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차가 있긴 하지만 오래전에 혜화동성당 방학동묘지에 부모님을 모셨다. 이번에 동생과 추석성묘를 갔다가 예년에 주차하던 곳에서 조금더 올라가 보았는데 이무영, 염상섭… 문인 두 사람의 묘표(墓表)를 발견했다.
경주이씨 이갑용(李甲龍, 1908~1960)은 충북 음성 태생으로 아명은 이용구(李龍九)다. 필명으로 무영(無影), 탄금대인(彈琴臺人), 이산(李山)을 사용했다. 휘문고등보통학교에 다니다가 중퇴하고 도일하여 일본인 소설가 집에서 숙식하며 4년 동안 작가수업을 받고, 1926년 장편 「의지할 곳 없는 청춘」으로 등단했다. 1929년 귀국 후 동아일보 기자, 1931년 극예술연구회, 1933년 九人會 동인으로 활동했다.
1939년 경기도 시흥에 정착, 농사를 지으면서 귀농지식인 김수택을 주인공으로 1930년대 농촌 현실을 묘사한 단편 「제1과 제1장」과 속편 「흙의 노예」로 유명해졌다.
흔히 농민문학의 대표작가로 회자하지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2009.11)와 친일인명사전(2009.11)에 일제 침략전쟁과 전사자 찬양, 지원병 징병 선전선동,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조선인의 협력독려 등 일제의 전시식민정책에 적극 협력한 그의 친일활동상과 친일문학의 구체적 내용이 적시돼 있다. 4·19혁명 이틀 후인 1960년 4월21일 뇌일혈로 숨졌다(52세).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부인 고일신(高日新)의 영향으로 세례를 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파주염씨 염상섭(廉尙燮, 1897~1963)은 종로구 체부동 출신이다.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1912년 일본 유학길에 올라 게이오(慶應)대학 사학과에서 수학 중 병으로 자퇴했다. 1919년 3월19일 직접 작성한 재오사카 한국인노동자대표 명의의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려다가 거사 하루 전에 발각, 피체돼 3개월간 복역했다. 이 사건이 이슈가 되어 귀국 후 1기 특채로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에 채용됐다. 1920년 폐허 동인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하고 1921년 개벽紙에 우리나라 최초의 자연주의 소설로 평가받는 단편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발표했다. 천주교 세례명은 바오로. 늘 술에 취해 갈지자로 걸었기에 횡보(橫步)란 별호를 얻게 됐다는 썰이 그럴듯하다.
여로형 중편소설 「만세전」(1922)에는 봉건적 무지함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일제에 굴종하면서 살아가는 전혀 희망이 없는 듯이 보이는 식민지 조선인의 모습과 어떠한 저항도 못하며 처참함을 느끼는 1인칭 주인공 이인화가 ‘무덤이다. 구더기가 끓는 무덤이다’와 같은 격한 표현을 내뱉는다. 그래서인지 3·1만세운동 직전의 비참한 조선사회를 보여주는 제목 「萬歲前」(시대일보)의 원제는 「묘지(墓地)」(신생활)이다.
장편 세태소설 「三代」는 조의관, 조상훈, 조덕기로 이어지는 1930년대 경성의 보수적인 중산층 가족사를 중심으로 재산상속 문제와 세대갈등을 통해 식민지 조선의 자화상을 그려냈다. 그나마 새로운 세대에 시대적 과제 해결의 희망을 걸고 있는 점이 위안이 된다.
백릉 채만식이 윤용구(선친)-윤두섭(향교 직원)-윤창식(주사)·윤태식(서자)-윤종수·윤종학(동경유학)-윤경손(증손자)으로 이어지는 윤씨 5대를 다룬 가족사 소설 「태평천하(太平天下)」와 비교하는 것도 흥미롭다.
혜화동성당은 세 곳(포천, 방학동, 도봉동)의 묘원이 있다. 이중 혜화동성당 방학동묘지 안에는…
시인 효공(曉空) 박지수(朴智帥) 묘 ― 국가유공자 최형억(崔亨億) 묘 ― 기업인 홍순모(洪淳摸) 묘 ― 소설가 횡보 염상섭 묘 ― 박준규(쌍칼)의 부친 영화배우 박노식(朴魯植) 가족묘 ― 한의사 두암(斗庵) 한동석(韓東錫) 묘 ― 시인 다묵(多黙) 강운회(姜雲會) 묘 ― 한국 및 전 일본 빤담급 참피온 권투선수 고봉아(高峰兒) 묘 ― 소설가 이무영 묘 ― 바이올리니스트 김형량(金亨亮)과 부인 소프라노 정훈모(鄭勳謨) 가족묘 ― 독립유공자 강순남(姜順南) 묘 ― 「인생극장」(영화 「장군의 아들」 원작)을 쓴 소설가 백파(伯坡) 홍성유(洪性裕) 묘가 있다. 인근의 정의공주 묘, 연산군 묘와 함께 날 좋은 날 탐방을 해도 괜찮을 듯.