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9일 화요일

恩光衍世(은광연세)… 은혜의 빛이 온세상에 퍼지다

우리 역사 속 이름을 남긴 여성들 ②김만덕

양인에서 기녀로, 존경받는 만덕할망으로

http://www.k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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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문해 중학과정 사회 3학년 교과서는 ‘Ⅳ-3. 역사 속 여성들의 생활’ 단원에서 우리 역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 4人의 삶을 소개하고 있다. 이 단원은 역사를 빛낸 여성들의 삶이 우리와 무엇이 달랐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두번째 인물은 신사임당이다.

김만덕(金萬德, 1739∼1812)은 영조 때 아버지 김응열과 어머니 고씨의 2남1녀 중 막내딸로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양가집 출생이었지만, 12세가 되던 1750년(영조26)에 전국을 휩쓴 기근과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고 제주목 기녀의 수양딸로 맡겨졌다. 교방에서 노래와 춤, 거문고를 배우고 18세 때 기적에 올라 나중에는 기녀의 우두머리인 행수기녀가 되었다.

이후 생활에 여유가 생기자, 김만덕은 22세 무렵 “본래 양가 출신으로 부모를 잃고 가난으로 부득이 기녀가 되었으니 다시 양녀(良女)로 환원시켜 달라”고 탄원하였으나 거부당했다. 그래도 뜻을 굽히지 않고, 제주목사 신광익과 제주판관 한유추를 찾아가 거듭 호소하여 24세(영조38)에 기어코 양인 신분을 회복하였다.

결혼하지 않고 제주목 동문 밖에 객주를 차린 김만덕은 말총·미역·전복·양태·우황 등 제주의 특산물을 육지에 내다 팔고 육지에서는 제주도의 수요품을 사들여 되파는 뛰어난 상술로 50대에 들어서 육지의 대부호 못지않은 거상으로 성장하였다.

김만덕이 50대 초·중반이던 1790년(정조14)부터 1794년(정조18)까지 수년간 계속된 흉년으로 수천 명의 사람이 죽음으로 내몰렸다. 만덕은 제주 관덕정에 큰 솥을 걸고 손수 죽을 쑤어 많은 사람들을 구제했다. 1795년, 조정에서 구호미를 보냈지만, 바다를 건너 오는 도중 수송선이 침몰했다. 이 소식을 들은 만덕은 자신이 모은 전 재산 1천금을 털어 육지에서 쌀과 곡식 500여 석을 사들였다. 이중 십분의 일은 자신의 친족을 살리고, 450여 석은 제주목 관아에 진휼미로 기부하였다. 관아에 쌀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굶주린 사람들이 김만덕을 칭송하며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채제공은 「만덕전」에서 “정조 20년 6월 6일 만덕이 천금을 내어 쌀을 육지에서 사들였다. 모든 고을의 사공들이 때맞춰 이르면 만덕은 그중 십분의 일을 취하여 그의 가족을 살리고 그 나머지는 모두 관가에 실어 날랐다.”고 기록했다. 정부의 공식기록인 「일성록」에도 “노기 만덕은 스스로 원하여 쌀 3백 석을 바쳤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제주목사의 보고로 만덕의 선행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조는 기특하게 여겨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전하였다. 이에 김만덕은 한양에 올라가 궁궐을 보고, 금강산을 유람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아뢰었다. 당시에는 출륙금지령으로 제주 사람은 섬 밖으로 함부로 나갈 수 없었다. 또한 평민 신분의 만덕이 임금을 알현할 수 없었기에 벼슬을 받아야 했다. 만덕은 내명부나 외명부 어디에도 속한 여인이 아니었기에 정조는 내의원의 의녀반수(醫女班首)라는 명예직을 제수하고 예궐을 허락하였다. 1796년 58세의 만덕은 한양으로 올라가 정조에게 직접 벼슬을 받고, 효의왕후에게 상을 받은 뒤 정조의 배려를 받아 이듬해 봄 금강산에 들어가 1만2천봉의 장관을 돌아보았다.

김만덕은 이 과정에서 반년가량 한양에 머물면서 채제공, 이가환, 박제가, 정약용 등 많은 문인을 만나 교류하였는데, 만덕을 송별하며 지은 시문이 한 권의 첩으로 만들어질 정도였다. 금강산 관광 후 만덕은 벼슬을 내놓고 제주도로 돌아갔다. 김만덕은 평생 독신으로 자선사업을 계속하여 온 도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만덕할망”이라 불리다가 1812년(순조12) 73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김만덕은 고으니모루(현 국립제주박물관 정문 앞 부근)에 묻혔다가, 일주도로 확장에 따라 1977년 정월 제주시 건입동 소재 모충사 경내의 묘탑 아래에 이묘되었다.

