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건축답사 프로그램을 마무리했다.


2024년 ‘헤리티지 오픈하우스’ 프로그램은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 주최하고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위탁주관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2024년 10월 4일 금요일

프란치스코(아씨시)와 토마스 아퀴나스

작가 G.K. 체스터튼(Chesterton)은 전기에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St. Francis of Assisi, 1182~1274)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Saint Thomas Aquinas, 1225~1274)를 이렇게 비교하고 있다.

성 프란치스코는 여위고, 날씬하며, 실같이 가냘프고 활의 줄같이 진동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일평생은 돌진과 질주의 연속이었다. 거지를 뒤쫓아가고, 벌거벗고, 수풀 속으로 뛰어들고, 낯선 배에 올라타는가 하면, 회교군주의 천막 속에 덤벼들었고, 불 속에 투신할 것을 자청하기도 했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줄기만 앙상한 나무에 매달려 바람 앞에서 끝없이 춤추는 가을잎 같았다. 그러나 사실은 바로 그 자신이 바람이었다.

반면에 성 토마스는 비대하고 육중한 황소같은 사람이었다. 비만하고 동작이 느리고 과묵했다. 지극히 온화하고 관대하였으나, 별로 사교적은 아니었다. 때때로 경험하지만 깊이 숨겨온 황홀상태나 무아지경은 그만두고라도, 그는 뭔지 모호해 보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갑자기 그가 나타났을 때는 성직자들까지도 그를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성 토마스는 그가 늘 다니던 학교의 학자들까지도 저능아라고 생각할 정도로 우둔했다. 참으로 그는 자기의 꿈을 적극적이고 활발한 사람들에게 침해당하기보다는 오히려 자기가 저능아로 알려지기를 원하는 학생같았다.

성 프란치스코의 패러독스가 시에 대해서는 흥미를 가지면서도 서적에 대해서는 불신했던 것이라면, 성 토마스가 책을 사랑하고 책으로 살았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그는 「캔터베리 이야기」 속에 있는 성직자 혹은 학자들과 똑같은 생활을 했으며, 이 세상의 어떤한 재물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1백권의 책과 그 철학을 소유하기를 원했다. 신에게 무엇에 대해 가장 많이 감사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한 마디로 “내가 지금까지 독서한 모든 페이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오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절대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에 대한 모든 세세한 구분과 연역(演繹)을 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 폴 데이비스 저, 류시화 역, 「현대물리학이 발견한 창조주」, 정신세계사,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