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22일 일요일

민속현장의 기록

현직 무당이 토론자로 참여한 특이한 학술대회를 경험했다. 민속현장의 과거와 현재·미래를 연구하는 학회의 발표 자리임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섭외일 것이다.

1부 ①북한정권이 간행한 ‘북한설화’와 남한학자의 ‘북한지역설화’를 구분하는 것처럼, 광복 후 북한에서 수행된 ‘북한탈춤 연구’와 월남한 사람들이 전승한 ‘북한지역 탈춤 연구’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②처음 접해본 해주탈춤 대본에서는 봉산탈춤의 맏양반 생원, 둘째양반 서방, 끝 도령 3형제를 대신하여 형제가 아닌 대양반, 소양반, 먹척꼬리양반, 종가도령 이름이 등장한다. 해주탈춤은 대본, 놀이순서, 가면 등 전승자료가 있음에도 봉산·강령·은율탈춤과 달리  복원되지 못했다. 사람 형상의 인간적 탈과 기이 형상의 귀면적 탈이 섞여 있는 30종의 해주탈은 원래 나무탈이었는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종이탈로 바뀌었다. 판소리에 그러한 것처럼 탈춤에도 무속적 인자가 내재해 있는지를 묻는 청중의 질문에 발표자가 무슨 까닭인지 제대로 답하지 않(못)았는데, 혹 뒤풀이 자리에서 이야기가 오갔는지 궁금하다. ③전국을 유랑하면서, 장터와 마을공터 등등 대중이 모이는 장소를 찾아 포장을 치고 가설무대를 만들어 연희를 펼쳤던 ‘포장극단’의 대본과 같은 시기 유행하던 유성기음반 이름의 유사성이 흥미롭다.


2부 ④중국에서 들어온 ‘성황(城隍)’이 구청·시청이라면 우리 고유의 ‘서낭’은 주민센터 정도로 위계가 있다는 박수의 발언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⑤김연갑 선생은 현 애국가의 최초 곡명이 ‘Patriotic Hymn 뎨14’이며, 친일한 사람이 작사자가 돼서는 곤란하다는 정부의 의중이 애국가 작사자를 윤치호로 하지 않고 ‘미상’으로 비워뒀다고 주장한다. ⑥춘사 나운규가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할 즈음 남쪽에서 온 노동자들이 일본인 감독 밑에서 철도노동을 하며 아리랑을 부르는 것을 가슴에 담았다가 배우로 인정받아 첫 감독 작품을 35㎜ 무성영화 「아리랑」으로 제작한 것이 영화 주제가 ‘아리랑’의 탄생 배경이다. 작곡가 서정(曙汀) 김영환의 다재다능이 돋보인다.


자료에 대한 포개읽기가 필요하다. 기록 차원에서 짧게 적어둔다.

△흔히 ‘서도소리’로 칭하지만, 옛 스승들은 ‘해서(海西)소리’로 불렀음. △포장극단의 핵심 정체성 중 하나는 ‘약팔이’임. △한국의 서낭은 돌탑보다는 신목(神木)과 밀접한데, 마을과 마을의 경계나 이승과 저승의 경계, 등용문·취업 등 어떤 일을 할 때 겪게 되는 관문과 같은 역할의 문을 지키는 신(門神)으로 길을 열기도 하고 막기도 함. △21가지 서로 다른 음가가 영화 「아리랑」 이후 ‘아리랑’으로 정형화됨. △단성사에서 영화 「아리랑」이 개봉하는 1926년 10월 1일은 총독부청사 준공식을 하는 날로, 일설에는 이를 방해하기 위해 악대를 광화문 주위로 돌게 하고 개봉일을 잡았다고 함. 일제는 개봉일 새벽, 가사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전단지 1만매를 압수했는데, 이 소문이 오히려 영화에 대한 관심을 증폭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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