1840년(헌종6) 제주에 유배를 온 추사 김정희는 김만덕의 선행에 큰 감명을 받아 ‘은광연세(恩光衍世, 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퍼지다)’라는 편액을 써서 칭송하였다. 제주도는 1980년부터 매년 김만덕의 기일(10월 22일)에 가까운 일요일, 건입동 사라봉 모충사에서 ‘만덕제’를 봉행하고 ‘김만덕상’을 시상해 오고 있다. 또한, 김만덕의 나눔과 봉사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5년 5월, 김만덕기념관을 건립하였다.

김만덕은 2007년 5만원 위인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2010년 KBS 1TV의 특별기획 드라마 「거상 김만덕」에서 배우 이미연(아역 심은경)이 시대의 한계를 극복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열연했다.


2024년 11월 17일 일요일

처벌의 평등

제가 예전에 이영준 신부님께 이런 질문을 드린 적이 있어요. “신부님께서 바라는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그랬더니 신부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어요. “하느님을 찾지 않는 세상이라고요.” 그 속뜻이 뭐냐면 약자들이 약자임을 깨닫지 않고 하느님을 찾지 않는 세상, 결국 세상의 모든 성직자들이 실업자가 되길 바라신 거더라고요. 이런 세상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세상이 되려면 우리 모두가 평등해야겠죠. 평등의 종류는 매우 많은데 그중에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평등은 바로 ‘처벌의 평등’이에요. 힘이 있는 사람이든 힘이 없는 사람이든 똑같은 죄를 지었으면 똑같이 처벌을 받아야지 왜 힘에 따라 처벌의 양이 다르냐고~!

―김해일(미카엘) 신부 강론, 「열혈사제Ⅱ」 중에서


2024년 11월 15일 금요일

「서울트립: 돈의문에서 청량리까지」 공유워크숍

「서울트립: 돈의문에서 청량리까지」 공유워크숍 개최

동대문문화재단-종로문화재단, 지역문화자원 교류·연계사업 확장

http://www.k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447


동대문구와 종로구가 협력하여 추진해 온 「서울트립: 돈의문에서 청량리까지」(이하 서울트립)의 사업결과를 공유하는 워크숍이 열렸다.

동대문문화재단(대표이사 김경욱)과 종로문화재단(대표이사 김승모)은 서울시자치구문화재단연합회의 ‘교류·연계콘텐츠 특성화사업’에 선정되어 두 지역의 사회적·문화적 자원을 발굴해 지역문화사업으로 연계하는 「서울트립: 돈의문에서 청량리까지」를 올해 5월부터 11월까지 6개월간 기획·운영했다.

14일(목) 오후, 서울한방진흥센터 3층 다목적강당에서 열린 공유워크숍은 1,2,3부로 나눠 진행됐다.

1부에서는 동대문문화재단이 「서울트립」 사업을 소개하고 협력과정 및 협력구조와 추진배경, 사업범위 등을 발표했다. 동대문문화재단은 올해 구축한 협력 네트워크를 발판으로 개발한 콘텐츠를 확장·지속해 나가면서 다양한 연계사업을 이어나갈 예정이다.

<> 14일 오후, 동대문문화재단 사업담당자가 「서울트립」 공유워크숍에서 동대문-종로의 역사적·문화적 연결성 발견과 전문성 강화를 위한 협력 과정을 발표하고 있다.

2부 순서에는 모씨네사회적협동조합(대표 전철원)이 동대문과 종로가 과거부터 교통망과 전통시장 등으로 연결되며 형성된 공동의 역사와 문화를 재조명했다.

이어서 종로문화재단이 「서울트립」 사업을 통해 발견한 동대문과의 교류 콘텐츠를 소개하고, 전차노선을 기반으로 형성된 전통시장(광장시장 및 경동·약령·청량리시장) 상인 10명의 구술채록 내용을 상영했다. 재단은 상인 인터뷰를 바탕으로 웹스토리북(종로편/동대문편)을 제작할 예정이다.

3부에서는 연극창작집단 아트프로젝트BE가 연극배우를 통해 듣는 시장 이야기 ‘오늘을 담다’를 타이틀로 낭독극을 선보였다.

<> 14일 오후, 종로문화재단의 사업담당자가 「서울트립」 공유워크숍에서 종로-동대문과의 공유콘텐츠 발견과 교류 과정을 발표하고 있다.

1899년, 서울의 동서축을 연결하는 교통망으로 돈의문(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이어지는 전차 노선이 개통되면서 동대문구와 종로구는 교통과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이 전차 노선을 중심으로 전통시장이 발전하며 두 지역은 지역적으로 밀접하게 교류하며 근대문화와 경제의 성장을 이끌었다.

동대문문화재단과 종로문화재단은 「서울트립」 사업을 통해 발굴한 공동의 자료를 축적하고 지속적인 협력을 통해 지역 예술인이 참여하는 콘텐츠를 활성화하여 시민들이 참여하고 체험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사업으로 발전시킬 예정이다.

2024년 11월 13일 수요일

라파엘로의 「아테네학당」

휴일 없는 11월답게 정신없이 바쁘다. 지난주에는 교육청 운영평가를 받았고, 이번 주말에는 서평원 성과공유회와 문해골든벨 일정이 잡혀 있다. 목·토·일 3일은 오전답사도 나간다. 오늘은 남산갤러리에서 9일간 전시한 학습자분들의 작품을 철수하는 날이다.

남산도서관 1층 벽면에 르네상스 3대 거장으로 꼽히는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1483~1520)의 「아테네학당」(The School of Athens)이 그려져 있다. 아치로 구현한 계산된 원근법은 58명이나 되는 등장인물이 산만하지 않도록 구도를 잡아주는 모습이다. 회화는 물론 철학, 수학, 과학에 아는 바가 미천하지만 9명 정도는 특정할 수 있다.

내가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중앙의 헐벗은 사람이 ①디오게네스다. 알렉산더에게 “좀 비켜줄래. 니가 햇빛을 가리고 있거등”이라고 요구했다는 냉소 개선비(⽝儒) 철학자다.

디오게네스 위쪽의 가운데 두 사람은 사제지간이다. 왼손에 「티마이오스」를 끼고 오른손 검지로 하늘(이상세계)을 가리키고 있는 흰수염이 ②플라톤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③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른손바닥은 땅(현실세계)을 향하고 있다. 그가 든 책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다. 두 사람 사이의 허공이 이 벽화의 소실점이다. 왼편 돌기둥 아래에서 산파술 공세를 펼치고 있는 풀색옷의 들창코 ④소크라테스가 보인다.

벽화는 계단을 가로축으로 상단에는 주류 철학자를, 하단에는 주로 수학자, 과학자, 예술가를 배치했다. 좌측 하단에서 두꺼운 책자에 뭔가를 끄적이는 사람은 ⑤피타고라스이고, 그 앞쪽의 얼굴을 괴고 앉은 고독남은 염세철학자 ⑥헤라클레이토스로 본다. 우측 하단의 허리 숙인 붉은옷은 기하학의 아버지 ⑦유클리드다. 콤파스를 들고 무언가를 시연하고 있는 모양새다. 유클리드의 1시 방향에서 얼짱 각도로 빼꼼하니 관객을 쳐다보는 이가 바로 이 프레스코 벽화를 그린 ⑧라파엘로다.

등장인물 중 홍일점이 피타고라스 위쪽의 흰옷 입은 ⑨히파티아(Hypatia)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로 지성과 미모를 겸비했기에 수많은 청혼을 받았지만, “저는 이미 진리와 결혼했어요”라면서 독신으로 지냈다. 2009년 레이첼 와이즈가 열연한 영화 「아고라(Ágora)」는 치릴로 주교에 의해 종교적 살인을 당한 히파티아의 드라마틱한 삶을 다뤘다.

전시 관람을 갔다가 뜻하지 않게 고대 서양 지성들을 만나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남산도서관 출입문 옆 벽면에는 “國之語音이 異乎中國하여 與文字로 不相流通일세…”로 시작하는 훈민정음 해례본 어지 부분과 이를 “나랏말싸미 듕귁에달아 문자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세…”로 풀이한 언해본이 위아래로 함께 부조돼 있어 공부거리를 더해 주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독서실이 아니라 사람들이 친근하고 자연스럽게 모이는 (공공)도서관이다. 도서관의 존재 자체만으로 우리는 많은 걸 느끼고 배울 수 있다. 위정자들이 새기면 좋겠다.

http://www.k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441


남산갤러리에서 평생교육 학습자의 작품 전시

서울중부교육지원청, 다가온 평생교육 작품 전시회 개최

서울특별시 중부교육지원청(교육장 강삼구)은 11월 5일(화)부터 13일(수)까지 남산도서관 1층 남산갤러리에서 2024년 「중부 다가온 평생교육 작품 전시회」를 개최했다.

남산갤러리에는 학력인정 문해교육 학습자, 장애성인 네트워크·학습동아리 학습자들의 시화, 그림, 공예품 등이 전시되고, 한 해 동안 운영한 프로그램의 활동사진과 동영상이 송출되었다.

<>6일(수)과 10일(일) 오전, 후암동 남산갤러리를 찾은 학습자들이 양말목을 말아 키링/브로치를 만들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갈월종합사회복지관(부채, 원형수틀, 사각액자, 텀블러) △남산골주간보호센터(공돌이워터볼, 압화보름달) △구립용산장애인복지관(캘리그라피, 부채, 목공시계) △종로장애인복지관(서양화) △서울중구장애인복지관(목공예품) △신당야학(합죽선) △한국여성생활연구원(청주머니, 모자이크방석, 뜨개나뭇잎, 동양화) 등 7개 기관이 참가하여 구성원들의 솜씨를 뽐냈다.

한편, ‘다(多)·가(加)·온(溫)’은 많은 사람들이(多) 더하는(加) 따뜻함(溫)을 의미하는 중부교육지원청의 평생교육 브랜드이다. 다·가·온은 교육소외계층 및 신문해계층(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사업과 지원프로그램의 통합을 지향한다.

<>6일(수) 오전, 한국여성생활연구원 졸업반 학습자들이 남산도서관 1층에서 라파엘로의 「아테네학당」를 배경으로 기념촬영하고 있다.


2024년 11월 10일 일요일

사자하 백마강의 슬픔

 △햏자1: 한국사 공부를 하는데, 왕이 사비로 수도를 옮겼다는 게 자기 돈으로 옮겼다는 건가요???

△햏자2: 아니 멍청아. 왕이 지 돈으로 옮겼겠냐? 역사는 기록되는 걸로 기억되는 거야. 유리하게 기록한 거지. 다 백성들한테 세금 걷었을 걸.

△햏자1: 오…

△행인1: 오는 무슨 ㅅㅂ


私費와 泗沘… 지난해 오늘, 부여로 가을소풍을 갔었다. 정림사지 앞마당을 지키고 선 1천4백살 오층석탑을 마주하며 탑멍에 빠져들었다. 부소산에 올라 사비수 굽어보며 애달픈 삼천궁녀의 그날을 떠올렸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2024년 11월 5일 화요일

현모양처의 대명사 신사임당

우리 역사 속 이름을 남긴 여성들 ①신사임당

여성 인물을 화폐에, 그러나 현모양처 이미지에는 거부감 보이기도

http://www.k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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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문해 중학과정 사회 3학년 교과서는 ‘Ⅳ-3. 역사 속 여성들의 생활’ 단원에서 우리 역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 4人의 삶을 소개하고 있다. 이 단원은 역사를 빛낸 여성들의 삶이 우리와 무엇이 달랐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첫번째 인물은 신사임당이다.

본명이 신인선(申仁善)이라고 알려진 사임당 신씨(1504~1551)는 평산신씨 신명화와 용인이씨의 둘째딸로 강릉 북평촌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주나라의 기틀을 닦은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스승으로 본받고자 당호를 사임당(師任堂)으로 삼았다.

18세(1522)에 덕수이씨와 혼인하여 사위가 처가댁에 머무는 전통에 따라 강릉에서 살다가 시댁이 있는 한양과 시댁의 본거지인 파주 율곡리로 이주하고 남편을 따라 평창군 봉평에 거주하기도 했다.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는데, 율곡 이이(1536~1584)가 셋째 아들이다. 넷째 아들 이우(1542~1609)는 금서시화(琴書詩畵)에 능통하여 ‘사절(四絶)’이라 칭송받았다.

맏딸 이매창(1529~1592) 역시 “이 어머니에 이 딸이 있다”고 기록될 만큼 금서시화에 뛰어났다. 선조 때의 부안(扶安) 기생 이매창(李梅窓·계랑, 1573?~1610?)과 동명이인이어서 혼동하기 쉽다.

<>신사임당의 그림 「훤원석죽」(원추리꽃과 패랭이꽃), 지본채색, 25.7×41.0㎝, 간송미술관 소장

신사임당은 어려서부터 시와 글씨, 그림에 재능을 보여 「초충도」 「양귀비꽃과 호랑나비」 등 다수의 그림, 서예작, 수자수 등을 남겼으나, 일부 연구자는 진작(眞作)이 희소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들 이율곡이 서인의 종주로 추대되면서 신사임당은 부덕의 상징, 현모양처의 모범으로 추숭되었다.

2009년 5만원 신권이 발행되기 이전인 2007년부터 여성 위인을 화폐의 모델로 삼자는 운동이 벌어졌다. 당시 여성계 일각에서는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 21세기의 상징 인물로는 다소 무리가 있다”면서 김만덕, 유관순, 허난설헌, 이태영, 윤희순, 임윤지당, 이빙허각 등을 추천하기도 했다.

2017년 신씨의 생애를 재해석한 SBS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에 배우 이영애가 사임당 역으로 출연했지만,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임진왜란 개전 초기 충주 탄금대전투의 지휘관 신립(1546~1592) 장군이 신사임당의 친정 조카가 된다. 1956년 이승만에 맞서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가 돌연사한 독립운동가 해공 신익희(1892~1956)도 신사임당의 가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